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자서전

모든 일엔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true2020 2022. 10. 23. 10:30

◑ 칼은 갈지 않으면 무뎌진다. 자서전 69

 

69 보통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거쳐를 옮긴 나는 흑석동에서 자취를 하며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1938.4.12~1941.3.8)를 다녔습니다.

 

서울의 겨울은 무척 추웠습니다. 영하 2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것은 보통이었고, 그럴 때마다 한강물이 얼어붙곤 했습니다.

 

산등성이에 있던 자취집은 우물이 깊어 두레박줄이 열 발 이상 들어갔습니다. 끈이 자주 끊어지는 바람에 쇠사슬을 엮어 썼는데, 우물물을 퍼올릴 때마다 두레박줄에 손이 쩍쩍 들러붙어서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물을 길어야 했습니다. 

 

날이 추우니 솜씨를 살려 뜨개질도 많이 했습니다. 스웨터도 떠 입고 두꺼운 양말이나 모자, 장갑도 모두 직접 뜨개질을 해서 만들었습니다. 내가 뜬 모자가 얼마나 예뻤는지 그 모자를 쓰고 나가면 다들 나를 여자로 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내 방에 불을 넣어 본 적이 없습니다. 불을 넣을 형편도 못 되었고 혹한에 집도 없이 길가에서 언 몸을 녹이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나마 지붕 아래 누워 잠을 청하는 내 처지가 호사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70 하루는 하도 추워 알전구를 화덕처럼 끌어 안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다가 뜨거운 전구에 데어 살갗이 벗겨진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하면 그때의 추위가 먼저 떠오릅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반찬 하나 이상 올려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일식 일찬, 반찬 한 가지면 족했습니다. 자취 때 습관이 되어서 나는 많은 반찬이 필요 없고 짭짤하게 간이 된 것 한 가지면 족했습니다. 지금도 밥상에 반찬을 수두룩하게 올려놓은 것은 보면 괜히 번거로운 생각이 듭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나는 점심을 먹지 않았습니다. 산으로 쏘다니던 어릴 적 습관 덕분에 하루 두 끼면 배고픈 줄 모르고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서른이 되도록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서울 생활은 나에게 살림살이의 고단함을 절감케 했습니다.

 

1980년대에 흑석동을 찾아가보니 놀랍게도 하숙하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문간방이며 빨래가 널린 마당이 수십 년 전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손을 호호 불어가며 찬물을 길어 올리던 우물은 사라져 안타까웠습니다.

 

* 그 시절 내 좌우명은 "우주 주관을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부터 완성하라."였습니다. 내 몸을 먼저 단련한 다음에야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할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71 나는 식욕은 물론 일체의 感性과 欲求에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내 의지대로 주관할 수 있을 때까지 기도와 명상, 운동과 수련으로 나를 단련시켰습니다. 그래서 밥을 한 끼 먹어도 "밥아, 내가 준비하는 일의 거름이 되어다오." 하며 먹었고 그런 마음으로 복싱도 하고 축구도 하고 호신술도 배웠습니다.

 

* 경성상공실무학교를 다닐 때는 학급 청소를 나 혼자 도맡아 했습니다. 

 

* 남들보다 학교를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와 그랬습니다. 남이 도와주는 것도 탐탁지 않아 혼자 해치우려고 애를 썼고, 어쩌다 남이 청소한 것도 내 손으로 다시 했습니다. 그러면 친구들이 전부 "그럼 너 혼자 해라"고 해서 자연히 학교 청소는 내 몫이 되었습니다.

 

나는 좀처럼 말이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처럼 재잘재잘 얘기하는 법도 없었고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주먹질을 한 것도 아닌데 동급생들은 나를 어려워하며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변소에서 소변을 보려고 기다리다가도 내가 가면 얼른 자리를 내주었고 고민이 있으면 우선 나를 찾아와 의논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선생님들 중에는 내 질문에 대답을 못해 도망간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72 수학이나 물리학 시간에 새로운 공식을 배우면 "그 공식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물고 늘어졌습니다.

 

*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논리 하나하나 검증해 믿기 전에는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멋진 공식을 왜 내가 먼저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공연히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밤새 울고 고집을 부리던 성격이 공부하는 데에도 고스란히 드러난 겁니다. 공부를 할 때도 기도할 때처럼 온통 정신을 집중하며 정성을 쏟아부었습니다. 

 

* 모든 일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것도 하루이틀이 아니라 언제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한번 쓰고 갈지 않은 칼은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정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칼을 날카롭게 갈아 날을 세운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지속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정성을 들이면 자기도 모르는 새 신비스런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붓을 잡은 손에 정성을 넣어서 "이 손에 위대한 화가가 와서 나를 돕는다." 하고 정신을 집중하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그림이 탄생합니다.

 

나는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려고 말하기 훈련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가갸거겨 갈날달랄…" 소리를 내어 빨리 말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73 나이를 많이 먹은 지금도 나는 말이 참 빠릅니다. 어떤 이들은 말이 너무 빨라 알아듣기 어렵다고도 하지만 나는 마음이 급해 도저히 천천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속에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데 어떻게 천천히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이야기를 즐기셨던 우리 할아버지를 꼭 닮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3시간이든 4시간이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상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으셨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밤이 새는지 새벽이 오는지도 모릅니다. 가슴속에 쌓인 말이 흘러나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밥 먹는 것도 달갑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좋을 수 없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힘이 들어 이마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히곤 합니다. 그래도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이야기를 계속해대니 차마 그만 가 봐야 한다는 말도 못 하고 나와 함께 밤을 꼬박 새우기 일수입니다.    

 

※ 경성상공실무학교

  • 교훈 : 윤리 도덕을 존중하자 타인에게 아량을 베풀자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불이 되자
  • 개교 : 1934년 4월 15일
  • 설립자 : 도이산요 (土居山洋)
  • 건학이념 : 기독교 정신에 기반하여, 조선인도 차별하지 않고 기술 교육
  • 설립 형태 : 사립 일반계 남녀공학
  • 교장 : 윤의진
  •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 207 (도곡동 108)
  • 교목 : 은행나무
  • 교화 : 개나리
  • 학교법인 : 중앙대학교
  • 1934년 4월 15일 조선직업강습학원 설립 (경성부 연건동 195번지[現 서울 종로구])
  • 1936년 6월 27일 경기도 시흥군 장면 흑석리 234[現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교사 신축 이전
  • 1939년 2월 3일 경성농공실무학교 개편
  • 1944년 3월 2일 京城商工實務學校 개편
  • 1946년 9월 26일 경성상공중학교로 개편 (6년제)
  • 1951년 6월 7일 낙양중학교와 낙양공업고등학교로 분리
  • 1961년 11월 20일 낙양상업고등학교로 변경
  • 1962년 11월 24일 서울명수대상업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 1965년 2월 24일 학교법인 창문학원이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에 인수됨에 따라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및 부속여자고등학교로 개칭
  • 1991년 1월 18일 학교법인 중앙대학교로 명칭 변경
  • 1997년 3월 1일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와 부속여자고등학교를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통합, 현 위치로 교사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