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4.12. 京城商高實務學校 입학 ~ 1941.3.8. 졸업.
▣ 1969.2.2(일) 나의 뜻과 신념. 전본부교회.
- 제2차 세계순회노정을 떠나시기 앞서
022-120 흑석동의 고갯길은 선생님이 많이 걸어 다닌 길입니다. 선생님이 학교 다닐 때는 전차를 안 타고 다녔습니다. 전차를 타고도 꽤 먼 곳이었지만 걸어갔다가 걸어왔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흑석동 고개를 넘어갈 때 보면 길가에서 積善(동냥질에 응하다)을 바라며 행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었었는데 전차를 타지 않고 남겨 두었던 그 돈을 주곤 했었습니다.
한 번은 그들을 붙들고 한없이 울어도 봤습니다. "부모가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하고 "형제가 있느냐?"라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하는 그들 선생님이 그의 부모 형제를 대신해서 위로해 주지 못하는 것을 놓고···.
여러분 중에 교회에 나올 때, 어떤 사람은 중앙청 쪽에서부터 혹은 종로나 동대문 쪽에서부터 남대문을 거쳐 걸어나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선생님이 소년 시절에 오뉴월 삼복 지경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 다녔던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또 전차나 버스 혹은 택시를 타고 편히 오더라도 지난날 선생님이 걸어 다녔던 기준을 생각하고 선생님이 이 나라와 이 민족의 한을 풀어 주고,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께 안길 수 있는 그날을 애타게 기다린 것과 같은 마음을 품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누구한테도 얘기 안 했습니다. 말을 안 해도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선생님이 학창 시절에 기도를 할 때는 목이 메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왜 그렇게 기도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20세를 전후한 청년이 목이 메어서 기도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저 청년은 왜 저렇게 기도할까?" 하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거기에는 남 모르는 내적 심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022-122 선생님이 어느 곳에 가든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동정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하듯이 가는 곳곳마다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명절날 같은 때에 밤을 새워 가면서 준비한 그 상을 혹은 남편을 위해서 준비한 그 상을 선생님 방에 갖다 주지 않고서는 안방에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냥 안방에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왜 그런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낙네들의 정성 들인 그 음식까지도 선생님을 먹이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천 번 만 번 이 몸이 으스러지고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온 역사 과정에서 하나님은 선생님이 어떠한 자리에 가 있든지 함께해 주셨고, 선생님을 위해서 그렇게도 수고를 하셨다는 것은 선생님 자신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 1993.1.29(금) 성약시대의 발족과 신 세계 창조. 세계선교본부.
- 세계 지도자 회의, 통일신학 대학원 UTS 졸업생.
244-025 내가 지난날에 대한 얘기 하나 해 줄게요. 서울에 가면 흑석동에서부터 서울역까지 가는데 전차로는 얼마 걸리지 않는데 걸어가게 되면 한 시간 정도 걸려요. 이런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때 전차 요금이 5전입니다. 5전을 남기기 위해서 내가 걸어 다니면서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다 동냥해 준 것이 지금 추억에 남아요.
그때, 그 자리의 나무가 어떤 나무였는지 다 기억합니다. 지금 그대로 있을까 하고 찾아봤더니, 다 잘리어지고 한 구루만을 발견했어요. 한 나무만. 그 한 나무를 발견했을 때, 친구들 중에서도 가까운 친구 이상의 심정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그루만 남은 걸 만났을 때 친구를 만나 붙안고 싶은 심정이 거기에 살아 있는 것을 느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정성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가 죽지 않은 거예요. 수십 년의 역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5전이 있는데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고 옷도 적셔 가면서 왜 저래?" 하고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고 별의별 소리를 다 했다구요. 그렇게 지내던 사람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교주가 되었습니다.
▣ 1987.5.1(금) 남북통일의 기수가 되자. 한남동.
- 한국 지도자.
163-299 학생 시절에는 노량진에서부터 서울역까지 걸어 다녔어요. 10전이면 전차를 탔는데도 말이에요. "갈 때는 반드시 땀을 흘리고 가야 해. 학생들 가운데 편안히 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며 가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땀을 흘리며 가야 돼. 그 10전은 만 원보다 비싼 거야. 내 청춘의 정열을 판 그 값과 마찬가지야. 여기에는 3천만 민중의 심정적인 모든 정기가 달려야 돼. 하나님은 아시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여러분과 같은 때는 극장 앞을 안 지나다녔어요. 요사스러운 그런 곳에는 안 갔다는 거예요. 내가 통일교회의 모든 탕감 노정을 다 거치고 전부 다 문을 열어 놓았으니 그렇지, 어림도 없어요. 그런 길을 거쳐 나온 사나이라구요. 알겠어요?
▣ 1983.5.1(일) 복귀 섭리의 회고.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127-030 내가 학생 시대 때 흑석동서부터 서울역까지 걸어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여름에 그때 전차비가 10전이었어요. 친구들은 전부 다 어디를 가더라도 전차를 타고 다녔지만 난 걸어 다녔습니다."내 갈 길은 달라, 너는 이 길을 가서는 안 돼" 한 거예요.
역전에 가게 되면 적선을 구하는 그들 앞에 쌍수로 돈을 주면서 "내가 지금 주는 것이 적지만 이 돈이 천만 배로 불어 거지 같은 이 민족이 해방의 한날을 맞을 수 있게끔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던 것이 생각난다구요.
▣ 1989.1.1(일) 한국 통일. 본부교회. 참하나님의 날 0시 예배.
184-246 내가 흑석동에 있을 때 시내에 들어오려면 전차 값이 5전이었어요. 5전 주면 전차 타고 시내 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시내까지 걸어갔어요. 화신까지 45분이면 갔어요. 빠르다구요. 빨리 걷는 사람이지요. 보통 사람은 한 시간 반 걸립니다.
여름날 학생복을 입고 땀을 흘리면서 걸어 다닌 거예요. 그 돈을 가지고 뭘 했느냐? 불쌍한 사람에게 준 거예요. "천만금 주고 싶고 여러분에게 복지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지금 민족을 대신해서 주노니 이것을 받아 가지고 부디 복의 씨가 되시오" 한 거예요.
▣ 1992.2.14(금) 통일의 역군. 국제연수원.
- 세계평화여성연합 서울시 지도자 특별교육.
227-287 어머니 아버지가 돈을 보내 주면 불쌍한 사람에게 전부 다 주고, 서울에 와서는 걸어 다녔습니다. 그때 전차비가 5전이었습니다. 화신이나 노량진 건너갈 때는 반드시 적선해 주고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민의 한을 품고 "아버지, 길거리에서 거지 생활을 하는 이 백성에게 내가 지금 주는 돈은 얼마 안 되지만 당신의 마음 가운데 민족 해방과 더불어 이 땅 위에 부가 찾아오고 만민이 추모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눈물 흘리던 생활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친구들은 전차를 타고 간다구요. 내가 그들보다 15분 늦지만 빨리 가는 것입니다. 화신까지 35분, 40분 이내에 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 길가에 있던 나무를 붙들고 하소연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옛날 청년시대에 붙들고 기도하던 나무가 하나도 없더라구요. 한강철교만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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