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노정

평양노정

true2020 2019. 4. 11. 14:50

김백문 목사와 이스라엘 수도원 중심한 섭리

 

해방 직후 정주 곽산지서 수감 1주일 (1945.10)

 

* 선생님은 40년 동안 감옥에 들락날락하기를 6번이나 했다. 감옥에서 5년 이상 살았다.

욕을 먹은 것도 천하에, 역사 이래에 나 이상 욕먹은 사람이 없다. 좁쌀섬을 갖다 놓고 계산할 수 없으리만큼 욕을 먹었다. 피눈물을, 피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알아야 된다.

 

* 이용도 목사의 3대의 계대를 이은 사람이 김백문이다. 이 사람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 집단은 세례 요한의 집단이다. 그는 재림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세력을 준비하라고 하늘로부터 들었다. 당시 김백문은 이승만 박사와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

그를 세례 요한에 세우고 뜻을 이룰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 그 집단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고 선생님이 찾아갔다. 그때가 해방 직후 1945년 10월이었다. 그때는 상도동 교회에세 교인들을 지도했다. 선생님이 그 집단에 가서 6개월 이상 동안 종살이를 하는 것이다.


뜻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상속받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들이지 못한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여러분이 상상하지도 못할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했던 것이다. 선생님이 기도하던 마루에는 눈물이 얼룩져 마를 날이 없었다.


만약 선생님이 그 영적 집단으로부터 한 남자와 그리고 그 남자와 일체된 세 여자를 복귀할 수 있었더라면 그것에 의해서 해와 복귀의 모든 조건들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구약 할머니, 신약 어머니, 성약 딸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여자는 예수의 자매를 뜻한다.


김백문씨가 선생님을 축복하기 전에 거기에서 선생님에게 주님을 증거했던 세 여인이 있었다.

 

* 6개월 후에 김씨는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그는 3월 부활절을 맞이해서 자기를 따르는 모든 식구들 앞에서 흰옷을 입고 선생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솔로몬 왕의 영광이 선생님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했다.


선생님에게 그렇게 축복을 해 주고 나니까 그 집단에서 신령한 은혜의 역사를 하는 부인들이나 식구들 전부가 문 선생님을 따르라고 하는 계시를 받는 것이다.


선생님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변명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김백문은 솔로몬 왕과 같은 사명을 받은 분이라고 축복을 했는데 그는 그 진정한 뜻을 몰랐다.


그러나 선생님은 자진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했어야 했다. 그것이 그의 5%책임분담이었다. 

 

* 만일 김씨 집단이 선생님과 하나되었더라면, 바로 그것이 완성 단계의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또 다른 기독교 집단을 찾아야 했고 그 집단과 함께 기독교 목사들을 연결시켜야 했다. 그 후에 정부와 연결해야 했다.

 

* 그들 3여인은 선생님을 증거했다. 그 후 그들은 선생님과 하나되어야 했으나 선생님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북한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선생님은 그러한 세 여인과 한 남자를 복귀하기 위해 모든 조건들을 통과해야 했다. 김백문이 받건 아니 받건 선생님으로서는 충고하여 청산하지 않고는 심정적인 재출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18장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을 다 찢어버린 것이다. 그 후 선생님은 책임을 다 한 입장에서 평양으로 떠났다. 이 날이 없이는 평양에 갈 수 없었다.

 

1946.5,27   "38선을 넘어라"


* 해방 직후 쌀이 없었다. 그래서 황해도 백천에 쌀을 사 놓고 트럭에 싣고 오려고 가다가

차 안에서 "삼팔선을 넘어라!" 하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5월 27일 명령을 받고 출발해서 6월 6일 도착한 것이다. 우리 성진이를 그때 4월 2일에 나서 내가 5월 27일에 떠났으니 한 달이 조금 더 된다. 


그때 38선을 넘어가기 어려우니 하늘이 알려 주는 것이다. 무지개가 앞을 인도해 준다. 120리 길을 직접 인도해 주는 것이다. 

 

* "가정을 위한 길을 갈 것이냐 공적인 하나님을 위한 길을 갈 것이냐?" 그런 고비가 있는 것이다. 둘 다 가질 수 없다. 이자택일이다. 안락한 집을 버리고 죽음길을 찾아간 것이다. 

 

* 내려갈 때는 최하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북으로 다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 배낭을 짊어지고 "사랑하는 처자를 남겨 두고 저는 가야합니다. 안 갈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던 때를 선생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선생님이 북쪽으로 간 것은 사탄의 본거지로 간 것이다. 공산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간 것이다. 한국 기독교를 중심 삼은 뜻의 기반이 사탄편에 돌아갔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하여 사탄의 소굴인 이북으로 간 것이다.

 

* 하나님은 가인을 대하지 못한 것이 한이요 가인을 좋아하지 못한 것이 한이요 가인의 제물을 받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성진을 버리고 삼팔선을 넘어 이북으로 간 것이다. 그것은 내적으로 자식을 버리고 삼팔선 이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 것이다.

 

* 선생님이 가정을 가지게 된 것은 교회를 연결시키고 나라를 연결시켜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라와 연결되지 못했고 교회와도 연결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 편지가 오면 문전에서 전부 다 돌려보내거나 찢어버렸다. 내게 소식이 오는 것을 원수같이 여겼던 것이다. 


성진이 어머니도 7년 노정을 걸어야 된다. 7년 동안 애기를 품고 그 애기를 이 땅 위의 어떤 왕자보다도 고이 키워야 된다는 것이다.  

 

1946.6.6 ~ 1948.2.22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 개척 전도


ㄱ.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 평양.  


* 당시 평양에는 해방을 맞이하여 새로이 교회를 재건하면서 역사적인 사명을 하기 위하여 새로이 출발하던 때였다. 그때 선생님은 서문과 가까운 慶昌里에서 전도하며 통일교회의 출발의 터전을 세우던 때였다.

 

* 평양에서 장대제 교회라는 큰 교회, 옛날에 길선주 목사가 거기에서 부흥회하고, 거기서 기도하고 은혜받은 것이다. 그런 교회에 천오백 명 가까이 모이는데 거기서 똑똑한 사람 15명 빼놓으니까 왕창하더라구요. 그 놀음을 해서 내가 욕을 많이 먹었다. 

 

ㄴ. 어린이 사랑.


* 애들을 만나면 참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준다. 아이들을 데리고 재미있게 놀았다. 

 

* 세 살 난 아이와 마주치면 경배한 것이다. 어린 아이를 하늘같이 모셨다.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서부터 했던 것이다. 


어린 아이를 사랑하라. 하늘같이 높이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존경어를 갖추어 가지고 찬양할 수 있어야 된다.  

 

ㄷ. 식구들을 위한 사랑과 그리움.


* 선생님이 식구를 위해 기도을 하면 틀림없이 오게 되어 있다. 선생님은 식구가 그리워서 하루종일 문 밖을 내다보면서 기다린 적이 있었다. 

 

ㄹ. 영계의 인도로 찾아온 식구들.


* 내가 나기 전부터 선생님을 보고 나기 전부터 선생님을 모시고 이 길을 준비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직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인데 자기가 스물네 살 때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미래가 지금이요 지금이 영원이다는 것이다. 그런 심정의 세계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 내가 평양에 있을 때 영계에서 전부 다 가르쳐 줘서 통일교회 들어왔다. 선생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지게 되면 훌훌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한다. 왜? 참사랑의 분위기에 젖어서 그런 것이다.


옥세현  장대현교회

지승도

김인주 시아버지 기독교 장로

김원필

정달옥 아버지 목사, 오빠 목사.


그렇게 반대하던 원수의 딸을 내가 제일사랑하는 사람과 축복을 해 준 그것이 원수세계를 묶기 위한 하나의 시작이었다. 원필이보다 8년 위다.

 

평양 대동보안서 수난과 복중교 1946.8.11~1946.11.21


1971.12.27(월) 워싱턴 D.C.

1946.8.11 북한 공산당에 의해 종교를 지칭해 시기했다는 죄목으로 대동 보안서에 투옥되었다. 1946.6 공산당은 북한 전역에 있어서 새로운 종교단체에 대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유사단체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 그 집단의 간부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매우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허 부인에게 만일 그녀가 계시를 받을 때, 그녀의 배가 경련을 일으킨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녀는 풀려날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김일성 시대였고, 그는 종교를 박해했으며, 모든 종교를 말살키고자 했다. 허 부인의 남동생이 심한 고문으로 죽었다. 허 부인도 심하게 고문을 받았고, 그녀의 옷들이 거의 다 찢어졌다. 그 당시에 선생님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고문을 당했다. 선생님은 10월 31일에 석방되었다.


그때 선생님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거의 죽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선생님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다시 살아난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1971.12.27(월) 워싱턴D.C.

하나님은 준비한 그 여성을 책임져야 되겠기에 선생님을 감옥에 들어가게 했다. 감옥에 들어가니 그 부인과 같이 상대가 되어 교육하고 전체를 책임지고 있던 황원신이라는 사람이 그 방에 있었다.


1946.8.11 밤11시쯤에 내가 들어갔다. 그날밤 그 사람은 선생님에 관해서 한 계시를 받았다. 선생님이 그 방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선생님은 변소 옆에서 잠을 잤다.


그 방 안에는 많은 죄수들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감방장(허 부인 집단의 지도자)이, 그 방의 규칙은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이 가장 나쁜 자리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 오신 분은 특별한 분이니 자기 옆에 자게 해달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그 사람 옆에 앉았을 때 그는 선생님에게 절을 했다. 선생님이 "무엇 때문에 절을 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지난밤에 한 계시를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계시에서 "선생님에게 절을 하는 허 부인을 보았고 그녀가 이제 만나고 싶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고 했는데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 선생님이 그 사람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 선생님은 "당신이 경험해 온 모든 것을 말하라"고 했다. 그는 그의 집단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공산주의자들이 만일 그들이 하늘로부터 계시받았던 것을 부인한다면 그들을 석방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만일 당신이 공산주의자 앞에서 당신이 체험해 온 모든 사실을 부인하기만 한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또한 "만일 허 부인이 거짓말을 해서 그녀가 체험했던 것을 모두 부인한다면 한 젊은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는 것을 허 부인에게 전하라고 했다. 선생님은 그 말을 허 부인에게 전달하도록 그에게 부탁했다. 


점심 시간에 점심이 배급되었을 때 그 젊은이는 선생님이 말했던 모든 것을 허 부인에게 얘기했다. 허 부인은 춘향이가 감옥에서 그녀의 남편을 만났던 것같이 그녀가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아무것도 못 보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말을 따를 수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부인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 그 사람이 석방된 뒤에 허 부인의 남편이 선생님의 방으로 왔다.


선생님은 그녀의 남편에게 선생님이 그 젊은이에게 말했던 것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자기 아내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선생님 자신이 한 통의 편지를 썼다. 그것은 9월 18일 아침이었다. 선생님은 식사 때에 밥을 배달하는 사람한테 그 편지를 허 부인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가 그 편지를 읽고 나서 찢어 버리려고 하였으나 그때 그녀는 공산당 감시원한테 들켰다. 그것은 그 종이를 갖다 준 그 사람이 간수에게 알렸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이 쪽지를 쓴 사람은 하늘의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당신은 기도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 봐야 한다. 만일 당신이 계시받았던 모든 것을 否認한다면 당신은 釋放될 것이다"라고 썼다


.그 쪽지는 간수에게 발각되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고문을 당했다. 그것은 1947년 9월.18일 오후 2시의 일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남한에 있는 미군의 스파이로 고발되었고 선생님은 소련 조사관에 의해서 신문을 받았으나 선생님은 무죄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선생님은 10월 31일 오후에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모두 학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