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164

일본 선교와 최봉춘. 1958.7.17.

* 1955.3.24 이화여자대학 교수 등 5명 면직. (양윤영, 한충,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 * 1955.5.11 이화여자 대학생 14명 퇴학 * 1955.7.4 병역법 위반 및 불법감금 이유로 서울 중부 경찰서 구속 * 1955.10.4 서울 지방법원 무죄 선고 * 1955.10.7 용산구 청파동 1가 71번지로 교회 이전 * 1956 충남 계룡산 갑사 휴양 기도 중, 일본이 아시아에서 다시 문제가 될 때가 온다는 것을 예감하시고 한국 정부가 무고誣告ぶこく (사실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꾸미어 해당 기관에 고소하거나 고발하는 일.)하게 참아버님을 투옥하셨던 희생을 조건 삼아 밀항 선교를 계획하심. * 1958.7.17 일본 선교 ▶ 崔奉春 (일본명 西川 勝, 호적상 이름은 崔翔翊 최상익) * 27..

간증·인물 2013.06.20

황선조 총장 - 곁에서 본 문선명 선생

◑ 황선조 선문대 총장. 그분과의 첫 인연은 36년 전, 신비한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군인이었다. 1970년 중반, 그때만 해도 군대의 비상약으로 진통제마저 제대로 준비가 안 되던 시절이었다. 산꼭대기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 갑작스러운 치통으로 심한 고통을 겪던 차에 새벽 비몽사몽의 한 체험을 하게 됐다. 의자에 앉은 채 고통을 참으며 새벽을 맞는데 잠깐 꿈속에서 일면식도 없는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필자에게 입을 벌리라 했고 벌린 입속에 큰 철퇴를 집어넣고는 막 돌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깜짝 놀라 깨었는데 사흘간 계속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 사라졌다. 자고 있던 동료를 깨워 이 신비한 사실을 흥분된 상태로 말하니 그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분이 바로..

간증·인물 2012.09.22

석준호 회장-곁에서 본 문선명 선생

◑ 석준호 한국 통일교 회장-곁에서 본 문선명 선생 참부모이신 문선명 총재님이 인류 구원과 평화세계 창건을 위해 수고하신 업적은 참으로 방대하다. 축복결혼 섭리, 심정문화예술활동, 남북통일운동, 해양 섭리, 유엔 갱신운동, 종교일치운동, 국제승공운동, 국제구호활동 등 이 모든 내용을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간절하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역사적인 한 단락만 잠깐 소개한다. 총재님의 부름을 받고 1972년 미국으로 떠난 이래 나는 미국·소련·중국 등 해외에서 36년간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선교사역 동안 역사를 통찰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총재님의 예지력과 깊은 혜안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1991년 12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해체 사건이 가장 오롯..

간증·인물 2012.09.22

양창식 회장- 곁에서 본 문선명 선생.

◑ 양창식 통일교 북미회장- 곁에서 본 문선명 선생. - 2012. 문선명 총재가 최근 5년간 가장 정성을 들인 섭리 현장은 미국 서부 후버댐과 라스베이거스다. 후버댐 주변의 호수를 ‘레이크 미드’라 하는데 반경이 700여㎞에 달한다. 호수 근원지는 그랜드캐니언 남쪽으로 댐에서 240㎞ 정도 떨어져 있다. 문 총재는 직접 설계해 만든 보트를 몰고 한국과 미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선장을 대동한 채 이곳을 수백 번도 더 답사하셨다. 온갖 물고기 종류를 다 살펴보시며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양식업으로 전환하여 미래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베링해협에서 조업하는 대형 가공시설이 곁들여진 배를 ‘오션 피스(OceanPeace)’라 명명하시고 일본 사람 50명을 뽑아 100달러씩 나눠주며 생선..

간증·인물 2012.09.22

손대오-나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손대오 - 한국평화연구학회 이사장 - 선문대 부총장 내가 문선명 총재님을 처음으로 뵌 것은 1964년 9월이었다. 서울 숙명여대 부근 청파동에 있는 당시 통일교회 본부교회에서 문 총재님이 주재한 토요일 청년대학생 모임에서였다. 그때 총재님의 연세는 45세셨고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해는 온 나라가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 문제로 잠잠할 겨를이 없었다. 3월 초에 대학 입학식을 마치고 개강이 되자마자 대학가에서는 굴욕적인 한·일 협상 반대를 위해 매일 같이 데모가 일어나던 때였다.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시골 청년이었다. 나라 사정은 어려웠지만 꿈 많은 시절이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것은 한국의 얼과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 우리 민족사에 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중학생 때는 “우리의 힘으로 ..

간증·인물 2012.09.22

보희씨, 여기가 어디라고 잠을 자고 있어요?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내가 워싱턴타임스 사장을 하고 있을 때 뉴욕에 갔다가 납치된 적이 있다. 워싱턴타임스가 공산주의의 허점을 찔러 강력히 비판하자 공산주의자들은 통일교와 워싱턴타임스를 증오했다. 그들은 문선명 총재와 나를 살해하려고 계획하기도 했다. 한번은 뉴저지주 고속도로에서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다가 차량 안에 많은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이 실려 있었다. 데려가 엄중히 신문하니 “문 총재가 보스턴에서 낚시를 할 때마다 묵는 집에 지금 투숙 중인 것을 알고 있다. 다이너마이트로 그 집을 폭파해 문 총재를 제거하려 했다”고 실토했다. 1984년 11월27일 뉴욕에 갔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가 왔는데 호텔에서 잠깐 만나자고 했다. 나는 결례를 범하는 것을 원..

간증·인물 2012.09.22

사쿠라이 선생님의 성화 20111120

◑ 사쿠라이 선생님의 성화 2011년 11월 20일 (천력 10월 25일) 오후 10시 48분 향년 72세 1939년 10월 25일 생 12쌍 축복 가장 신앙이 짧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님이 기독교 신앙 7년을 인정해 축복에 참석, 가장 신앙이 긴 부인과 매칭되었다. 별병이 "원죄 있는 예수님"이었다. 桜井先生は、私の所属する教会に来てくださり、 礼拝説教を何度かしてくださったことがあります。 その中で、いつも語られたのは、 文先生が日本を愛される姿でした。 数年前の説教ですが、記憶を辿りつつ、 印象に残っている証しを紹介したいと思います。 ☆ 文先生が、1991年にご来日された時の証です。 大阪でみ言葉を語られた後に、 新幹線で東京に向かわれました。 途中、京都駅のホームに人だかりがありました。 文先生の乗った車両近くに多くの食口が 文先生..

간증·인물 2012.09.08

정경균 박사(서울대 교수) - 후쿠다 수상의 증언 -

"난 정말 몰랐었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늘 강연회를 다니면서 생각이 나는 유행가의 가사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르는 바보다. 나는 통일교회 피해자다. 누구보다도 통일교회를 저주했던 사람이다. 54년에 서울대에 입학했다. 형제는 5남매. 폭격으로 허허벌판이 된 집터에 먹을 것도 없는 그때에 선친께서 문선명 선생을 만나시더니 조부도 모친도 저희 5남매를 싹 버리고 하!. 1954년 그 겨울 받이에 전도를 떠나더라. 이거 상상이 가능합니까? 1979년도에 동경대학에 가 있을 때다. 저녁 TV를 켰는데 후쿠다 전 수상의 기자회견이었다. 한 기자의 질문 "후쿠다 선생! 당신이 수상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만이 일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했는데 지금의 소..

간증·인물 2012.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