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노정

해방 전후의 섭리-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true2020 2019. 4. 9. 15:15

* 이스라엘 수도원의 김백문 金百文 (1917~1990)

* 1945.10 서울, 이스라엘 수도원 보조 인도사로 6개월간 봉사

 

 

▣ 1971.12.27(월) 워싱턴, D.C.

052-149 그리고 선생님은 해방 후 3개월이 되던 1945년 11월에 김 씨(김백문)를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큰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 당시에 그는 개신교 수도원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하나의 수도원(이스라엘)을 소유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재림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세력을 준비하라"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하늘로부터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집단을 찾아가서 그를 만났고 그와 함께 6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거기에 김 씨를 따르던 많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곳에 가기 전에는 김씨를 따르라는 계시를 그들은 받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곳에 간 후로 그들은 김 씨가 아니라 선생님을 따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선생님 원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선생님은 김씨로부터 모든 것을 상속받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6개월 후에 김씨는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고, 그는 선생님의 머리에 자기의 손을 얹고 전 세계의 솔로몬 왕의 영광이 선생님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선생님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가장 천한 일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손수 앉은자리를 청소하는 등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선생님은 끝자리에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김 씨를 만난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당시에 매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만일 김씨가 하늘로부터 "선생님에게 그러한 축복을 해 주라"고 들었다면 그는 선생님에게 모든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질문들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5%의 책임분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에 따르던 독실한 추종자들이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도 그것을 알았고, 그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선생님은 그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그래서 선생님은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을 상속받았습니다.

 

 

 

1968.2.8(목) 전본부교회. 평양 노정.

019-262 선생님은 1945년 10월 김백문을 만났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했다.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은 백문 씨보다 문 선생을 따르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원리를 몰라 선생님을 따르지 않았다. 

 

김백문은 선생님을 만난 후 6개월 만에 계시를 받고 "선생님은 솔로몬 왕과 같은 사명을 받은 분"이라고 축복을 했는데 그는 그 진정한 뜻을 몰랐다. 그리고 선생님께 일언반구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선생님이 자진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 그 뒤 선생님은 성진과 그의 어머니를 남겨 놓고 서울을 떠나 1946년 6월 6일 이북의 평양에 도착했다. 

 

* 당시 김백문은 이승만 박사와 가까운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세례 요한 입장에 세우고 뜻을 이룰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 이번에는 김백문이 축복한 터전 위에 "하나님의 부인"이라 하는 여인에게도 축복을 받아야 했다. 그 부인은 박(을룡) 할머니였다.

그 남편은 한씨 성을 가진 지방의 유력자였다. 선생님은 당시 박 씨 할머니를 어머니 이상으로 모시는 입장에 있었다.

 

▣ 1969.6.3(화) 청평. 2차 청평수련회.

여성을 중심한 섭리는 김성도, 허호빈, 여호와의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박 노파로 이어졌고, 남성을 중심 삼은 섭리는 이용도, 백남주, 김백문으로 이어졌다.

 

▣ 1963.1.3(목) 예수의 참다운 탄생과 축하. 전본부교회.

- 유효원 전 협회장 기록.  

 

이용도, 백남주, 김백문 3대가 선생님을 축복해야 했다.

 

1971.1.1(금) 전본부교회. 참하나님의 날, 지구장 회의 때.   

그때에 나는 김백문 씨와 같이 출발하게 되었던 거예요. 김백문 씨와 나는 가인과 아벨,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김백문이란 이름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뭐 선생님이 김백문의 제자니 뭐니 하는데 선생님이 그의 제자가 될 게 뭐예요.

 

그 사람은 기독교의 신앙을 하고 있었는데 기독론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위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근본을 잘 모르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신령한 면에서는 당시 기성교회의 최고 신앙 기준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출발하려던 것이 다 틀어져 나가 버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김백문 씨의 수제자들이 전부 다 영계를 통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도하는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영계에서 가르쳐 주기는 전부 다 "문 선생을 따라가라"고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김백문 씨를 중심을 이스라엘 수도원이 생기게 되었는데 거기에 모여든 교인들이 신령한 은혜만 받으면 전부 다 "문 선생을 따라가라"고 계시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랬지만 선생님은 거기에 들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기반에 들어가 공작을 해서 그  기반을 무너뜨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자연적으로 굴복시켜야 되는 겁니다. 工作을 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屈服시켜야 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눈물도 많이 흘리면서 模範的인 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말없이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식구들이 선생님을 따라가려고 결심을 하게 되니까, 여기서부터 문제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평양에 가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그곳을 떠난 후 선생님은 기성교회로부터 그 사람들이 반대받던 것을 몽땅 인계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쓰고 있던 누명을 몽땅 인계받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들과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누명을 쓰지 않고 나왔을 것입니다. 기성교회의 반대를 받지 않고, 정부의 반대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관계를 맺은 연고로 반대를 받게 되어 할 수 없이 이북에 가서 재차 복귀 노정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개인 복귀의 기준을 찾아 세우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남한에서는 사탄이 앞장서서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남한에서 교인 몇 명을 모아 가지고, 부산에서부터 전도활동을 시작하여 대구와 김천을 거쳐 서울에 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자리를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 협회장을 만나 새로운 집에서 협회 창립을 했습니다. 통일교회 역사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정부와 기성교회의 반대를 받으니까 할 수 없이 민족의 낙오자들을 규합해 가지고, 터를 닦아 나온 것입니다.

 

 

1990.2.15(목) 향토학교 간사. 한남동. 

해방 직전에 지하운동을 하던 기독교 교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해방 직후에 주님이 온다는 소문이 났었어요. 그래서 내가 지하교회의 신령한 사람들은 안 만난 사람이 없이 다 만나 봤어요.

 

그런데 해방 직후에 군정이 나타나면서 신사 참배한 사람들…, 친일파들이 한국 내정을 잘 알잖아요. 군정이 수립되어서 편리하니까 그런 친일파들을 잡아서 쓰고, 그다음에 미국에 갔다 온 패들을 썼어요. 전부 다 외형적이잖아요?

 

그때 신령한 구약적 에덴 복귀파인 박동기 파와 신약적 에덴 복귀파인 김백문 파가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나를 김백문의 제자로 알고 있어요. 김백문의 제자가 될 게 뭐예요?

 

내가 60일 동안에 거기에 가서 그 단체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그들이 내 말을 안 들었다구요. 전부 다 욕심 때문이에요. 세례 요한 같은 집단을 다 준비했던 거라구요.   

 

 

▣ 1999.8.17(화) 여호와의 전반 전능의 날 선포의 날. 코디악

- 오전 7시, 제3회 7.8절 경배식.  

 

303-170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원수 앞에 넘겨주면서 복을 빌어 주고 "내 대신, 나 이상 사랑해 다오"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나님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선생님도 성진이 어머니를 그런 자리에 세우려고 했습니다. "어떤 원수라도 만나라고 할 수 있고 소개해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남자가 휘휘 거리더라도 눈감아 주고, 기쁠 수 있는 해와의 날을 못 가진 것을 우리 가정에서 풀고 넘어가야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래, 성진이 어머니가 김백문 수도원에 갔을 때 내가 김백문을 끌어다가 품으라고 품에 안겨 준 사람이라구요.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나한테 다른 마음이 생겨 가지고 거기에 쫓아가면 하나님의 심정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래요. 어머니까지도 전부 다 결혼시켜 주는 거예요. 아버지가 있더라도 전부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미련이 없어요. 형제와 같은 놀음을 단행해야 사탄 앞에 걸리지를 않아요. 알겠어요.

 

- 1946.6.2 "이북으로 가라"는 하늘의 명령

 

1969.6.9(일) 전본부교회.

그런데 소문을 들으니 평양에 이상한 할머니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집단이니만큼 그러한 사실은 서로가 속속들이 연락을 하거든. 소식이 오는데 무슨 소식이냐 하면 그 이상한 할머니가 "내가 여호와의 부인이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 할머니를 미쳤다고 하지요. 기성교회에서도 정신이 나갔다고, 뭐 뭐 어떻게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돌았다고 평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그러한 부인이 나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소식을 듣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늘이여, 복귀의 사명을 중심 삼고 천륜의 법도의 터를 이 삼천리 반도에 마련하였으니 이러한 부인들이 통하여 하나님께서 닦아 나온 것을 해결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제가 평양에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1946년 6월 2일에 선생님은 이제 나는 나로서의 가야 할 길을 작정했기에 마지막 인사 겸 해서 당시 김백문 씨가 수도원을 만들어 특별집회를 열고 있던 문산으로 떠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인간의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났다가 떠나갈 때는 간다는 인사라도 하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해방 직후였기 때문에 쌀을 사기가 굉장히 힘들었는데 선생님이 그때 쌀을 한 트럭쯤 사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낭을 짊어지고 트럭으로 쌀까지 가지고 올 계산을 하고 출발했는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이북으로 가라"는 하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북으로 간 것입니다. 쌀이고 뭐고 다 날려버렸지요.

 

그때 우리 성진이 어머니와 성진이를 남겨놓고 간 것입니다. 이거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진이 어머니와 성진이가 고생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결국 기성교회가 받들지 못함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건  불가피한 것입니다. 재탕감역사를 해야 됩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품고서는 복귀 역사를  못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