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준호 한국 통일교 회장-곁에서 본 문선명 선생
참부모이신 문선명 총재님이 인류 구원과 평화세계 창건을 위해 수고하신 업적은 참으로 방대하다.
축복결혼 섭리, 심정문화예술활동, 남북통일운동, 해양 섭리, 유엔 갱신운동, 종교일치운동, 국제승공운동, 국제구호활동 등 이 모든 내용을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간절하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역사적인 한 단락만 잠깐 소개한다.
총재님의 부름을 받고 1972년 미국으로 떠난 이래 나는 미국·소련·중국 등 해외에서 36년간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선교사역 동안 역사를 통찰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총재님의 예지력과 깊은 혜안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1991년 12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해체 사건이 가장 오롯이 기억에 남는다.
1985년, 총재님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2차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의 제목을 ‘소련 제국의 멸망’으로 정하셨다. 소련의 기세가 등등했던 그때 시카고대학의 카플란 박사를 앞세워 총재님은 ‘공산주의의 종언’을 선언케 하셨다.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1990년 4월, 총재님은 세계 유수 언론 대표들과 함께 소련 모스크바에 입성하셨다.
제11차 세계언론인대회를 성황리에 마친 후, 총재님은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역사적인 단독회담을 하셨다.
그 후 총재님은 나에게 “소련 학생 3000명을 미국에 데려다가 특별교육을 해야 한다”고 긴급 지시하시며 “무슨 일이 있어도 1년 안에 끝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당시 미국과 소련 학생들의 교류는 1년에 기껏해야 7, 8명이 전부였기 때문에 3000명은 상상 속에서도 감이 오지 않는 숫자였다.
그러나 총재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는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래서 나와 스태프들은 소련으로 건너가 총재님이 주신 사명에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 국가 정보기관의 끊임없는 감시와 관찰을 받으면서도 교육은 총 27회에 걸쳐 3450명을 배출하고 1991년 8월 초 성황리에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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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한학자 총재(왼쪽) 내외가 2008년 11월 세계순회 중 중앙아시아 공항에서 석준호 회장 부부로부터 선교현장 보고를 받고 있다. |
그런데 8월 17일, 교육이 끝난 바로 며칠 후 소련에 초유의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에 반기를 든 국가 고위직들의 도발이었다.
도심 한복판에 탱크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3일 만에 기적적으로 종식됐다. 총재님의 지시로 교육된 3000여 명의 학생이 주축이 되어 민중들과 함께 온몸으로 인간방패를 형성한 것이다.
소련 정부는 후일 쿠데타 진압의 일등공신이 문선명 총재님임을 공식 발표했고 문 총재님으로부터 교육받은 3000여 명의 젊은이가 아니었다면 소련은 또다시 냉전시대로 후퇴하고 말았을 것임을 천명했다.
총재님은 소련에 쿠데타가 발발할 것을 이미 꿰뚫어 보시고 불가능에 가까운 3000명 교육을 그토록 다급히 지시하셨던 것이다. 모두가 선생님의 예지력과 깊은 혜안에 경탄하였다.
그해 12월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3개국 대통령은 소련 해체에 합의하는 공식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25일 성탄절 밤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함으로써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93년의 생애 동안 총재님은 헤아릴 수 없는 오해와 박해 속에 살아오셨다. 진실 여부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세상은 총재님 함자만 나오면 막무가내로 와글와글 시끌벅적한 소리를 냈다.
총재님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셨을 때도 편협한 시선으로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총재님은 세상 모두를 용서하셨고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대한민국, 이 나라 이 백성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하나님의 조국과 고향으로 대한민국을 축복하셨다.
참으로 총재님을 모시고 함께했던 시간들 하나하나가 역사였다. 일생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종교와 국가, 이념의 벽을 넘어 하루를 천년처럼 여기며 고군분투하신 총재님의 삶을 후대 역사는 바르게 평가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총재님을 생각하니 목울대가 또다시 먹먹해진다. 사무치게 그립고 또 그립다. 총재님은 인류에게 영원한 선물로 생명의 말씀 (8대 교재 교본)과 참사랑을 남겨 주셨다. 이제 이 선물에서 놀라운 섭리적 기적들이 펼쳐질 것을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총체적으로 완성·완결·완료하시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총재님은 한학자 참어머님과 더불어 천지인참부모의 위상과 권위를 갖고 지상과 천상을 아우르며 천일국(天一國)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더 깊고 넓은 섭리를 경륜해 나가실 것이다.
그리고 통일교 식구들은 천지인참부모님이 일생을 통해 보여 주신 위함의 철학, 참사랑 정신을 기초로 하여 인류 구원 사역에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사실 과거 나는 통일교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모친 최원복 교수(영문학)가 통일교 신앙을 했다는 이유로 이화여대에서 강제 퇴직을 당했고 또 사회 일각으로부터 통일교가 많은 몰이해와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유도에 심취했던 나는 운동을 하다가 그만 몸을 다쳐 2∼3년가량 병마와 싸워야만 했다. 그 기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인생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며 씨름하던 때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통일교를 알아보라”는 하늘의 분명한 음성을 듣고, 스스로 통일교를 찾아가 원리(통일교 교리)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 무렵 문선명 총재는 성지 택정을 위해 세계세계 순회를 하고 계셨다. 필리핀에서 총재님은 모친에게 “아들 중 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올 때가 되었다”는 말씀을 주셨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나는 그 시점에 원리 말씀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으로 통일교인이 될 것을 결심하였다.
메시아·재림주·구세주
서울 청파동 교회 시절, 문 총재님은 언제나 오랜 시간 동안 눈물어린 기도를 하셨다. 예배당의 강대상과 그 주변 마룻바닥은 늘 총재님의 눈물로 젖어 있었다.
예배 때 말씀을 하시면 수 시간 동안 폭포수와 같은 열변을 토하셨다. 특히 설교 말씀이 사탄으로 인해 죄악 된 세상에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끊임없이 고군분투하시는 하나님의 서럽고 안타까운 심정에 다다르면 총재님과 함께 식구 모두가 통곡을 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통일교 입교 이래 47년이 흐른 지금까지 총재님을 지근에서 모셨지만 총재님을 잘 안다고 감히 자부할 수 없다. 나는 아직까지도 총재님의 그 깊고 심오한 바다와 같은 마음의 세계를 다 알지 못한다.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절규에 함께 오열하는 총재님의 기도 소리의 의미를 아직까지 다 알지 못하며, 어느 기독교인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총재님의 애틋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또한 섭리를 정확히 예견하시고 준비하시는 총재님의 깊은 혜안, 하나님의 섭리를 놓고는 총칼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총재님의 백절불굴의 용기를 아직까지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은 나의 분명한 증언이요 고백이다.
총재님은 사무친 한으로 고통받던 하나님을 해방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 오신 재림주이시다. 죄악으로 점철된 이 세상을 평화세계로 바꾸기 위해 오신 구세주이시다. 인류를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오신 참부모이시다.
속임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사랑
총재님은 사람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분이셨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의 구별이 없으셨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 하여, 가진 것이 없어 궁색하다고 하여, 늙은 사람이라 하여, 배움이 짧다고 하여 세상적인 잣대로 그 사람을 평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심지어 일제 식민치하 때 자신을 극악무도하게 고문했던 경기도 경찰부의 일본인 형사를 해방이 되자 일본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그에게 탈출구를 마련해 주셨다.
이것은 그 일본 형사가 현재 자신의 입으로 직접 증언함으로써 더욱 확연히 부각되고 있다. 총재님에게는 그 누구도 원수로 남아질 수 없었다. 어느 누구든 사랑으로 녹여내셨던 것이다.
나는 총재님께 수많은 정치인과 종교인, 사회 저명인사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았다. 총재님께 평화와 사회 제반 문제를 놓고 진정으로 자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짓말을 하면서 무언가를 원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곁에서 우리가 보아도 감언이설을 일삼는 것이 확연했다. 그럼에도 총재님은 때로는 그들의 말을 의심치 않으시고 그대로 속아 주시며 수용하셨다.
총재님은 사탄과 타락한 인류에게 수천 년 동안 속아 오신 하나님의 한, 예수님의 설움을 체휼하고 위로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고개도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 15세 때 총재님이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고 지으신 시에도 나오듯 총재님은 속임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사람을 믿으셨고 자신을 증오하는 자들을 송두리째 사랑하셨다.
나는 총재님의 대지 위에 내리는 햇살과 같은 참사랑을 수없이 목격했다. 총재님의 사랑은 주고 또 주고 또 주는 사랑이었으며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않는 참사랑이었다.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절대적인 참사랑이었다.
혹자는 종교지도자이니 그런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쉽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종교지도자를 만나 보았다. 그러나 사람을 그토록 가슴으로 끌어안고 심장이 먹먹해질 만큼 사랑한 분을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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