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손대오-나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true2020 2012. 9. 22. 12:36

◑ 손대오

- 한국평화연구학회 이사장

- 선문대 부총장

 

내가 문선명 총재님을 처음으로 뵌 것은 1964년 9월이었다. 서울 숙명여대 부근 청파동에 있는 당시 통일교회 본부교회에서 문 총재님이 주재한 토요일 청년대학생 모임에서였다. 그때 총재님의 연세는 45세셨고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해는 온 나라가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 문제로 잠잠할 겨를이 없었다. 3월 초에 대학 입학식을 마치고 개강이 되자마자 대학가에서는 굴욕적인 한·일 협상 반대를 위해 매일 같이 데모가 일어나던 때였다.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시골 청년이었다. 나라 사정은 어려웠지만 꿈 많은 시절이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것은 한국의 얼과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 우리 민족사에 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중학생 때는 “우리의 힘으로 남북통일 이룩하자”라는 연제로 학생 웅변대회에 나가 목청을 높여 소리치던 꿈꾸는 소년이었다.

 

왜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거야? 왜 우리 민족은 이렇게 못살고 자존감이 약하단 말인가? 영어를 공부하면서도 나는 유엔총회 단상에서 각국 대표를 향해 유창한 영어로 연설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철학과 사상·이념을 잉태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숨겨 있는지 찾고 싶었다.

 

고교 3학년 말인 1963년 12월, 나는 일찌감치 고려대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해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게 되자 이런 사상적 탐구심이 더욱 발동했다.

그러던 중 필자에게 다가온 것이 문 총재의 통일원리였다. 설을 맞아 고향에 갔다가 큰댁 조카들로부터 문 총재님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내 귀를 번쩍 띄게 한 것은 “한국이 미래의 세계를 주도하는 세계의 중심국가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길로 선생의 사상이 체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원리해설’ 책을 구하여 정독했다.

 

시성 타고르가 일제 치하에서 고난 받고 있는 한국을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고 읊은 수수께끼 같았던 나의 애송시도 ‘통일원리’를 이해하고 나니 저절로 풀리는 것이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대학에 가면 이런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여러 분 계실 것 같았고, 뜻 있는 학생도 많이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내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1964년 3월 초 입학식이 있었다. 수석 입학한 나는 관례대로 전체 입학생을 대표하여 총장 앞에서 오른손을 들고 입학선서를 하게 되었다.

 

당시 총장이던 유진오 선생은 전체 수석 학생이 문과대학 국문과에서 나온 것에 호기심이 생기셨는지 며칠 후에 나를 총장실로 불러 국문학과를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나는 “우수한 학생들이 죄다 법경, 상공계로 가니 한국의 문화와 정신은 누가 지키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국문과로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유 총장님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네 꿈을 이루어라”고 격려해 주셨다.

개강하자마자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6·3 사태’가 벌어졌다.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대학 정문에는 계엄군이 진을 쳤다. 대학 문은 닫히고 조기 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원리해설’ 책을 챙겨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방학 중에 제대로 통일원리를 공부해 보고 싶었다. 대신동에 위치한 교회에 찾아가서 저녁마다 원리해설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질문도 많이 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니 전날 밤에 꿈을 꾼 내용이 또렷하게 생각나는 것이었다. 온 세상이 홍수로 물바다가 되어 많은 사람이 익사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저 앞쪽에서 어느 건장한 분이 나타나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시는데 물에 빠진 사람 하나가 뒤에서 그분의 허리를 껴안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앞사람의 허리를 껴안으며 순식간에 생명을 구하는 긴 대열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기차놀이 행렬처럼 시작된 대열이 점점 길어지고 많은 사람의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꿈을 꾸고 일어나니 그 꿈속에서 맨 앞장서시어 수많은 사람을 구출한 분의 영상이 잊히지 않고 뚜렷이 기억나는 것이었다. 그분이 입으신 옷은 잿빛 상하의인데 상의는 긴소매였다.

9월이 되자 긴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었다. 원리를 밝히신 그 어른이 청파동에서 대학생 모임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어렵사리 알게 되었다.

 

청파동이 어딘지도 몰랐던 나는 물어물어 찾아가서 집회에 참석했다. 100명 남짓한 청년 대학생들이 모여 앉았다. 마룻바닥에 앉는 예배당이었다. 흰 테이블보가 덮여 있는 조그마한 연단이 전부였다. 이윽고 선생님이 등장했다. 모두 손뼉을 쳤다.

 

연단에 서신 선생님은 청중을 한 바퀴 둘러보다 공교롭게도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학생은 나이가 몇인가?” “스무 살입니다.” “내가 학생 나이 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렇게 시작된 그날의 집회는 3시간 동안 선생님의 말씀으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