참부모님 자서전 67

아버지 등에 업혀 배운 평화 - 세계가 하나되어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 아버지 등에 업혀 배운 평화 - 참아버님 자서전 14. 나는 평생을 한 가지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평화로운 세상, 전쟁과 다툼 없이 온 세계가 사랑을 나누며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아니, 어떻게 어려서부터 평화를 생각하며 살았단 말이요?"하고 되묻습니다. 평화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이 과연 巨創한 일인가요? 내가 태어난 1920년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强制로 占領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6.25전쟁과 외환위기 등 힘겨운 혼란을 여러 차례 겪으며 이 땅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 두 차례의 세계전쟁과 베트남 전쟁, 중동 전쟁 등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미워하며 총을 겨누고 爆彈을 터뜨렸습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

행복은 위하는 삶에 있습니다.

▣ 행복은 위하는 삶에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납니다. 부모가 없으면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 저 혼자 태어난 것처럼 개인주의를 부르짖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만이 개인을 주장하고, 개인주의를 말할 수 있습니다. * 세상에 자기만을 위해 탄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서로를 위해 탄생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있고, 너는 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처럼 어리석은 삶은 없습니다. 이기적인 삶은 자기를 위하는 거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파괴하는 삶입니다. 개인은 가정을 위하여, 가정은 민족을 위하여, 민족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 내가 세운 학교에는..

뜻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는 법입니다.

▣ 자네가 내 인생의 큰 스승이네. 자서전 131 임진강을 건너 서울 원주 경주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날이 1951년 1월 27일이었습니다. 부산 바닥은 피난 내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습니다. 조선 팔도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는지 사람이 살 만한 데는 처마 끝까지 다 들어차서 궁둥이 하나 집어넣을 곳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밤에는 숲 속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고 낮에는 밥을 얻으러 시내로 내려왔습니다. 그새 감옥에서 깎은 머리가 수북이 자라 있었습니다. 안쪽에 이불솜을 대고 꿰맨 바지저고리가 너덜너덜했고 옷에는 기름때가 배어 비가 오면 빗방울이 또로록 구를 지경이었습니다. 신발도 뚜껑만 달려 있을 뿐 바닥은 거의 남지 않아 맨발로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나는 항상 ..

모든 일엔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 칼은 갈지 않으면 무뎌진다. 자서전 69 69 보통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거쳐를 옮긴 나는 흑석동에서 자취를 하며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1938.4.12~1941.3.8)를 다녔습니다. 서울의 겨울은 무척 추웠습니다. 영하 2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것은 보통이었고, 그럴 때마다 한강물이 얼어붙곤 했습니다. 산등성이에 있던 자취집은 우물이 깊어 두레박줄이 열 발 이상 들어갔습니다. 끈이 자주 끊어지는 바람에 쇠사슬을 엮어 썼는데, 우물물을 퍼올릴 때마다 두레박줄에 손이 쩍쩍 들러붙어서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물을 길어야 했습니다. 날이 추우니 솜씨를 살려 뜨개질도 많이 했습니다. 스웨터도 떠 입고 두꺼운 양말이나 모자, 장갑도 모두 직접 뜨개질을 해서 만들었습니다. 내가 뜬 모자가 얼마나 예뻤는지 그..

행복은 항상 우리를 기다립니다.

▣ 세상 모든 물건은 하늘에서 빌린 것입니다. 자서전 370 * 나는 평생을 열심히 일해 왔지만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없는 사람입니다. 내 아내의 이름이나 자식들의 이름으로 돌려놓은 재산도 없습니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감도장 하나 없습니다. * 나는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돈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류를 위해, 가난으로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 돈은 한낱 종이 조각에 불과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은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위해 일하는 데 쓰여야 마땅합니다. *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물질의 풍요豊饒가 행복한 삶의 條件은 아닙니다. 잘산다는 말이 어쩌다 물질적인 풍요를 이르는 말이 되어 버렸는지 슬픈 ..

家和萬事成

▶ 평화로운 가정은 천국의 기초. 242 서양 사람들은 참 외롭게 살아갑니다. 자녀들은 18살만 되면, 집을 떠나서 크리스마스 때나 삐쭉 얼굴을 보이면 그뿐이고, 부모를 찾아가 안부를 묻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아예 독립해서 살다가, 혼자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면, 요양원으로 갑니다. 그래서 서양 노인들은 동양의 문화를 부러워합니다. 243가정은 식구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입니다.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남으면 그것은 이미 가족이 아닙니다. 대가족 제도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문화입니다. 나는 3대가 같이 사는 가정을 권합니다. * 부모는 현재를, 자녀는 미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조부모는 과거의 역사를 대표합니다. 따라서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자녀가 함께 살아야만 과거와 현..

정성을 다해 들어야 합니다.

▶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자서전 157 - "문 선생이 대한민국에서 내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 - 이야기를 청하는 사람의 마음은 절박합니다. 자기를 구할 동아줄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성을 다해 들어야 합니다. -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고 내 생명의 빚을 갚는 일입니다. * (서대문 형무소 1955.7.4~10.4. 수인번호 390번) 석 달 만에 나는 무죄로 석방되어 나왔습니다. * 식구들이 모여 예배드릴 집은 있어야 했기에 200만 원 빚을 얻어 청파동 언덕에 다 허물어져 가는 敵産 家屋적산 가옥(자기 나라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敵國)의 재산. 1945년 8ㆍ15 광복 이전까지 한국 내에 있던 일제(日帝)나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광복 후에 이르는 말)을 샀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게 됩니다.

* 성진님 탄생 1946.4.2(음 3.1.) * "38선을 넘어가라!" 1946.5. * 평양 도착 1946.6.6. * 평양 대동보안서 1946.8.11.~1946.11.21. 석 달 만에 석방. - 1946년 8월 11일 나는 남한에서 올라온 스파이라는 죄명을 쓰고 평양 대동 보안서로 끌려갔습니다. 이승만이 이북 정권에 욕심을 내고 북한에 밀파한 첩자라고 옭아맸습니다. 소련 조사관까지 나서서 나를 심판했지만 죄가 없는 걸 어쩌겠습니까. 결국 석 달만에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문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러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지만 교회 식구들이 거둬주었습니다. * 기성교회 목사 80명이 경찰서에 투서. * 북한 내무서 구속 1948.2.22. - 1948년 2월 ..

서로를 인정하고 도우며 사는 것이 우주의 진리입니다.

▣ 아버지 등에 업혀 배운 평화. 자서전 14 - 서로를 인정하고 도우며 사는 것이 우주의 진리입니다. 나는 평생을 한 가지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평화로운 세상, 전쟁과 다툼이 없이 온 세계가 사랑을 나누며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평화를 실현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공기, 자연환경 그리고 사람에게서 우리는 쉽게 평화를 구할 수 있습니다. * 들판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어린 시절, 나는 아침밥을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뛰쳐나가 온종일 산으로 강으로 쏘다녔습니다. * 산에서 뛰놀다 잠이 든 적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 숲으로 나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龍明아, 龍明아!"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면 자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게 반가웠습니다..

사랑의 칼로 고통을 끊는다.

▣ 심장이 아플수록 송두리째 사랑하라. - "사랑의 칼로 고통을 끊는다." 64 분명한 건 내가 하늘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엄청난 그 책임을 도저히 다 할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혼란스런 마음을 다스리려 이전보다 훨씬 더 기도에 매달렸지만 그마저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을 만나 기억에서 잠시도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울음이 솟구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 두려움을 시로 썼습니다. ▶영광의 면류관 65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슬픈 얼굴이 내 가슴 안에 火印처럼 찍혀서 다른 생각, 다른 마음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66 그날 이후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버렸습니다. *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