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김영휘 선생.

true2020 2019. 7. 30. 15:04

▣ 김영휘 선생  간증 5  "앞만 보고 달려온 뜻길" 

 

* 1928.9.29(음 8.16)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용성리 8번지. 

* 복성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

* 1945년 초 서울에 있는 4년제 성남중학교. 졸업.

*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2년제 입학.

그때는 예과가 지금의 고등학교 2, 3년과 마찬가지였다. 예과를 마찬 다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학과에 입학. 

* 1953.2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 1953.4.10 공군 제1기 학도 간부 후보생으로 입대. 대구 공군본부 작전국에서 근무.

* 1955.4.20 통일교회 입교. 

* 1960.4.16 3가정 축복

* 1965.11.1 경기 지구장

* 1970.7.24 유효원 협회장님 승화.

* 1970.8.1~1977.2  제2대 한국 협회장 취임.

* 1970.12.5 제3차 세계 순회 최원복 선생, 김영휘 선생이 수행.

미국 비자가 안 나와 일본, 캐나다에 체류.

* 1973.1 벨베디어 수련소 100일 수련 강사.

* 1974.5. A탑 성전건축섭리. 엄덕문 선생 설계.

제1호 헌당식 1974.6.10 충남교구 신탄진교회 

 

* 1975.6.7 여의도 광장 구국세계대회 대회장을 맡고 120만 명 동원. 

참아버님 "이제는 내가 한국에 대해 책임을 다했다" 

참아버님께서는 사람을 시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려고 하셨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나가셨었다. 그런데 결국 만나지 못하고 그냥 오게 되었는데,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참아버님을 만났어야 했던 것이다.  

* 1977.11~1981.8.31 제4대 한국 협회장 취임.

* 1981.9.1 구라파 책임자.

* 1986.5.1 제6대 한국 협회장 취임.

* 1996.3 영국 국가 메시아.  

 

나의 아버지는 1897년 음력 9월생이신데 1915년에 첫 결혼을 하여 나의 형님 되는 첫아들을 1916년에 낳으셨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형님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위급한 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다. 그리하여 1927년에 나의 어머니와 재혼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12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양력 2월 눈이 오던 날 아침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어머니 나이 29살이셨다. 

 

6남매를 남겨 두고 가셨는데 내 아래로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넷이 있었다. 그런데 남동생과 여동생 하나는 어릴 때 영계로 먼저 갔다.  

 

아버지께서는 새엄마를 얻어 세 번째 결혼을 하셨는데 그 새어머니가 나중에 나를 통일교회로 인도한 김순화 어머님이시다. 김순화 어머니는 남동생 셋을 낳으셨다.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 경제학과를 졸업하셨는데 나에게는 언제나 "공과 공부를 해라. 그래야 나라가 잘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 1955년 4월 휴가를 받아 서울 집에 갔더니 김순화 어머니께서 새로운 교회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지금의 때는 말세이고 재림주가 와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렇다면 한번 가 봐야겠다 생각하고 어머니과 함께 興仁洞 교회에 가게 되었다.

 

그 날이 4월 20일이었는데 수요일 밤 예배에 참석을 하였다. 그날 예배는 참아버님께서 말씀을 하셨고 유효원 협회장님은 의자에 앉아 계셨다.

 

설교는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내용으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설교를 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 그 뒤로 나는 유효원 협회장으로부터 원리 강의를 들었다.

 

* 나는 그 무렵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 꿈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꿈에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있었는데 황소는 위엄스럽게 가만히 서 있는데 암소는 내게로 다가와 나의 머리와 온몸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양복을 입고 있는 나를 혀로 핥았던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 나의 어머니 김순화 씨는 이화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2년간 일본여자대학교에서 석사 과정 공부를 했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영생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 분이셨다.

 

부친과 결혼한 뒤 남한으로 내려와서는 정부의 보건사회부 부녀 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 이소담 선생의 전도로 통일교회를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가 제일 먼저 통일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다음으로 나의 누이동생 김진경 (72 가정. 주체 김봉철), 김정란(72 가정, 주체 나임렬) 두 명이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다. 그리고 내가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다.

 

*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들은 통일교회에 다녔지만 부친과 남동생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부친께서는 우리가 통일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 어머니와 여동생 두 명이 교회에 나오고 집안일을 잘 돌보지 못하게 되니까 부친께서는 남은 남자아이 셋을 돌봐야 했다. 그러니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께서 심하게 반대를 하셨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에게 이혼하라고 권했다. 이혼을 하고 나면 반대를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순화 어머니는 이혼을 하게 되었다.

 

* 서울 본부교회에 오니까 축복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최원복 선생이 나에게 "대화랑 하면 아버님이 기뻐하실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되는 일이라 생각을 깊이 할 사이도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참아버님께서 "대화랑 하겠느냐?"고 물으시길래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약혼 축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가 음력 2월 말경이었던 것 같다. 참부모님의 약혼식보다 하루 이틀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참부모님의 약혼식이 음력 3월 1일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약혼에 관해서도 같은 날 발표되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를 세 명 세워야 한다는 말은 당시 식구들 사이에 공공연히 나 있던 말이었다. 그 믿음의 자녀들이 약혼을 한 기반 위에서 참아버님께서 성혼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믿음의 세 자녀에 김원필 선생과 유효원 협회장 그리고 내가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때 김원필 선생 댁은 이미 아기를 출산한 가운데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고 유효원 협회장님도 참아버님의 허락 아래 약혼이 이미 돼 있었던 상태였다. 

 

우리 가정만 축복식이 있기 바로 직전에 결정이 되었다. 참아버님께서는 김원필 선생 가정을 아담형 가정, 유효원 협회장님 가정을 노아형 가정, 우리 가정을 야곱형 가정이라고 말씀하셨다. 

 

원래는 참부모님의 성혼식을 음력 3월 1일에 하실 계획이었는데 며칠간 연기되어 1960년 음력 3월 16일에 성혼식을 하셨다.

 

그때 참아버님께서는 성혼식에 참석할 수 있는 참석권을 나누어 주셨는데 참아버님의 도장이 찍힌 표였다.

 

그 표를 나누어 주시면서 "앞으로 이 표만 있으면 지옥 갈 사람도 천국 간다"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만큼 그 표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셨고 참부모님의 성혼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셨다. 

 

참부모님께서는 성혼 예식을 하시는데 한복을 입고 한국식으로 한 번 하시고 그다음 양복을 입고 현대식으로 예식을 또 한 번 하셨다. 

 

* 우리의 축복식은 참부모님의 성혼식 닷새 뒤인 1960년 음력 3월 21일에 있었다. 참부모님의 성혼식과 같은 장소인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있었는데 그때 賀客으로는 우리 교회 식구들 하객뿐이었고 교회 식구가 아닌 친지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주례는 참부모님께서 서 주셨는데 주례 말씀은 없으셨고 축도만 해 주셨던 것 같다. 그리고 축사를 박봉애 선생이 하셨다.    

 

* 우리는 가정생활할 방이 없었기 때문에 김순화 어머니가 책임 맡아 있던 서울 제2교회의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신방을 꾸몄다.

 

그런데 참아버님께서는 너무 멀다며 창파동 전본부교회 바로 앞 이정옥 선생 집에서 생활하라고 하셨다. 그것도 이정옥 선생에게 안방을 내주라고 하시어 우리가 그 안방을 사용하게 하셨다. 그 집은 전본부교회와 붙어 있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그렇지만 마루도 있고 건넌방도 있었다. 

 

우리는 첫날밤부터 이정옥 선생 댁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이정옥 선생은 우리 때문에 건넌방에서 생활을 하였다. 

 

1961년에 축복받은 33가정 때는 축복 후 40일 성별 기간과 3일 행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 1971.12.5 참아버님 세계 순회 최원복 선생, 김영휘 선생이 수행.

 

참부모님께서는 세계 순회를 떠나실 때 먼저 미국으로 가셔서 미국에서 섭리적인 일들을 하신 다음 다른 나라로 순회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래서 미국 비자를 신청했다. 그런데 도무지 미국 비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국에서 비자받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던 끝에 우선 일본으로 가기로 하였다. 일본에 체류하면서 미국 비자를 얻어 보기로 했다.

 

1970년 12월 5일 일본으로 가기 위해 참부모님 양위분과 최원복 선생 그리고 나는 공항으로 갔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 수속을 하던 중에 외무부의 실수로  출국을 허락하는 외무부 여권 과장의 개인 인가 도장이 찍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예약했던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나는 참부모님께 "오늘 출국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셔서 쉬고 계시면 저희들이 다시 준비를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참아버님께서는 "어떻게든지 출국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시었다. 출국을 하기 위해서는 외무부 여권과장의 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그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외무부는 쉬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아버님께서 도장을 받아 오라고 하시니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여권과장 집으로 전화를 했다. 마침 여권 과장이 집에 있었고, 우리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어디로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외무부 사무실로 나오겠다고 하였다.

 

당시 협회 섭외부장이던 유종영 씨와 나는 택시를 타고 외무부로 가서 여권과장을 만나 여권에 도장을 받아 왔다.

 

만약 그날 여권과장이 집에 없었더라면 어쩔 뻔하였는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리하여 그날 도장받은 여권을 가지고 그날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가 떠나던 날 밤에 유신헌법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해외 출국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때서야 참아버님께서 왜 그토록 그날 출국해야 한다며 다그치셨는가를 알 것 같았다.   

 

* 우리 일행은 일본에 가서 다시 주일 미국 대사관에 미국 비자 신청을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미국 비자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미국 비자를 한국에서 받아야지 왜 일본에 와서 받으려고 하느냐"며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교섭을 해도 안 되었다.

 

우리는 다른 방도가 없을까 궁리를 하던 끝에 일본에서 한국 문화연구원을 하고 있던 최서면이라고 하는 나의 친구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나의 중학교 동창인 최서면 원장은 아주 발이 넓은 사람인데 주일 캐나다 대사관의 정무관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일행이 캐나다 비자를 받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도움으로 우리는 캐나다 비자를 받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일본에서 캐나다로 갈 때부터는 일본의 이시이 미츠하루 사장도 합류를 하게 되었다.

 

캐나다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는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하여 갔는데, LA에서는 비행기를 바꾸어 타야 했고 그 과정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어 있었다.

 

LA 교회 식구들이 꽃다발을 들고 공항에 마중나와 있었다. 그래서 참부모님과 우리는 LA 교회로 갔다. 참아버님께서는 교회에서 식구들에게 말씀도 해 주셨다.

 

다음날 우리는 캐나다 토론토로 갔다. 우리는 토론토에서도 교회에서 묵으며 미국 비자를 신청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도 도무지 미국 비자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캐나다 미국 대사관에 문의를 했다.

 

우리에게 비자를 주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하루는 미국 대사관에서 우리를 오라고 하였다. 우리가 미국 대사관으로 갔더니 총영사가 비자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로 나와 설명을 하였다.

 

미국 비자를 줄 수 없는 이유는 참아버님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일행의 미국 비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참부모님께서는 미국에 있는 우리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화로 이런 사실을 알리면서 식구들이 미국의 국회의원들을 만나 참아버님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알리게 했다.

 

한국에서 승공 운동을 한 실적들을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알리면서 교섭을 해 미국 국무성의 아버님의 관한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 1971년 12월 19일 알리게이니 항공의 작은 비행기를 타고 우리 일행은 워싱턴으로 가게 되었다. 그날 저녁 워싱턴에 도착했는데 리틀엔젤스가 워싱턴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공연을 관람한 뒤 워싱턴 교회로 갔다.

 

* 참아버님의 미국 주요 7대 도시 강연이 뉴욕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때 나는 뉴욕에서 3일, 볼티모어에서 3일, 워싱턴에서 1일 등 첫 3개 도시에서 7일간 통역을 했다. 그 뒤는 박보희 씨가 오게 되어서 통역은 박보희 씨가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