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서전74
그때 서울에는 시내를 관통하는 전차가 다녔습니다. 당시 전차값이 5전이었는데, 그마저 아까워 시내까지 늘 걸어서 나가곤 했습니다.
* 걸음이 워낙 빨라서 흑석동에서 한강을 건너, 종로의 화신 백화점까지 45분이면 도착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를 절반에 주파했으니, 얼마나 빠른 걸음인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전차 값은 아껴 두었다가, 나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내세우기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돈이지만, 천만금을 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었고, 그 돈이 복의 씨가 되길 빌며 주었습니다.
* 한번은 학교 가는 길에 숨이 넘어질 것처럼 아픈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찌나 불쌍한지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사람을 업고, 5리나 떨어진 병원으로 내달렸습니다.
때마침 주머니에 들어있던 학비를 탈탈 털어 병원비로 내고나니,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학비를 못 내, 학교에서 督促을 받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 돈을 한 푼, 두 푼을 모아주었습니다. 그때의 친구들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 도움을 주고 받는 것 역시 하늘이 맺어주는 인연입니다. …그러니 문득 내 앞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하늘이 이 사람을 도우라고 날 보내셨구나" 하고, 마음을 다해 섬기게 됩니다.
하늘이 열을 도우라고 하는데, 다섯만 도와서는 안 됩니다. 열을 주라고 하면, 백을 주는 것이 옳습니다. 남을 도울 때는 아낌없이 지갑이 돈까지도 몽땅 털어서 도와야 합니다.
* 나는 한강 다리 밑 빈민굴에 찾아가 거지들의 머리를 깍아주며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눈물이 많습니다. 가슴에 맺힌 것이 많아, 내가 말 한마디만 건네도,대성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벅벅 긁으면 허옇게 자국이 생길 정도로 덕지덕지 때가 낀 손으로 직접 구걸해 온 밥을 나에게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더럽다 생각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같이 먹었습니다.
* 서울에서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주로 흑석동에 있던 명수대 예수교회와 한강 건너편 백사장에 있던 서빙고 오순절 교회에 다녔습니다. … 교회에선 주일학교 선생님 노릇을 했습니다.
* 명수대 뒷쪽에는 서달산이 있습니다. 나는 달마산 바윗돌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춥거나 덥거나 상관 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한번 기도에 들어가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울며,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놓고, 몇 시간씩 기도에만 전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暗號와 같아서 그것을 풀려면, 더욱 기도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들은 내가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뭔가가 느껴졌는지 나를 어려워했습니다.
* 이기완 아주머니, 그 동생 이기봉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훈훈해집니다. …자취집 근처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던 송씨 아주머니도 그 시절 큰 은인입니다.
*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일단 신세를 지면 평생 잊지 못합니다. 나이 90이 된 지금도, 언제 누가 무엇을 해 주었고, 또 언제 누가 어떻게 해 주었는지 줄줄이 욀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은덕을 베풀어 준 사람들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은덕을 입으면 반드시 더 크게 갚아야 합니다. 은혜를 베푼 이를 직접 만날 수 없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못 만나더라도, 그 고마움을 다른 사람에게 갚겠다는 懇切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 1972.5.10(수) 개척자의 길. 중앙수련원. 제3차 세계순화 귀국 후.
056-038 사람을 골라서 전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못난 사람을 대해서 세계에 없는 동정을 함으로 말미암아 심정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뭐냐 하면, 노량진역에 가면 생생합니다. 내가 흑석동에서 살았는데, 상도동 넘어가는 곳에 소나무가 우거지고, 그 너머에는 화초를 가꾸는 일본식 집이 있었어요. 그리로 쑥 돌아가면 논이 있고, 그 너머에 동네가 있었는데, 거기에 개척전도 다니던 집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처음 본 사람인데 그 길에서 병이 나 있었어요. 그때가 3월말쯤이었습니다. 새학기로 개학이 되어 학기금을 가져왔을 때였는데, 가만 보니까 그 사람은 아들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안에 자기 딸네 집이 있다고 해서, 학기금을 몽땅 털어 여비와 병난 것을 치료할 것까지 다 해주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선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구요. 내가 그때 발이 떨어지지 않아요. 돌아서지를 못 하겠더라구요.
그런 사람을 하늘이 만나게 해 주었으면, 하늘이 동정해 주라는 이상 동정해 준다고 해서, 절대 손해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늘이 열을 도와 주라고 하는데, 백을 도와 주게 된다면, 아흔은 내가 하늘 앞에 공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열을 도와 주기를 바라는데, 다섯을 도와 주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하늘이 열만큼 도와 주기를 바라게 될 때는, 열 이상 도와 줘야지, 열 이하를 도와 줬다가는 여러분의 은혜길이 막히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것이 원칙입니다. 공식이 그렇게 도어 있어요.
내가 지갑에 있는 돈 전부 다 털었다구요. 책 살 돈, 하숙비 전부 다 털어서 안겨 보냈어요. 거기서 한 3킬로미터 정도 업고 가던 일이 엊그제 같이 생각나요.
* 세상에서도 주인이 아무개 집으로 심부름꾼을 보냈는데, 그 집에서 후대하게 될 때, 그 애기면 애기, 소사면 소사,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개 집에 갔더니 이렇게 이렇게 해 주었습니다." 할 때, 그 후대해 보낸 것이 주인이 생각하던 몇십 배 되게 될 때는 "아, 그 양반 복 받을 양반이군" 한다는 거예요. 복 받을 사람이 복을 취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찾아 온 사람에게 박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원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미래의 운명길이 짧아지는 거라구요.
그런데 보게 되면 부락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할머니가 찾아와서 "여기 교회장 있소?" 할 때, 바라보면서 "없어요. 없어" 하면 벌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장 어디 갔어요. 왜 그래요, 할머니? 나이 많은 할머니는 필요 없어요", 이래 보라구요.
하나님이 볼 때에 "그놈의 자식, 너는 어디서 나왔어?" 이렇게 걸린다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나이 많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봉양해야 효자입니다. 그렇지요?
못산다고 천대하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 합니다. 그 동네에서 못사는 사람 천대해 보라는 거예요. 나는 여러분을 천대하지 않아요. 동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사는 패가 통일교회 패예요. 이 제일 못사는 통일교회 패를 내가 동정하기 때문에, 복받을 수 있는 인연도 더 길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했지요? 그건 반드시 그런 거라구요. 죽을 때 한을 품고 원망하는 그 원망을 받는 사람은 오래 못 가는 겁니다. 그래서 공산당은 오래 못 간다는 것입니다. 절대 오래 못 갑니다.
▣ 1972.8.17(목) 뜻을 사랑하는 아들이 되자. 청평.
- 제1회 전국 교역자 수양회.
060-216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러분은 모르지만 옛날에는 상도동에서 흑성동 중앙대학교로 넘어가는 산마루가 있었다구요.
* 고개를 넘어가게 되면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꽃을 재배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거기에 가면 논두렁이 있는데 그 논두렁에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천안 사람인데 그 논두렁에 누워 신음하면서 앓고 있었어요. 거기를 넘어가다 그를 떡 만났는데 야단났더라구요.
그래 알고 보니, 지금 어디 자기 친척을 찾아오던 길인데, 주소를 알아 가지고 왔는데 잘못 알아 가지고 와서 찾다가 길에서 병이나 쓰러졌다는 거예요.
그 사람을 업고 거기서부터 노량진까지 가던 일이 엊그제 일같이 생각이 나요. 그것이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 일이었다구요.
바로 그 때가 신학기 3월말께인데 그 사람에게 차표 끊어 주고, 내 학자금 전부 다 털어 가지고 줘 보낸 거예요. 학자금이 하나도 안 남았었다구요. 책도 사야 하고, 하숙비도 내야 하는데 전부 다 털어 줘 버렸어요.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조상이 선한 사람이라구요.
자, 그렇다고 해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구요. 내가 남이 하는 것은 다 한다구요. 신문 배달도 할 수 있고, 구루마도 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지내는데 난데없이 그 몇 배의 돈이 생겨난 거예요. 앍겠어요?
그 사람의 친척이 나를 찾아왔다구요. 난데없이 몇 배의 돈을 주더라구요. 3일 이내에 다 청산하고 가더라 이거예요. 그런 일이 너저분하다구요. 알겠어요? 참 많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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