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사사카와 료이치 笹川 良一(1899.5.4.~1995.7.18)  

true2020 2019. 7. 23. 11:02

◑ 笹川 良一

- 1899(明治32년) 5.4. ~ 1995.7.18.  摂津国 三島郡 豊川村 현 箕面市 미노오시 出生

- 중의원, 재단법인 일본선박진흥회 (현, 공익재단법인 일본재단) 회장, 福岡 공업대학 이사장.

- 1968.2,22. 430 가정 합동결혼식 축사.

 

* 1899.5.4~1995.7.18 오사카

*  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 숭배, 일본 우익단체 國粹大衆黨 黨首. 1931년 결성. 본부는 大阪東區 北浜.

* 대동아 전쟁(태평양전쟁 1937.7.7.~1945.8.15.)에는 부정적이었다.

 

▶ 극동국제군사재판(동경재판) A급 전범. 

조례 A 평화에 대한 죄 -> A급, B 통례의 전쟁 범죄 -> B급, C 인도적 범죄. -> C급 

- 1945.9.11 체포 명령. 40명.

- 1945.9.21 체포 명령 2명.

- 1945.10.22 체포 명령 1명.

- 1945.11.19 체포 명령 11명.

- 1945.12.2 체포 명령 59명. 사사카와 료우이치 체포. 12월 11일 스가모 구치소에 입감. 1948.12.24 불기소 석방.

- 1945.12.6 체포 명령, 9명.

- 1946.3.16 체포 명령. 1명.

- 1946.4.7. 체포 명령 1명

- 1946.4.29 체포 명령 2명

- 1946.11.5. 체포 명령 1명.

- 그 외 4명 체포.  

 

* 7명의 사형은 현 동경 토요시마구 히가시이케부쿠로 Sugamo Prison에서 1948.12.23(아키히토 125대 천황 생일. 1933년생) 집행되었다. 

 

▶ 수감 중 일기

- 일본이 친미 반공의 길을 걸어야 한다.

- 일본 동포를 아사餓死에서 구해야 한다.

- 세계 평화를 확립해야 된다. 

- 도조 히데키, 당신은 사형이 확실하다. 이 전쟁이 자위를 위한 것이었다 하는 일본의 입장을 명확하게 하고, 개전의 책임은 천황에게 없음을 확실히 주장하라

 

* 옥중에서도 전범에 대한 열악한 대우 개선을 요구하고, 간수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 스가모 구치소에 대해서 "인생 최고의 대학"이었다, 여기는 娑婆사바(속세)의 20배, 30배 공부가 된다고 평했다.

 

*  승공연합 명예회장.

* 재단법인 일본선박진흥회 현 공익재단법인 일본재단 회장.

* 후쿠오카공업대학 이사장.

 

1. 430 가정 합동결혼식 축사.

- 구보키 회장 부부 430가정 축복 참가.

 

▣ 1968.3,3(일) 자랑스런 가정. 대전교회.

- 430가정 탕감봉 행사 후 말씀.

 

159-092 이번에 구보키 회장 부부가 축복을 받는데 사사카와 왔다 이거예요.

 

* 일본 나라에서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 선 것이 사사카와예요. 사실 또 그렇다는 거예요. 일본 나라에 있어서의 해방 직후에 전범자로 불려 가 가지고 맥아더 군사재판 법정에서 공판받아 가지고 5년형을 살면서도 그 사람은 당당히 싸웠다는 거예요.

 

그 영감이 참 일본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게 뭐냐 하면 도조 같은 수상까지도 전범자 되어 살겠다고 자기변명을 하는데 "야, 이 자식아, 틀려 먹었다" 한 거예요.

 

그 대신을 해 먹던 녀석들은 전부 다 피고 입장에 있는데 이 영감은 그래도 "일본이 영, 미하고 싸운 이것이 정의가 아니고 뭐냐? 너희들이 아시아에 있어서 이 황인족을 얼마나 압박했느냐? 우리가 일어난 것은 민족적인 봉기가 아니고 아시아 국민적인 봉기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너희들과 겨루어 가지고 한 판함으로 말미암아 아시아 황인종 인권이 올라간다" 하면서···. 사실이 그렇거든요.

 

"이런 걸 볼 때 너희들한테는 안됐을지 모르지만 아시아 인민 앞에는 우리가 공헌을 했다. 내가 일본 나라에 충성하고 너희들 대해서 원수시한 것이 무엇이 죄냐?" 했다는 거예요.

 

그러고 난 다음에 일본 나라 이 사람들이 전부 다 사사카와를 아주 뭐 천황보다도 더 높이 알게 되었다구요. 이 5년 동안에 감옥에 있으면서 비굴한 놀음을 안 했다는 거예요. 정정당당히 일본 정신을 그냥 지녀 가지고 사나이답게 싸웠기 때문에 일본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만큼 추앙의 대상으로서 지금까지 지내 온다는 거예요.

 

이래서 군국주의 사상을 중심 삼아 가지고 지금까지 나오지만 지금은 우리 사상을 중심 삼아 가지고 세계주의 사상권 내로 넘어오고 있는 거예요.

 

▣ 1969.5.18(일) 행복과 사랑. 수원교회.

- 제2차 세계순회 귀국 후 전국 지구본부 순회.

 

023-141 요번 합동결혼식 때 선생님이 그 영감을 초청했습니다. "영감님 이번에 오셔서 한번 축복을 해 주어야 되겠소"라는 초청장을 보냈지요. 이렇게 국제적인 양반들 불러다 축하를 시키니 부모들이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아들딸은 잘났지 못났겠어요?

 

그 영감 그래도 귀반으로 모셔서 축하를 시키니 기분이 풀어졌어요. 그리고 좋은 호텔에다 하룻밤을 재웠지요. 그 영감 나이가 칠십에 가깝지만 그래도 일본 제국시대에는 경시청을 움직이던 사람입니다. 옛날에 히틀러와 무솔리니처럼 그야말로 진짜 국수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국수주의에서 세계 주의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통일교회의 공로입니다. 선전이 아닙니다.

 

이 영감이 서울에 왔을 때 선생님은 영감에게 시간을 안 줘야겠다는 생각에서 시간을 딱 짜 놓고 그랜드 호텔에서 점심 때 다 모이게 했는데 그 아들도 왔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영감을 사정없이 몰아쳤습니다.

 

"네가 사사카와면 사사카와지모터보트로 돈 벌었다고 그게 뭐냐? 사사카와 영감이 그래도 일본에서 사나이다운 사나이인 줄 알았는데 이건 서푼짜리밖에 안 된다"고 들이 조져 놓았습니다.

 

일 년 동안 가만있다가 귀빈으로 모셔 와서 수고했다고 치하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배 속에다 폭탄을 퍼부었던 거지요. 세상에 그런 인사법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이 영감의 성격을 알고 있었거든요. 이 영감에게 멋진 사나이의 기질이 있어서 정상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도리어 후려갈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한 대 쥐어박았더니 이 영감이 얼마나 흥분되었겠어요? 그런데 큰소리로 "하하하" 웃는 것입니다. 그 영감 그래도 아주 틀이 잡혔어요. 사람이 됐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한 대 맞았다 이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화가 나는 것을 꾸욱 참느라 잠을 못 잤대요. 선생님은 사사카와 같은 사나이가 필요핮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감은 선생님이 돈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다가 한 대 얻어맞은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부터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몰라요. 이번에도 일본에서 오는데 그 영감이 비행장에까지 전송 나왔어요.

 

▣ 1973.7.23(월) 복귀의 목적. 중앙수련원.

- 전국 교역장 집회.

 

068-068 일본 사사카와 영감만 해도 그래요. 그가 모터보트 회사를 운영하는데 "선생님, 한국에서 모터보트 회사를 하시겠다면 내가 수십억을 대겠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됩니다"라고 했어요. 그것은 경마와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가 아무리 돈이 없어서 돈이 필요하더라도 경마와 같은 짓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고는 내가 소개는 해 준다고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영감이 날 존경하는 거라구요. 자기 모터 보트 회사를 만든 것을 자랑하려고 자기 별장에 나를 초대한 것입니다.  

 

* 그다음에 430쌍 결혼식 때 그 영감 불러다 축사를 시켰어요. "영감, 오소. 우리가 이런 잔치하는데 한번 구경 오소" 해 가지고 부른 거예요. 자기 생각에는 색다른 어머니 아버지 친척들이 와서 틀림없이 싸움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고 왔다 이거예요. 그야말로 구경하러 온다고 왔다구요.

 

자, 이거 구경하러 왔는데 싸움은 커녕 엄숙하기가 천하에···. 자기가 마음대로 목을 가눌 수도 없게끔 엄숙했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탄복해 버렸어요.

 

그다음에 손님으로 왔으니 그랜드 호텔에 먹여 놓고는 그 자리에서 들이 조진 거예요. "이놈의 영감 같으니라구. 통일교회 문 선생이 그렇게 시시하게 돈 짜박지를 얻어 가지고 배 같은 것은 사러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느냐구. 오늘 내가 까놓고 얘기하는데 영감 앞으로 우리와 관계 맺으려면 그런 생각 갖지 말라구. 내가 필요한 건 사사카와 그 배포와 사람이지 그따위 게 아니라구. 돈 몇 천억이 부러워서 당신을 만난 것이 아니라구" 하며 들이 조져 놨습니다.

 

그런데도 영감이 아주 뭐 호걸스러운 영감이라 "허허허" 웃는 거예요. 그러고는 그날 밤잠을 못 잤다는 거에요. 세상에 그런 불경이 어디 있어요? 손님을 초대해 놓고 먹여 놓고는 정면적으로 공격해 버렸으니까 밤잠을 못 잔 겁니다. 밤을 새웠다는 거예요.

 

세상에 한국에서 누구누구 무섭다고 하지만 문 선생 이상 무서운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심부름하는 사람도 잠을 못 잤지요. 이래 가지고 친해졌다구요.

 

* 천억은 도장만 찍으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영감이라구요. 세상 사람 같으면 그것을 녹여 먹겠다고 얼마나 돈을 탐내요? 내가 구보키에게 "야, 이 녀석아, 사사카와 영감한테 돈 얘기는 절대 하지 말아라"고 했어요. 지금까지도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입니다. 돈보다도 인격적으로 대한 거예요.

 

2. 사사카와 씨를 선화 무용단의 후원회 회장으로 임명했다.

 

▣ 1970.1.11(일) 세계에 봉화를 들자. 전본부교회.

028-228 선화 무용단이 잘나서 그런 줄 알아요? 어림도 없습니다. 선생님이 특별지시를 해서 사사카와 씨를 회장으로 세우고 기시 전 수상을 명예회장으로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한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고 그 계획을 전부 짰습니다. 그런데 중간 보고를 들어보니 공연 일주일 전인데도 4천 장밖에 못 팔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사카와 씨는 일본 재계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사사카와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기시 전 수상은 일본 정치계에 있어서 유일한 원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시 전 수상이 명예회장을 맡은 공연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도 역사 큰 망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망신시키려고 이러느냐고 야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사사카와 씨는 배짱이 있었습니다. "사나이가 한번 약속했으면 밀고 나가야지. 그래야 망해도 조금 망하지" 하며 계속 후원해 주었던 것입니다.  

 

3. 사사카와 씨의 집과 전본부교회.

 

▣ 1970.10.11(일) 통일의 무리. 전본부교회.

035-147 그의 집이 12층 빌딩인데 굉장히 으리으리하고 큰 집이라는 겁니다. 그가 사업을 하는데 1년에 4천억(그 당시 한국의 일 년 예산이 6000억 원.) 가까운 돈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감이 하는 말이 "나는 문 선생한테 반했습니다. 내가 한국을 찾아온 것은 대한민국의 구빈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문 선생님을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더라는 거예요. 선생님한테 반했다는 거예요. 선생님하고 틀릴 게 뭐 있어요? 같은 남자끼리 벗으면 똑같은데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자기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은 상대해 보았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배신할 사람인지 아닌지 대번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 문 선생님만은 절대 자기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관상을 보아도 자기를 마이너스되게 하거나 죽일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 1971.1.9(토) 뜻이 가야 할 길. 강릉교회.

039-056 그 영감의 빌딩에 가 보면 굉징합니다. 그 영감하고 나하고는 친분이 있습니다. 그 영감의 권유에 의해 그 빌딩에 들어가곤 했는데 한번은 그 영감을 우리 집에 오라고 초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사는 집은 우리 교회 2층입니다. 문을 열고 내 침대부터 전부 다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자기가 일인자라고 자처하는 그한테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게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무슨 말을 하는지 두고 보려고 아무 말도 않고 점심식사까지 같이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엄청나게 잘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부나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산다 하고 모든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눈치만 다르게 보이면 잡아채려고 했는데 이놈의 영감도 생각이 있는 영감이었습니다. 일본에 가서 하는 말이 "통일교회 문 선생님은 참 무섭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영감은 우리 집에서는 한풀 꺾이고 갔습니다.

 

4. 청평 수련소 구경.

 

▣ 1971.8.13(금) 기쁜 수련회. 청평 수련소.

- 제1차 전국 교회장 수련회.

- "우리의 사명과 책임" 말씀 후의 말씀.

 

046-181 요전번에 사사카와 (笹川 良一 1899.5.4.~1995.7.18. 摂津国 三島郡 출생지, 現 大阪府 茨木市, 吹田市, 高槻市, 豊中市 摂津市、箕面市、豊能町一部) 를 여기에 데리고 와서 한번 구경을 시켰더니 일본에 돌아가서 통일교회 문 선생이라는 사람이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더라나요. 남들은 교회 짓기가 일쑤인데 그렇게 땅을 사는 걸 보면 참 생각이 다르다고 칭찬을 하더라는 거예요. 사실 와 보니 참 좋거든요.

 

5. 망명하면 책임지겠다.

 

▣ 1972.8.17(목) 뜻을 사랑하는 아들이 되자. 청평.

- 제1회 전국 교역자 수양회.

 

060-221 지금 사사카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만일에 한국에 김일성이가 내려는 날에는 자기가 비상조치를 취해 가지고 문 선생을 구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요전에 통고까지 해 왔어요.

 

"만일에 선생님이 망명하는 날에는 내가 첵임지겠으니 일본에 오소" 하는 거예요. 통첩을 갖고 있다구요. 공산당을 때려죽이겠다고 선두에 섰던 문 선생이니까 공산당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다는 것을 안다구요. 그걸 보면 일본 사람이 선생님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요.

 

그런 문제까지도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민단을 중심 삼아 가지고 공산당을 방지할 준비를 해야 된다는 거에요. 만일에 공산혁명이 일어난다면 한국에 데려올 수도 없다구요. 그렇잖아요? 일본 사람들을 전부 다···.

 

이런 등등의 긴박한 문제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그런 문제까지도 생각해 가지고 우리는 예산을 지원해 작전을 추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이 가는 통일교회가 가는 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6. 기독교 통일이라는 말.

▣ 1983.4.10(일) 본부교회. 중심 가정들의 책임

126-041 그래, 내가 잘 아는 사사카와라는 일본 사람 하는 말이 '아이쿠, 문 선생님은 기독교 통일이라는 말을 빼면 벌써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이고 일본에서 내가 선전할 때에도 기독교 통일이라는 것, 욕심이 많기 때문에 틀렸다고 합니다' 이래요.

 

그 욕심은 내 욕심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욕심이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욕심이. 기독교에 풍파가 나는 것도 하나님의 욕심이 그러니 그 하나님의 욕심을 내가 연결시키려니 그런 거예요.

 

7. 제주도 호텔에서 있었던 일.

 

▣ 1987.7.14(화) 다들 어디로 갈 것이냐. 코디악 ISA HOUSE.

167-182 일본의 우익단 괴수 되는 사사카와 영감도 이놈의 자식이 언제든지 쌍소리만 하고 다녀요. 쌍소리를 밥 먹듯이 해요. 앉아 가지고. 그래서 호텔에 들어가 "이놈의 영감 얼마나 큰지 그것 좀 보자". 그래서 이제는 친하다구요. 그래 놓아야 불알 쥐고 한번 만져 보면 그렇겠지 하는 거예요. 여자들에게는 미안합니다. 그럴 때는 못 들은 척하는 거예요.

 

▣1997.11.27(목) 순결 운동과 축복 세계화. 워싱턴, D.C. 힐튼 호텔.

- 제4차 세계평화회의 후 말씀.

 

288-188 제주도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말이에요, 사사카와라고 하는 일본 의회의 괴수가 있어요, 괴수. 이 영감이 쌍소리를 얼마나 잘 하는지 앉으면 쌍소리를 하지 않으면 밥을 못 먹고 자지를 못해요.

 

그래서 그 녀석 얼마나 하는가 보자 해서 밤새껏 하라고 조근조근 얘기하니까 별의별 소리를 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한번 보자" 했다구요. 그러면서 벗겨 가지고 보는 거라구요. 힘이 나보다 못하니까 봤지, 별수 있어요? 그래 가지고 만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거리가 가까워지는 거에요.거예요. 세상에 자기 몸을 벗겨 놓고 만진 사람은 나밖에 없거든. 그러게 되니까 한국에 오면 우리 집에 먼저 오는 거예요. 그 영감이 또 팥죽을 좋아하거든. 와서는 팥죽을 쑤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가까워지는 거예요.

  

8. 최봉춘 선교사를 구해 주었다.

 

▣1989.2.16(목) 통일을 위해 전진하자. 제주 국제연수원.

- 한국 교구장.

 

188-020 최봉춘이가 오무라 수용소에 들어갈 때 그 영감한테 고마운 것은 일본 조야가 전부 다 반대하는데 그때···. 이 영감이 전범자로서 몇 년 동안 고생하고 나오고 그랬는데 자기가 일본을 위해서 싸운 것은, 미국 놈들 때려죽이면서 싸운 것은 자기는 아시아인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한다고 그때 자기들 이념이 그랬다고 ···.

 

* 그 사사카와 영감이 최봉춘이를 만나 가지고 말이에요, 밀선을 타고 전도 왔다는 사실, 밀항해서 일본을 구해 주러 왔다는 사실을 듣고 ···. 그거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그렇잖아요, 그 본의가? 그 본의가 진정 하늘의 뜻을 중심 삼고 일본을 구해 주러 왔다면 일본 국민이 환영하고 보호해야 할 텐데 이거 왜 오무라 수용소에 넣느냐 이거지요.

 

자기가 옛날에 당한 그 서러움을 생각할 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일본이 앞으로 아시아에 있어서 크게 고립될 수 있는 천벌을 받을 자리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면서 그 영감이 법무성으로부터 전부 ···. 뭐 법무장관한테 성화를 대고 이래 가지고 빼준 거예요. 자기가 신원보증을 하고 말이에요.

 

그 영감 그게 고마워서 지금도 그런다구요. 내가. 이시이라든가 구보끼 보면 찾아가서 인사하라고 그러고 있지요. 그 영감 우리 국제승공연합 회장 했다가 사회의 규탄을 받고 여론이 비등하니까 내가 시켰는데 나한테 얘기도 하지 않고 물러가 버리지 않았어요? 이놈의 영감! 세상 같으면 벌써 원수같이 취급할 텐데 ···.

 

이 영감이 일본의 우익에서는 괴수거든. 영향력이 크다구요. 그리고 어느 선박 회사를 중심 삼아 가지고 보트 레이스를 하는데 그 수익이 대단하다구요. 일본 경마장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요. 일본 돈으로 한 해에 수천억 엔을 벌 거예요. 그 사람이 일 년에 쓸 수 있는 예산량이 200억 엔이 넘는다구요.

 

* 그런데 그 영감이 섭섭했던 것이 뭐냐 하면 우리 수택리 수련소 지을 때 천만 엔인가? 천만 엔을 보냈다구요.

 

* 그런데 천만 엔을 냈는데 냈으면 보통 같으면 뭐 표창도 하고 그럴 텐데 낙성식 할 때 소식도 안 전했거든. 그러니까 하는 말이 그거예요. 하, 통일교회는 돈이 짜다고. 섭섭하기보다는 무섭다는 거지요.

 

레버런 문 자체도 그렇게 홀홀하지 않고 짜고 무섭다는 거지요. 돈 수십억 이러지 않고는 홀홀하지 않다는 거지요. 남자가 뭘 하려면 배포도 그렇게 부리고 그래야 된다구요.

 

* 고마운 것이 내가 댄버리 형무소에 들어가 있을 때 참 정성으로 편지를 써 보냈다는 거예요.

 

* 그때 사사카와 영감의 요헤이 陽平 (일본재단 회장)라고 하는 그 둘째 아들이 와서 우리 합동결혼식 보고 자기도 합동결혼식하게 해 달라고 ···. 그때 잡아서 훈련시켰다면 딱 식구 만들었을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뭘 책임진 사람들은 인연 된 사람들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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