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기시 노부스케 岸 信介

true2020 2019. 6. 3. 10:07

▶ 昭和の妖怪 기시 노부스케 岸 信介

:1896.11.13 (山口県 吉城郡山口町 태어남) ~ 1987.8.7. 

:旧姓 佐藤

:기시 노부스케의 아버지 佐藤 秀助는 岸家에서 양자로 사토 가문에 들어왔다.   

:本籍 山口県 熊毛郡 田布施町

 

* 1919年 岸 良子と結婚

* 1920年 東京帝国大学法学部法律学科卒業 

 

* 1935年 対満事務局 事務官 만주국 총무청 차장

* 1941年 10月 東条内閣 제24대 상공대신

米國及英國ニ對スル宣戰ノ詔書 署名

 

* 1941年 4月 중의원 의원 9기

* 1945년 9월 ~ 1948년 12월  戦犯被疑者 東京都 豊島区 巣鴨拘置所(東京拘置所)

:極東国際軍事裁判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東条英機 등 7명의 사형 집행 (1948년 12월 23일) 곳.  

 

* 1955년 11월 초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 1957년 3월 ~ 1960년 7월 제3대 자유민주당 총재

* 제86대, 87대 외무대신

 

1957.2.25~1958.6.12 제56대, 1958.6.12~1960.7.19 57대 내각 총리대신.   

- 동생 佐藤 栄作1964.11.09~1967.2.17 61대 총리, 1967.2.17~1970.1.14 62대 총리, 1970.1.14~1972.7.7 63대 총리.  

 

▶ 北村 サヨ 선생 

* 岸가 스가모 형무소에 들어가기 전에 天照皇大神宮教(1947.1~) 교조 기타무라 사요는 心配せんでもええ。岸はいずれ首相になる。」"걱정 안 해도 된다. 기시는 어떻게 하든 수상이 된다" "10년 이내에 틀림없이 내각 총리대신이 된다"고 예언.   

 

* "종교로 생활하지 마라"  직업 종교가로 사는 것을 금지했다. 사요도 논밭일을 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 기타무라 사요가 1967.12.28 죽었을 때 기시 씨가 참석했다.  

 

▶ 문선명 선생

* 1974년 동경 제국호텔 희망의 날 만찬회 기시 선생이 실행위원장.

* 1984년 세계언론인회의 때는 기시 선생이 명예위원장으로 미국 댄버리에 투옥된 문선명 선생 석방을 위한 의견서를 레이건 대통령에게 서명해서 보냈다.

 

▶ 장개석

* 1954년 중국 국민당 장개석과 승공연합 창립 멤버. 1957년 수상 취임 3개월 후에 대만 방문, 장개석과 회담, 日華協力委員会를 만들었다.   

 

▶ 한일 관계

1965년 12월 한일 국교 회복.  당시 한국 박정희 대통령과는 만주국군 장교로서 인연되어 笹川 良一(1899.5.4~1995.7.18. 재단법인 일본선박진흥회, 현 공익재단법인 일본재단 회장. 대동아 전쟁에 반대. 2차 대전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스가모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 후 석방.) 등의 만주국 인맥을 통해 한일협력위원회를 결성했다. 

 

1.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시 수상을 설득시켜라.

 

▣ 1986.1.24(금) 우리의 갈 길. 한남동.

- 식구 교수.

 

138-313 모든 주력을 다 동원하여 그렇게 해 나온 것은 남북한의 통일을 위해서였습니다. 남북통일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요리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일본 조야, 일본 정부를 요리해야 됩니다.

 

138-316 그때 기시 노부스케라는 사람이 현대 일본 정치계에 있어서 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람입니다. 기시 수상, 이 양반을 만나는 데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를 만나 주나요? 통일교회 누구를 만나 주나 말이에요. 그때 통일교회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고 또 세계에 나쁜 소문이 나 있어서 푸-, 문전에서 불어 버리는 시대였어요. 

 

그래서 내가 삼총사, 여자 셋을 불렀어요. "너희들은 삼총사다. 너희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시 수상을 설득시켜라. 우리 간부들이 기시 수상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도록 해랴" 하는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싸웠는지 알아요? 기시 수상을 만나기 위해서 비서실장을 만나면 "왜 만나자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기시 수상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일본을 옹호하고,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 만나러 왔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통일교인이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발길로 차고 하며 사람 대접이나 해요?

 

1차도 쫓겨나고  2차도 쫓겨나고 3차도···. 그래도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별의별 수욕을 다 당했습니다. 담뱃불로 지지 지를 않나 발길로 차지를 않나···. 그것이 재료예요, 재료. 그게 재료이니 전부 사진을 찍어 두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일본에 갔을 때 그들에게 얘기했습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기시 노부스케가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가라.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만나게 해 달라고 해라. 비서실장이 틀림없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거든 멱살을 잡고 싸워라. 후려 갈리면서 싸워라" 했습니다. 

 

" 이 자식아, 너는 여기에 월급 받기 위해서 있느냐? 나는 일본을 위해서 온 사람이다. 네가 정말 이 나라의 애국자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우리 일에 충고를 해 주고 그래야 될 텐데, 돈으로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모욕을 하며 사람을 치느냐?" 하면서 싸우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서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안방에 들어가 가지고 싸우는데 기시가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나오라고 싸우는데. 나와서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까 자기의 비서실장이 잘못을 했다는 것입니다. 문을 열고 나와, "내버려 두라"고 해서 그때부터 45분 동안 면담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있었어요.

 

그래 가지고 "내 사무실이든 우리 집이든 어디든지 전화해라. 마음대로 해라. 나라에 필요한 일이라면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문을 열어 놓겠다"고 한 거예요.   

 

▣ 1971.1.9(토) 뜻이 가야 할 길. 강릉교회.

039-066 여러분, 일본에서 기시 수상하면 일본에서 일인자입니다. 그들 형제끼리 수상을 4선이나 했는데, 10여 년 이상을 해 왔습니다. 그들 형제가 지금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 한국의 운명을 위해서 이 형제들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을 두고 내가 7년 전부터 공작을 해 온 것입니다. 그 과정은 피나는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일본 식구 아가씨들에게 "너는 일본 간부에게 가서 종살이를 해라. 그것이 안 되거든 통곡을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 명령을 받은 통일교회 식구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면 그의 비서들에게 문전에서 배척을 받아 쫓겨났고 혹은 "너, 한국 문 아무개의 개야! 누구를 망치게 하기 위해서 문전에 와서 이러느냐"고 하는 등 별의별 욕을 다 들었던 것입니다. 문 아무개의 제자들을 개새끼 취급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 지금까지 버티며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기시 수상이 이번 합동결혼식에 축사까지 했지요? (1970년 10월 21일 777쌍 합동결혼식.)  이번에 한국에 왔을 때 우리 집을 방문하려고 했는데 사정상 못 하고 갔습니다. 이제는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 와클(WACL,World Anti-Communist League, 세계반공연맹. 1966年 蒋介石 政権下の中華民国台湾台北에서 結成. 1990.7.23 벨기에 뷔뤼셀에서 22회 총회 개최 개칭 1991.1부터 발효. 현재는 세계자유민주연맹 World League for Freedom and Democracy, WLFD)대회도 내가 전부 다 코치했습니다.

 

일본 전역에 있는 공산당을 반대하기 위해서 거국적으로 세계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대회 때 2억 7천만 엔의 예산이 편성됐는데, 경비를 자르고 잘라서 1억 7천만 엔의 대회 비용을 치러 가면서 우리가 투쟁을 한 것입니다. 돈 한 푼 없었지만 내가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 줘서 이 일을 치른 것입니다. 

 

* 그래서 3개월 동안에 일본의 국제승공연합 회장을 일약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 것이 그냥 되는 일입니까? 

 

* 어제는 일본 천황의 아들과 기시 수상을 중심 삼은 관료들 300여 명이 우리 어린이 무용단의 공연을 봤습니다. 그런 일이 그냥 됩니까?  

 

▣ 1972.5.10(수) 개척자의 길. 중앙수련원.

- 제3차 세계순회 귀국 후, 교회장. 전도대원.

 

056-051 내가 세계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시아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일본의 중차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계의 변동기, 자민당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가 되었는데 수상 후계자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구보끼가 기시 수상의 의논 상대가 되었습니다. 구보끼가 말하는 것은 전부 다 선생님이 코치한 것입니다.

 

어느 때는 일본의 누구보다도 구보끼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무슨 문제냐? 아시아의 현재의 동태와 일본 현재의 입장을 얘기하라고···. 한계선을 그어, 결론이 났으니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구보끼가 지금 40세밖에 안 되었지만 일본이나 아시아에서 정치하는 사람, 기시를 만나기 위해서도 언제든지 무사 출입할 수 있고, 후꾸다도 언제든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말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 1982.2.11(화) 가야 할  천국기지. 한남동.

- 일본 책임자. 일본어.

 

227-139 옛날 기시 씨를 만나기 위해 여자 三羽烏(さんばカラス. 삼총사.)를 보낸 적도 있어요. 침을 튀기면서 비서와 물고 뜯고 싸운 거예요. 뒤로 몰래 기시가 들어가는 것을 쫓아가서 물으니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뭐가 없어?" 이래 가지고 딱 들어가 따지는 거예요. 이야기하는 비서보다 우리 여자들 쪽이 더 당당하거든. 그래서 나와 가지고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누구 다른 사람이 길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상식이라구요. 자기가 만들어야 합니다.

 

2. 선화 어린이 무용단의 명예회장.

 

▣ 1969.5.18(일) 행복과 사랑. 수원교회.

- 제2차 세계순회 귀국 후.

 

023-139 선생님이 선화 어린이 무용단 명예회장을 누구를 시켰느냐 하면 일본의 기시 전 수상을 시켰습니다. 기시 수상이 한국의 코흘리개 선화 어린이 무용단의 명예회장이 되었으니 모두들 얼마나 놀랐겠어요.

 

사토 수상이 지금도 신망이 높은데 그 사토 정부가 발깍 뒤집어졌습니다. 누구의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딱 그렇게 해 놨으니 어떻겠어요? 

 

선화 어린이 무용단 입장권을 판매할 때도 1500엔 이상 받으라고 선생님이 일본 협회장에게 지시했습니다.  

 

▣ 1970.1.11(일) 세계에 봉화를 들자. 전본부교회.

028-228 선화 어린이 무용단의 일본 공연은 큰 모험이었습니다.

 

* 선생님이 특별지시를 해서 사사카와 씨를 회장으로 세우고, 기시 전 수상을 명예회장으로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한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고 그 계획을 전부 짰습니다. 그런데 중간보고를 들어보니 공연 일주일 전인데도 4천 장밖에 못 팔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3. 가인 아벨의 일본의 기시와 사토, 대만의 장경국과 장위국, 한국의 통일교회와 박정희 정권.   

 

▣ 1970.8.29(토) 부인 전도대원의 책임. 전본부교회.

- 1970.7.20~1970.8.29 하계전도 활동했던 대원들.

 

034-113 중국을 보게 되면 중국을 지배하는 이들은 장개석의 아들들입니다. 장경국이는 정치 분야를, 장위국이는 군사 분야를 책임졌습니다. 이렇게 형제가 중국을 주도하고 있는데, 이 두 형제가 문제입니다. 

 

일본도 사토 수상과 기시 수상이 형제간입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왜 그러냐?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한국도 가인 아벨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적 중심과 외적 중심이 하나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현 정부와 통일교회가 하나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 1971.10.9(토) 국가와 우리의 사명. 중앙수련원.

- 전국 사업소장 수련회.

 

049-166 사토 수상이 이번에 중국을 지지하자고 결정한 것도 선생님이 후원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5, 6년 전부터 공작을 했습니다. 6년 전부터 기시하고 사토를 붙들고 일을 시작했어요.

 

그래 가지고 그것이 자민당에서 간사장을 하던 다나카를 갈아치운 제일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그냥 두면 일본을 팔아먹는다구요. 그래서 구보끼더러 기시와 사토의 집에 가서 통곡하며 호소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된 거예요.

 

▣ 1971.12.22(수) 하나님은 어떻게 복귀섭리를  하시는가. 워싱턴 D.C.

052-074 한국이 40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지만 지금은 선생님이 일본에 말씀을 전파해서 일본을 통해서 아시아의 제반 문제를 조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통일교회와 국제승공연합을 통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중국의 문제가 유엔에서 거론되었을 때 福田 일본 외무장관(제3차 사토 내각 제99대 외무장관. 1971.7.5~1972.7.7 )이 미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서 미국에 왔습니다. 그는 일본을 자유중국을 위한 후원국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선생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이 구보끼 협회장한테 후쿠다, 사토 수상 부처 그리고 기시 전 수상을 만나서 그렇게 하도록 설득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비밀리에 선생님은 일본 사람들과 같이 장개석 총통과 자유중국을 위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052-075 한국 일본 그리고 자유중국은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섭리는 아시아에서 세계로 뻗어가고 있습니다. 

 

4. 기시 전 수상은 국수주의자.

 

▣ 1971.9.5(일) 제물의 완성. 전본부교회.

048-107 인도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모가지를 매는 것입니다. 이걸 일본의 최고 간부들도 다 아는 것입니다. 사토 수상까지 우리가 교육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일본 사상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기시 같은 양반들은 國粹主義(자기 나라의 고유한 역사전통정치문화만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믿고, 다른 나라나 민족을 배척하는 극단적인 태도나 경향) 사상이 골수에 배어 있는 걸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세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문화의 세계가 된다고 교육을 해 나왔기 때문에 국수주의 사상에서 자꾸 돌아가는 거예요.

 

사사카와 영감도 아주 철저한 국수주의자였습니다. 천황 외에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에 가서도 하늘을 지붕 삼고 뭐 어쩌고 하는 세계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5. 1965년부터 기시를 통해 가지고 통고했던 것. 

- "절대 미국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미국을 업고 다니라"

 

▣ 1974.2.8(금) 하나님이 가는 길과 인간들이 가는 길. 중앙수련원.

070-037 여러분이 아시아의 정세를 보게 됨다면 일본의 모모한 사람을 만나 가지고 말을 해 본 결과를 얘기하자면 금후의 일본은 상당히 어려운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라후토를 중심 삼고 소련 군인의 숫자가 24만 명, 함정으로 말하면 70여 함대, 그리고 잠수함으로 말하면 120척 이상이 주둔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전체 동원하게 된다면 일본을 일시에 휩쓸고도 남을 수 있는 함대력을 아시아에 이미 장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신문에 난 것을 보게 된다면 소련 항공기가 일본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런 소식들이 지금 나돌고 있다 이거예요.    

 

* 만약에 일본이 소련 앞에 휩쓸리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거예요. 또 한국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거예요. 한국은 그냥 그대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65년부터 기시를 통해 가지고 통고했던 것을, 지금부터 한 9년 전에 일본은 이렇게 가야 된다고 다나카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도 기시하고 후쿠다한테 통고했던 것을 한국 사람들이 모르는 거예요. 

 

여기 있는 문 선생이라는 사람이 청파동에서 욕이나 먹고 있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시아가 금후에 갈 길을 하나님이 원하는 뜻과 더불어 갈 수 있게 가려 주기 위해 배후의 7년 세월을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많은 경비도 쓰고 많은 사람을 투입해 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배척을 받는 이런 개척의 노정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일본 통일교회를 보면 그렇게 훌륭하지도 않다구요. 그런데 일본에서 내노라 하는 기시 같은 사람이 자기 차를 몰고 와 가지고 그곳을 방문할 수 있는 단계까지 된 것은 그 배후에 지금까지 내가 말했던 것이 그냥 그대로, 그 사실대로 아시아의 정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실정을 바라볼 때 중공과 소련이 일본을 누가 먼저 낚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일본을 자기 수중에 넣으면 아시아 제국을 제패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실정이기에 소련이 모험을 하고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보는 관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일본의 고위층에게 "절대 미국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미국을 업고 다니라"고 통고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나카 정부(640 1972.7.7~1972.12.22. 65대 1972.12.22~1974.12.9))가 들어와 가지고 현재 외교 정책에 실패한 결과가 이것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6. 1974년 5월 7일 도쿄 제국호텔, 희망의 날 만찬회 실행위원장.

 

▣ 1974.4.28(일) 혼란과 분열과 통일. 전본부교회.

071-083 이번 1974년 5월 7일에도 전 일본에서 역사상에 없는 뱅퀴트를 하려고 한다구요. "지금까지 제국호텔에서 했던 최고 기록을 세워라!" 이래 가지고 기시 전 수상이 여기에 지금 환영위원회 회장이 돼 가지고 공문을 전부 다 보냈다구요. 나중에는 거기에 많이 몰려올 거라구요. 

 

그러면 누구냐 이겁니다. 난데없이 통일교회 문 선생이라는 사람이···. 기시 수상이 회장이 돼 가지고 초청하는데 일본에 있는 전 중진들에게 "다 오소" 공문을 냈으니 그날 아마 참석할 거라구요. 이렇게 해 가지고 선생님을 소개할 거라구요.  "여러분들이 오늘 참석해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레버런 문이 이러이러한 분이라고 선생님을 소개할 거라구요. 

 

그런 놀음을 왜 하느냐 이거예요. 문 선생님이 출세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구요. 아시아를 돕기 위한 거룩한 뜻을 중심 삼고 하는 거라구요.  

 

▣ 1980.11.1(토) 금후에 한국이 나아갈 길. 이천 승공연수원.

- 전국 자문위원회 위원장단 승공 세미나.

 

109-233 기시 수상 같은 사람은 내가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일본의 제국호텔에서 만찬회 할 때 실행위원장을 해줬습니다. 알겠어요?  거, 왜 악명 높은 문 아무개가 전 일본의 유지 한 2천 명을 불러다가 강연하는 마당에 있어서 실행위원장에 앉아 가지고 자기 이름 위에 내 이름을 박아 가지고 초청장을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에요?

 

109-243 지금까지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돼 있었는데 이것을 통합하기 위한 개헌 문제도 기시 수상을 중심 삼아 가지고 열매 맺으려 한다구요.  이런 모든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본 종교계를 배후에서 조종해야 된다는 거예요. 레버런 문은 그런 대회를 지금 짜고 있습니다. 다방면으로.  

 

▣ 1982.10.21(목) 통일교회와 세계. 서울 롯데호텔.

- 문선명 선생 귀국 환영대회. 세계평화교수협의회.

 

121-016 그때 제국호텔에서 뱅퀴트를 했는데 전국에서 최고의 네임 밸류를 가진 사람들이 한 1700명 모였어요. 거기에서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이 실행위원장이 되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기시 전 수상이 뱅퀴트에서 레버런 문 연설하는데 실행위원장이 되었다 이거예요.

 

그것이 말은 간단하지만 그 배후의 역사라는 것은 참 피눈물 나는 일이 많습니다. 그건 책으로 몇 권도 될 거예요. 사토 수상까지도 전부 다 배후로 엮어 가지고···. 그때 형제끼리 싸우고 있었다구요. 내가 화해 붙이는 공작에서부터 참 일화가 많습니다.

 

7. 1975.2.13~15. 희망의 날 강연회 실행위원장.

후쿠다 다케오 "아시아에 귀인이 있는데 그가 문선명 선생님이다"

 

▣ 1986.1.24(금) 우리의 갈 길. 한남동.

- 식구 교수.

 

138-316 그리고 1975년도에 일본에 있는 고수들을 모으려고 한 거예요. 소위 일본의 대가리 되는 녀석들을 모아 놓고 한 대 때려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 한 1700명, 일본을 움직일 수 있는 요원들, 이름난 사람들은 다 끌어모은 것입니다.

 

그때에 뱅퀴트의 책임자, 실행위원장이 누가 되었느냐? 기시 노부스케였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기시 노부스케를 만나지 않았지만 내가 부탁을 해 가지고 실행위원장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일본 정부의 고수들을 움직이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 놓으니까···, 기시 노부스케의 직속 부하가 후쿠다(1905.1.14~1995.7.5 君馬郡金子町。東京帝国大学法学部法律学科卒。三木内閣 第26代経済企画庁長官1974.12.9~1976.11.6 제67대 내각총리대신 1976.12.24~1978.12.7 ) 수상이에요. 그때가 대장성 대신하던 때였어요. 기시는 후쿠다가 틀림없이 앞으로 수상이 될 것이라며 불러내 가지고 만찬 때에 축사를 시켰습니다.

 

그때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아시아에 귀인이 있는데 그가 문선명 선생님이다"라는 내용의 강연을 한 거예요. 그것이 지금까지 문제예요. 일본 천하에. 그것이 그냥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에요. 기시 수상이 명령을 함으로써 이렇게 된 거예요. 거, 믿어져요. 그런 말?

 

▣ 1987.7.21(화) 남북통일과 교수들의 갈 길. 벨베디아.

- 한국 교수 미국 방문.

 

167-283 여러분, 기시 수상 알지요? 기시 수상을 만나지 못했지만 다 알지요? 기시하고 나하고 친구이고 후쿠다도 내 친구입니다. 내가 1974년에 제국호텔에다가 일본 조야의 최고 인사들 한 2천 명을 모아 가지고 뱅퀴트를 했어요. 그때 후쿠다는 재무부 장관이었어요. 大蔵大臣이었거든요. 그때 나한테 뱅퀴트에 올 것을 약속했는데 안 오면 곤란하거든요.

 

* 그때 하는 말이 "아시아에 의인이 나타났다. 존경하는 벗이 났다. 그 이름이 누구냐 하면 소위 문선명 선생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문제가 돼 가지고. 이제는 고개를 다 넘었습니다. 이제는 일본 풍토, 지식 세계 풍토에서 "문" 하면 왕초가 돼 있습니다.

 

그때 뱅퀴트를 할 때 기시 수상을 내세워 가지고 실행위원장을 시켜야 되겠거든요. 나는 한 번도 안 만났습니다. 나는 여기서 훈시만 하는 거예요. "너, 가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하면 "이것이 문 선생님 말씀이요. 일본은 이렇게 해야 삽니다" 그렇게 교육을 하는 거예요.  

 

* 기시 수상 딸 安倍 洋子 (사위 安倍 晋太郎, 孫 安倍晋三)은 우리 편입니다. 후쿠다 수상 딸이랑. 이번에 아베 상이 수상 해 먹으려고 그랬는데, 그거 내가 오케이해야 되는 거라구요.

 

8. 댄버리 석방 청원서.  

 

▣ 1986.12.28(일) 1986년의 회고. 미국.

149-351 지금까지 레버런 문이나 무니들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환경이 댄버리를 중심 삼고 전환되었어요. 1984년의 댄버리 사건은 한국이라든가, 일본이라든가, 그다음에 미국이라든가, 아담 국가, 해와 국가, 천사장 국가, 오늘날 세계 국가에서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공격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로 말하면 유대교와 로마, 물론 유대 나라도 있지만 유대교를 중심으로 로마가 합해 가지고 예수를 반대하던 것과 마찬가지예요. 기독교를 중심 삼은 미국이 로마와 같은 나라로서 하나되어 선생님을 댄버리에 처넣은 거예요. 미국은 유대 나라와 같은 거예요. 이래 가지고 미국 문화, 미국 정부 앞에 일본의 뜻있는 역대 수상들이, 기시 수상과 후쿠다 수상, 나카소네 수상 등 모든 수상이 레이건 행정부(Ronald Wilson Reagan 1911.2.6~2004.6.5. 제40대 대통령 1981.1.20~1989.1.20)에 압력을 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섭리적 재림시대에 있어서 하늘을 편든 나라로는 일본이 대표적인 국가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타락할 때 해와가 아담을 망쳤기 때문에 아담을 모든 어려움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주도적 역할을 해와가 해야 돼요. 그걸 일본이 했기 때문에 해와 국가의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갔다는 거예요.

 

149-354 자, 일본 식구들이 여기 미국에 와서 여권 문제나 이민국 문제로 핍박을 받으면서도 미국을 붙안고 세계를 붙안고 선생님과 같이 싸운 거예요. 이 사실은 하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담이 해와하고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어디서? 미국에서.

 

▣ 1990.6.23(토) 세계평화를 위하여. 한남동.

- 귀국 후 보고 들으신 후 말씀.

 

203-123 매국자 도당들이 모여 나라를 망쳐 놓은 이 한국 문제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기반을 닦아 나오기에 혼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아느냐 이겁니다. 정부가 한 번이라도 협조한 적 있어요? 내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잘 들어갔다고 생각했지, 이놈의 자식들. 일본 수상했던 기시는 레이건에게 세 번씩이나 특사를 보내 편지를 전했습니다. 내가 이번에 레이건을 만나면 들이대려고 해요.   

 

▣ 1990.11.11(일) 통일 방안. 본부교회.

207-232 나라가 있어도 감옥에 들어가 있는 나를 누구 한 사람 지원해 주지 않았어요. 교포들이 그렇게 많아도 한 녀석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데, 세계의 학자들, 세계의 유지들이 댄버리 형무소의 명회 시간을 메워 주었다는 사실, 이 나라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 일본의 죽은 기시 수상은 문 총재 같은 인물은 아시아에 있어서 역사적 인물이니 보호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게 몇 년이던가? 정초에 레이건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레이건을 붙들고 사정하고도 그 후로 편지를 네 번씩이나 한 것입니다. "일본정부를 대표한 나의 간곡한 소원이오. 이 사람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니 빨리 댄버리에서 해방해야 합니다" 하는 진언을 하고 있는데 이 민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