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노정

일본 유학- 1943.10.3. 귀국 예정의 곤린마루崑崙丸가 沈沒과 어머니의 사랑.

true2020 2019. 4. 8. 09:31

* 1943년 10월 5일 오전 1시 15분께 오키노시마 沖ノ島 동북쪽 약 10리 해상에서 관부연락선 곤린마루崑崙丸가 沈沒.

* 1943년 10월 중순 귀국.

 

▣ 1986.10.1(수) 공의의 법정을 향하여. 본부교회.

147-283 여러분 마음에게 물어 보라고요. 내가 효자인가.

 

* 효자, 해 봤어요? 나는 효도 못 해 봤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불효자인지 용서받을 수 없는 불효자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요. 세상 부모 중에 우리 어머니가 날 사랑하던 것만큼 사랑하는 부모를 내가 보지 못 했어요. 진정으로 나를 사랑했습니다.

 

* 내가 동경에 가서 학교 졸업하고 그때는 학병에 나가고 그러기 때문에 반년을 단축해서 졸업했습니다. 졸업하고 돌아올 때 며칠 몇 시 배로 돌아간다고 전보를 쳤습니다. 그런데 동경에 가서 차를 타려고 하다가 뒤로 돌아섰습니다. 그런 뭐가 있다구요.있다고요. 선생님은 남이 안 가진 안테나가 있다고요.

 

* 발이 가려다가 가만히 보니까 안 되겠다 이거예요. 벼랑에, 깊은 곳의 벼랑에 떨어지겠다 이거예요. "야, 이거 큰일이 생기겠구나" 알거든요. 그래서 전보를 쳐 놓고 돌아서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곤린마루라고 하는데 그 배가 어뢰를 맞아 침몰당해 버렸습니다.

 

* 전보를 받았는데 온다는 배가 침몰된 것이 천하에 다 알려졌는데 동경에 연락해도 연락이 안 돼요. 내가 그 집에서 인사하고 나와 벌써 딴 하숙집에 들어 있으니 전화를 하고 전보를 해도 통할 게 뭐예요. 그러니 난동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난장판이 벌어진 거예요. 틀림없이 죽었다고 말이에요. 지서 가서 물어보고 경찰서에 가서 물어봐도 "그 이후 전보가 안 왔으니까 그리고 그 배가 깨졌으니까 틀림없이 죽었소" 했다는 거예요.

 

* 이름 있는 집안의 맏며느리인데 말이에요, 한국 풍습으로 말하면 부인들이 속곳 바람으로 나서게 되면 그거 뭐예요? 미치광이예요. 미치광이. 미치광이이면 그거 쌍년이라구요. 치마 두를 것도 모르고 속곳 바람으로 그저 부산까지 달려간 거예요. 그때가 9월달쯤 될 텐데 달려가는데 버선도 신지 않고 고무신 신고 가다가 신발이 다 벗겨진 줄도 모르고, 아카시아 가시가 발바닥에 박혔는데 아픈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는 거예요.

 

* 그러다 보니 내가 연락할 때까지 3주일이 지났습니다. 나야 뭐, 우리 동무 녀석한테 연락하라고 했더니 이놈의 자식이 어디 가다가 연락하지도 않고 그래서···. 오랫동안 그러고 다니다 보니 어떻게 됐느냐 하면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 박힌 것이 굳어져 버렸어요. 그 아카시아 가시를 나를 만나 가지고야 뺏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날 사랑했어요? 그렇게 사랑한 어머니께 내가 선물이라는 것을 하나 해 드리지 못했어요.

 

▣ 1987.11.15(일) 승리자가 될 것이냐, 패자가 될 것이냐. 본부교회.

- 목회자, 국제승공연합 지부장,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간부 집회.

 

170-206 왜정 때 관부연락선 곤린마루가 깨질 때 내가 학교를 졸업해 가지고 나올 때였어요. 배를 타기 전에 내가 전보를 쳤다구요. 그런데 집에서는 도착 시간이 됐는데도 안 돌아오니 죽었다고 해 가지고 어머니가 정주에서 부산까지 치맛바람이면 또 몰라요. 속곳바람에 맨발로 내려왔다는 거예요.

 

그때는 졸업을 9월에 했으니 춥지를 않을 때입니다. 신발을 버린 것도 모르고 맨발로 뛰어서 차를 타고 왔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부산까지 가려면 하루는 걸릴 거라구요. 그렇게 미쳐서 달리다 보니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가 박혔는데도 아픈 줄 모르고 뛰었다는 거예요. 열흘 후엔가 침이 박혔다고 해서 빼 보니 아카시아 가시더라고요.  

 

그걸 생각하면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냐 이거예요. 그러한 어머니에 대해서 버선 한 켤레, 양말 한 켤레 안 사다 줬어요. 손수건 한 장 안 사다 줬습니다. 불효자지요!

 

▣1971.6.24(목) 그리운 고향. 전본부교회.

045-135 더욱이 어머니께 미안한 것은···. 여러분 중에도 아는 사람은 알 거예요. 왜정 때 관부 연락선 곤린마루가 깨져서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그 배를 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배를 타고 고향에 간다고 전부를 쳐 놓고 막상 떠나려고 동경역에 나가니까 하늘이 가는 길을 막더라고요.그때 친구 세 사람이 전송을 해 주려고 나왔었는데 그 길로 돌아서 가지고···.

 

그 시간에 차를 타고 배를 탔으면 배하고 같이 깨졌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 가지고 친구네 집에 가게 됐던 것입니다. 고향에 간다고 전보했는데 어떻게 돼서 못 간다고 전보를 해야 할 텐데···.

 

"자, 이렇게 되었으니 며칠 동안 우리와 같이 놀자"고 하는 친구들에게 끌려가서 3일 동안 지내고 보니 전보를 못 쳤습니다. 그때까지도 배가 깨졌다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사흘 후에야 그것을 알게 된 거라고요. 그래 가지고 집에 전보를 하긴 했는데 그 과정에 고향에선 큰 난리가 벌어진 거예요. 들리는 소식엔 배가 깨졌지 고향에 온다는 전보는 왔으니 틀림없이 죽었다 이거예요.

 

여자가 치마를 안 입고 속바지 차림으로 다닌다면 그건 자기 정신이 아니지요. 어머니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9월이니까 춥지도 않은데 신발이니 뭣이니 생각할 여지가 있었겠어요?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 부모의 사랑이 그렇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고향 마을에서 정주읍까지는 20리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20리 길을 왕발(맨발)로 뛰고 부산까지 갔다 왔는데 신이고 옷이고 무엇이고 생각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우리 아들 죽었다고 맨발로 뛰어나와 가지고 부산 수산 경찰서까지 가서 조사를 하니 명단에는 없고, 알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틀림없이 아들이 죽었다고 이래 가지고 그렇게 골똘한 마음을 가지다 보니 왕발로 뛸 때 그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가 박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것이 박혀 가지고 곪아 터질 때까지도 몰랐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보름 후인가 하여튼 열흘이 지난 후에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너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선생님이 대하여 문중에서는 기대가 컸습니다. 저 사나이가 공부를 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그래도 무엇인가 될 것이라고 말이에요. 또 내가 그 면 일대에서는 문제의 사나이었습니다. 잘 되면 충신이 되고 못 되면 역적이 된다고···.

 

성격이 대단했고 그런 소문을 낳고 있던 사나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생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그런 어머니 앞에 효도를 해야 되곘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전혀 해 보지 못했습니다.

 

045-137 아들이 학교를 졸업해 가지고 그렇게 집에 왔는데 또 가는 곳은 감옥이라는 거예요. 그저 끌려갔다 하면 감옥으로 끌려가니 어머니가 감옥으로 찾아와 가지고 눈물을 죽죽 흘리면서 뭐 용이 될 줄 알았는데 번데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별의별 소문을 다 듣게 되었어요.

 

내가 억울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대해서 기분 나빠했다는 거라고요. 자식을 대해서 눈물 흘리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사연이 많겠지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