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노정

평양노정. ▣ 1968.2.8 (목) 전본부교회.

true2020 2019. 4. 11. 13:38

* 백남주 - 이용도 - 김백문

* 김성도 - 허호빈 - 박을룡.

 

  

1968.2.8 (목) 평양 노정. 전본부교회.  

019-262 철산의 새주파(김성도)와 허호빈의 복중교는 예수님의 뜻을 알았다. 그래서 복중교에서는 예수께서 33세까지 고난 받은 것을 탕감하기 위하여 재림주님이 오시면 매일 새 옷을 3번 갈아입을 수 있는 많은 양의 옷을 준비했다. 그때가 일제 말기였다. 그들은 일본이 망할 그 기일, 시간까지도 알았다.

 

이용도 목사가 여자(유명화)를 主라고 한 후 이단으로 몰렸다. 이용도의 뜻을 김백문이 이었다.

 

선생님은 1945년 10월 김백문을 만났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했다.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은 백문 씨보다 문 선생을 따르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원리를 몰라 선생님을 따르지 않았다. 

 

김백문은 선생님을 만난 후 6개월 만에 계시를 받고 선생님은 솔로몬 왕과 같은 사명을 받은 분이라고 축복을 했는데 그는 그 진정한 뜻을 몰랐다. 그리고 선생님께 일언반구도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선생님이 자진해서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봉 후 21개월 만에···.  

 

 그 뒤 성진과 그의 어머니를 남겨 놓고 서울을 떠나 1946년 6월 6일 이북의 평양에 도착했다.

 

당시 김백문은 이승만과 가까운 입장에 있었기에 그를 세례 요한의 입장에 세우고 뜻을 이룰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북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부인이라고 하는 인물을 찾았다.

 

이번에는 김백문이 축복한 터전 위에 하나님의 부인이라 하는 여인에게도 축복을 받아야 했다. 그 부인이 박을룡 할머니였다. 그 남편은 한씨 성을 가진 지방의 유력자였다.

 

선생님은 당시 박 씨 할머니를 어머니 이상으로 모시는 입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10남매가 있었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동생의 입장에 섰다.

 

이때 박씨 할머니는 선생님을 처음에는 종으로 증거하다가 그다음에는 양자, 예수님의 동생으로 증거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아버지 즉 하나님의 실체이니 자기 남편이라고 증거했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주관성을 바로잡고 박 씨 할머니에게 섬기라고 명령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할머니에게 경배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갑자기 위치가 바꿔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 그 할머니는 40일간을 영육 아우른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선생님을 하나님의 역적이라고까지 말하였다.

 

박씨 할머니가 선생님을 반대하므로 대신 다른 사람을 세우게 되었다. 해와는 재창조할 수 있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함으로 인해 평양에서 1948년 2월 22일 입감되어 2년 8개월간 있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사명을 못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옥중에는 라헬의 입장인 김00씨가 같이 입옥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만났다.

 

김00는 라헬의 입장, 박 씨 할머니는 레아의 입장이며 또한 나00라는 부인이 있었다. 이 세 부인이 선생님을 협조해야 했다.


선생님이 옥중에서 출감한 후는 실체로 부활한 입장과 같으므로 원리를 그대로 발표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국가로부터 핍박을 당한 것같이 선생님도 국가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다.  

 

김00 선생님과 같이 옥에 들어갔었으나 "재림주가 옥에 갇힐 수 있는가" 하는 시험에 걸려 떨어졌다.

 

선생님이 영안으로 볼 때 그녀의 영인체가 육신이 가니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눈물 흘리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딸 누이 어머니 이 3대의 심정을 복귀하기 위해서 할머니로부터 20대 연령의 여자에 이르기까지 다 복귀해야 한다.

 

옥세현 할머니는 이북에서 연결짓는 사명을 했다. 원래는 옥세현 할머니 가정이 중심이 되어야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득삼 씨가 그 사명을 이어받았다.

 

선생님은 3시대의 여성을 복귀하는 기준을 세워야 되므로 심정의 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야 했다. 외적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박씨 할머니는 영계의 역사를 실체로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전부 재림하여 역사했다. 천사장의 실체 역사와 같은 역사도 하였다.

 

원산의 백남주 씨는 스웨덴 보르그를 연구하고 그의 책을 번역한 사람으로서 주님이 한국으로 오신다는 계시를 받고 주님의 역사를 하였고 그 고난을 탕감하기 위해 철산의 김성도 씨를 맨발로 걸어가 만났고 김성도 집단을 성주교聖主敎라는 이름으로 총독부에 등록해 주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세례 요한 사명자였다. 그 뒤로 그 뜻이 이용도, 김백문에게로 옮겨졌다.

 

1월 18일은 선생님의 생애에 잊지 못할 가슴 아픈 날이다. 김백문이 받건 받지 아니하건 선생님으로서는 충고하여 청산하지 않고는 심정적인 재출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18장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을 다 찢어 버린 날이었다. 이것을 찢은 후 선생님은 책임을 다한 입장에서 평양으로 떠났다. 이 날이 없이는 평양에 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