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10.3(일) 전본부교회. 주관성 복귀
- 잊지 못할 사람들.
049-073 통일교회 교인들이 선생님의 신세를 지나요, 선생님이 여러분의 신세를 지나요? 어때요? 안팎으로 신세를 지우고 살지 내가 신세를 지지 않아요. 나는 신세를 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신세 지고는 못 사는 거라구요.
보라구요. 내가 16, 17살 때구만. 그때 어떤 아주머니한테···. 나는 철이 들 때부터는 점심을 안 먹었어요. 나라도 없는 주제에 밥을 세 끼씩이나 다 찾아 먹을 자격이 있느냐면서 말이에요.
밥이 그리운 생활을 참 많이 했습니다. 밥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민족을 그리워하는 길을 갔다구요. "밥보다 민족을 더 사랑해야지. 나라를 더 사랑해야지" 하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 있으면서 말이에요, 점심을 안 먹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했어요. 주머니에 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구요. 돈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서빙고 앞에 모래사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곳을 다 파버려서 모래사장이 없으니까 섭섭하더군만요. 여러분들은 안 그래요? 빌딩 지은 것은 좋지만 모래사장이 없어진 것이 난 지극히 섭섭해요. 추억이 많은 곳인데···.
여러분, 명수대 (흑석동)에 가면 명수대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는 선생님과 몇몇 동지들이 지은 교회입니다. 한번은 그 모래사장에서 서빙고 교회와 명수대 교회가 합동예배를 보았는데, 그때···.
거기에 자갈을 채취하는 배가 있어 가지고 자갈을 채취해다가 쌓아 놓은 무더기가 있었다구요. 그때 나는 점심을 안 먹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점심때가 되면 자리를 피해 돌무더기 뒤에 있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참···.
여러분, 청춘시대에는 그런 것이 참 필요하다구요. 별의별 생각을 다 할 수 있는 거라구요. 젊은 청년으로서 기백도 있는 것이요, 자기 나름의 프라이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입장에 서 가지고, 남들은 다 점심을 먹는데 자갈 무더기 뒤에 혼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면서 자갈을 던지면서···.
그게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 일이 어젯날 같아요. 생생히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혼자 기도하고···. 그거 심각한 자리라구요. 그런 환경일수록 심각한 거예요.
그때 어떤 아주머니, 송 씨라는 부인이에요. 빵 두 개와 우유 한 봉지를 갖다 주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건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아요. 그것을 내가 갚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1971.11.8(월) 중앙수련원. 3차 세계 순회 노정 떠나기 전에.
- 전도자의 사명과 하늘의 심정.
050-307 주고 나서도, 하고 나서도 잊어버리는 거라구요. "내가 아무 때, 너를 얼마 도와주었지" 하며 수첩에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수첩에 기록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어느 때, 누구누구에게 얼마 도와주고 누구에게 얼마 도와주었다고 써 놓고 그걸 연상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부자의 심정의 인연을 맺고자 하는 주체적 입장에 섰으면 "아무 때 아무개에게 얼마 주었으니 그걸 찾아야 되겠다. 너에게 이렇게 주었으니 너는 나에게 이렇게 해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려고 안 합니다. 다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린다구요. 될 수 있는 대로 전부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에게 잘 해 주고 그걸 기억해 두나요? 너 시집갈 때에 너를 위해서 부모인 내가 공을 들이고 뭘 해 준 값이 몇천 몇백 몇십만 원이라고 기억해 두나요? 부모는 해 주고 나서 잊어버리는 겁니다. 잊어버리는 거라구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지 않는 거예요.
그대신 자기가 신세를 진 것은 절대 안 잊어버리는 거예요. 자기가 해 준 것은 자꾸 잊어버리고 반대로 신세를 진 것은 안 잊어버린다구요.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다 좋아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나빠하겠어요?
선생님은 중학교 때에 신세를 진 송 씨 부인이라고 있습니다. 앞으로 송 씨 들에게 그 신세를 갚으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중학교 시절에 점심을 안 먹었어요. 돈이 없어서 안 먹은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는 뭐 있어 먹고도 양냥(만족스럽지 못하여 짜증을 내며 종알거리다)이라구요. 그저 먹고도 또 먹고 싶은 한창때입니다. 그런 때에 점심을 안 먹었으니 점심 때 밥 그리워하는 마음이 복잡하더라구요. 친구들은 도시락을 가지고 와 먹고 있는데 저 먼데 혼자 앉아 가지고 밥도 안 먹고 명상하는 그 자리는 심각한 자리라구요.
옛날 두 교회가 한강가에서 합동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모래 사장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빙고 앞이었어요. 점심때 모두 점심을 먹는데 그 속에서 혼자 앉아 가지고 버틸 수 있나요. 그래서 혼자 쓱 뒤로 빠져나와 돌무더기 같은 데에 가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가 지금도 그립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배고프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구요. 돈이 없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요. 점심을 먹지 않고 그 점심 값으로 반드시 남을 도와주는 거라구요.
또 학생 때는 전차를 타고 다니지 않았어요. 절대 안 타고 다녔다구요. 그때 전차 비가 5전씩이었어요. 그래도 반드시 걸어 다녔습니다. 그래 가지고 왕복 10전을 모아 길가에서 적선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때는 거지들을 쭉 관찰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노량진 고개하고 화신 백화점 옆 골목길에는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갈 때 한번 쓱 보고 돌아올 때 다시 한 번 봐 가지고 그중에서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을 가르는 것입니다.
거지들 가운데도 새파란 젊은 녀석들에게는 안 주는 거예요. 불쌍한 사람에게 주는 거예요. 봉사라든가 나이 많은 사람을 골라 가지고 적선하는 거예요. 積善도 그렇게 해 주었다구요.
선생님은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남에게 신세 진 것은 영영 안 잊는 겁니다. 내가 점심을 안 먹고 자갈 쌓아 둔 돌무더기 뒤에 있었는데 그때 송 씨 부인이 아이스케이크 두 개와 빵 두 개를 가져왔어요. 그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한 개에 일 전짜리예요. 그거 모두 합해야 4전인데 그 빵과 아이스케이크를 갖다 준 것이 영영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때 그 자리가 얼마나 심각한 자리였더냐 이거예요. 이렇게 신세를 진 것은 영영 잊혀지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습관을 들여놓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려울 때에 도움을 받은 것은 영영 잊지 않는다구요. 알겠어요? 아무 때 어떻고··· 하며 나를 위해서 수고하고 나를 위해서 베풀어 준 그 은덕은 영영 잊어버리지 않는다구요.
그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인간을 위해서 그것을 갚으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갚아줄 수 없는 거라구요.
은덕을 갚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을 언제 다시 만날 것이냐? 그 사람을 찾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세를 진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그 마음을 가지고 "아무 때에 내개 은덕을 받은 것을 이 사람한테 주겠사오니, 대신 갚는 조건으로 하나님이여, 받아 주시고 대신 갚아줄 수 있는 자리로 메워 주시면 좋겠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인을 만나서 주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겠어요?
▣ 1989.2.12(일) 본부교회. 고향.
187-307 사람이 어떻게 될 줄 알아요?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내가 지금 서울에 와 있으면서 잊을 수 없는 부인이 한 사람 있어요. 송 씨 부인이라고 못 사는 부인이에요.
그때 셋방에서 딸 하나 데리고 사는데, 뭐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딸 하나하고 사는데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해 가지고, 겨우 밥을 먹고사는 거예요. 그런 송 씨 아줌마가 있었어요.
이 아줌마가 말이에요,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내가 학생 시절에 하숙하고 있으니까, 하숙집에서도 아침 주고 점심 주고 저녁 주면 그만 아니에요? 학생들은 그것 먹고는 배가 고프다구요. 그걸 알고 말이에요, 자기가 뭘 팔다 남으면 갖다 먹여 주려고 그래요.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자기 동생이 있었대요. 나와 비슷한 동생이 있었는데 그 동생이 생각난다는 거예요. 저분이 여기 와 있는 것이 남 같지 않다는 거예요. 거, 아마 영적으로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지요. 이래 가지고 뭐가 생기면 자기 입에 들어가야 할 텐데 이 손이 이리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늘 그 아주머니가···.
내가 학생 때는 늘 점심을 안 먹었습니다. 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수양하는 자들은 일생을 통해서 평상시에 수양해 놔야 된다 해 가지고···.
그때 학교 다니면서 주일학교 학생들 지도하고 다 그랬거든요. 흑석동 교회에서도, 서빙고 교회에서도 그랬어요. 그때는 한강이 얼어 가지고, 밤에 추우니까 강이 얼어 가지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뺑! 지지지지···. " 그런다구요. 그러면 혼자 있으면 무섭다구요. 그런 한강을 건너 다니면서 서빙고에 있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내가 주일학교 학생들을 잘 가르쳤어요.
* 그때는 나도 총각 시대입니다. "나는 어떤 색시를 얻을까, 하늘이 원하는 형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꿈이 부풀었던 시대예요. 그래 가지고 점심도 안 먹고 주일학교 학생들, 두 곳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말이에요, 점심때 선생님이 없어졌거든요. 자기들하고 같이 안 먹거든요. 점심을 안 먹으니까. 그래 혼자 앉아 가지고···. 옛날 모래사장. 거기에는 자갈 치는 배가 있었다구요. 여기 서울 사람은 알 겁니다.
* 거기에 자갈들, 모래판이 있기 때문에 바람이 불게 되면 아주 고약하거든요. 그러니까 자갈 돌더미 사이의 모래판에 가 가지고 전부 다 모여 앉아 가지고 예배를 보고 다 그랬어요. 주일날이면.
그런데 점심때에 선생님이 없어졌다 이거예요. 나는 남이 점심 먹는데 저기 가 가지고 기도하는 거예요. 외로운 생활이 필요해요. 인간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누나도 보고 동정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동정하고 그 마음을 두고 온전히 기억할 수 있는 생활을 해 가는 것이 도의 생활에 필요해요. 하나님도 보게 될 때 그렇지 않아요? 학생들이 점심 먹을 때, 점심 안 먹으면 배 고픈데···.
거, 왜 그러느냐? 밥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점심 먹을 수 있는 값을 쳐 가지고는 전부 다 불쌍한 사람 도와줘요. 그런 놀음 하느라고···.
자, 그걸 아는 이 송 씨 부인이 말이에요, 몇 번 그래도 번번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 벤또를, 그래 어디 간다 하게 되면 내 벤또를 만들어 가지고 오는 모양이라. 그것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외로울 때 방문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끼리 좋아하는 것은 다 흘러가요. 그러나 어렵고 못 견디는 자리에 찾아주고 위로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 그것을 거기에서 배웠어요. 그 송 씨 아주머니는 얼굴도 잘 못생겼어요. 궁둥이가, 허리가 꾸부정하고 이 뽈때기가 고생하게 생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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