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노정

선생님의 가족 - 문윤국 작은 할아버지. 음력 1877.1.30. ~ 1958.1.2.

true2020 2019. 3. 11. 17:18

◑ 작은할아버지 증조부 문윤국 목사를 중심한 가정적 준비.

 

* 1877. 음 1.30. ~ 1958. 음 1.2.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치셨다.

* 이승만 박사하고 친구였다.

* 육당 최남선(1890.4.26- 1957.10.10)하고 친구였다.

* 이승훈 씨가 오산학교를 설립할 때 배후에서 같이 했다. 

* 3.1운동 당시 이북 5도의 대표였다. 33인에 문윤국 목사를 대신해서 교회 장로였던 이명룡 씨가 들어갔다.  

* 3.1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였다. 일헌에 逮捕되어 2년의 獄苦生活을 하셨다.

* 노태우 대통령 1990.12.26.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 25, 26세의 젊은이로서 이 나라의 고위층의 사람과 손을 잡고 출발하려 했다.

* 자유당을 편성한 5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나였다.

- 이승만 박사 직속 부하 申性模(1891.10.20 경남 의령 ~ 1960.5.29) 국방장관을 중심 삼아 가지고 전반적인 기반을 갖고 출발하려 했다. 

- 만일에 3사람에서부터 12사람까지만 결속됐더라면 그때 반드시 민주 세계의 주도 국가인 미국이 이 나라에 연결돼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다. 

- 한국의 대통령 될 사람은 아벨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을 모시는 아벨적인 입장에서 신사 참배한 목사들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하교회와 재건교회가 하나되어 아벨권에 서 가지고 가인권인 기성교회와 하나되어야만 나라를 수습할 수 있는 것이다.


1. 6.10만세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작은할아버지는 일본 경찰로부터 갑종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고 피신해 다녔다.

2. 그때 돈으로 7만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는데 그 돈을 전부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3. 이 박사가 헬리콥터를 세 번씩이나 보내 가지고 데리고 가려 했었다.

4. 한학자

5. 평양 신학교 11회 졸업, 목사

6. 영어도 능통.

7. 1919.3.1 독립운동

 

▣ 1971.1.1(금) 통일기반 확보를 위하여. 전본부교회.

- 참하나님의 날 지구장 회의 때 말씀.

 

038-057 예수님은 종족적 메시아의 기반을 닦아 가지고 일시에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에 연결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인 기반만을 이루어 놓았던 것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이남에 와 있던 때인 해방 직후는 예수님이 완성권을 넘어서고자 했던 때와 같은 시대였습니다.

 

그때의 기성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는 나라도 없었습니다. 교회가 나라를 대신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내적으로 이기붕 씨가 이승만 박사를 업고 정치적 역할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나도 거기에 중요한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알았지만 작은할아버지가 이 박사하고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 그땐 몰랐습니다.

 

평안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문 아무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작은할아버지이셨습니다. 이 박사라든가 독립운동을 하던 지도자들과 함께 역사적 시련을 지고 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알아보니까 우리 작은할아버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셨더라구요.

 

내가  8살 땐가에 6.10만세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작은할아버지는 일본 경찰로부터 갑종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고 피신해 다녔습니다. 강원도, 경상도 등의 산악지대로 피신해 다녔습니다. 

 

항상 피신해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 오래 못 살았던 것입니다. 보따리 싸 가지고 해방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전국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습니다. 작은할아버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할 때부터 반기를 들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외지를 떠돌아다니며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 六十萬歲運動 (丙寅萬歲運動)

- 1926.6.10. 순종의

- 주동자는 2차 조선 공산당 당수 강달여,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감단야, 이지탁,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등.

-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10만 장의 격문을 살포.  

-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우리 집이 큰집이었는데 증조할아버지 때에는 참 잘살았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많은 재산을 축복받았기 때문에 그 인근 지역에서는 이름난 집안이었습니다. 이런 재산이 할아버지한테 상속되었는데 할아버지 동생 되시는 목사였던 작은할아버지께서 그 재산을 저당 잡혀 가지고 어디에 써 버리는 바람에 전부 다 파산돼 버렸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집은 일시에 파탄되어 버릴 꼴이 됐습니다. 그런 일로 말미암아 우리 집안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작은할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고 조카들 앞에도 면목이 없게 되어 어느 날 온데간데없이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 뒤에 어떤 소문이 났느냐 하면 남의 광산까지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때 교인들 가운데 광산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교인의 광산까지 팔아먹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거예요. 그렇게 남의 광산까지 팔아먹고 도망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목사가 패가망신해 가지고 고향에 도저히 있을 수 없으니까 도망가 버렸다고 소문이 난 거예요. 

 

그러니 할아버지도 그렇게 알고 계셨고 조카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문중 전체, 동네 전체, 인근 동네에서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모두 그런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목사 노릇한다고 하면서 교인들 못살게 하고 식구들 못살게 해 놓고 어디로 도망을 갔으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작은할아버지에 대해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럴 거 아니에요? 집안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면 전부 다 작은할아버지를 원망하던 처지였으니까.

 

그런데 작은할아버지가 가져간 돈이 어디로 갔으냐 하면 상해 임시정부로 갔던 것입니다. 그때 돈으로 7만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는데 그 돈을 전부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고 다니시다 결국 외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일을 했기에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전체를 희생시키고 교인들을 희생시키고 문중을 희생시키는 입장에 서 가지고 나라를 위해서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남한에 내려왔을 때 친척이라곤 그분밖에 없었습니다. 꿈에 그분이 혈족(문용기 장로)에게 나타나 가지고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고 주소를 알려 주어서 그 주소를 가지고 사촌동생 용기가 그곳을 찾아갔었습니다. 찾아갔더니 그때는 이미 작은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모든 것이 현몽한 그대로 틀림없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 할아버지를 해방 직후 이북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만났는데 그 할아버지가 워낙 바빠서 얘기도 제대로 다 못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때 그 내용을 전부 다 얘기했었다면 뜻은 급속도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뜻이 그렇게 출발하게끔 되어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에게 이 박사가 헬리콥터를 세 번씩이나 보내 가지고 데리고 가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남한에서 소리 없이 죽은 듯이 조용히 살려는 생각에서였던지 나타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그 할아버지가 뜻을 알아서 앞장섰더라면 우리 길은 활짝 트였을 것입니다. 

 

이렇듯 안팎으로 인연을 맺을 수 있게끔 하나님이 준비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잘못해 가지고 인연을 맺기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기반이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작은할아버지는 한학자로서도 이름이 나 있었고 목사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기만 했었다면 틀림없이 한자리했을 것입니다. 그랬을 게 아니에요? 그런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기회를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결국은 이 나라와 선생님과 통일교회가 수난의 길을 거쳐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해방 직후는 나라도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니 나라를 세워야 했습니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때가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선생님과 인연을 맺고 앞에 나서서 일하던 사람이 기성교회의 유명한 목사였는데 그는 자기가 앞으로 권력을 쥐겠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선생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문제가 벌어지고 우리 통일교회가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038-060 그때에 나는 김백문 씨와 같이 출발하게 되었던 거예요. 김백문 씨와 나는 가인과 아벨,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김백문이란 이름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 1974.2.8(금) 하나님이 가는 길과 인간들이 가는 길

070-052 옛날 우리 증조부는 애국자였기 때문에 3.1운동에···.  원래는 3.1운동의 대표 33인 가운데 우리 할아버지가 들어가야 된다구요. 5도 대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명룡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을 보내 가지고 그 꼬붕들이 전부 다 33인에 들어갔지요. 그때 나는 우리 집 뒷문으로 독립군들이 출입하는 것을 내 눈으로 봤습니다.

 

▣ 1975.5.4(일) 현재와 우리의 사명. 구리시 교문동 통일동산.

078-091 옛날 만세사건 때 우리 종조부가 5도 책임자였다구요.···.  지금 파주에 묘를 썼는데 그 할아버지가 강원도 갑종 요시찰 인물로 레테르 붙어 일생 동안 강원도 산골로 도망 다니다가 정선 골짜기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 버렸어요. 그래도 성공한 사람이니까···.

 

저 청평에 레이크 파크에서 집 지키고 있는 용기라는 사람이 있어요. 내 사촌뻘이 돼요. 그 사람에게 이 할아버지가 밤에 나타나 가지고 "야야, 정성군 무슨 면 무슨 리 아무개 집에서 내가 죽었으니 네가 이 주소를 기억했다가 찾아와라" 하더라는 거예요. 이래서 그 주소를 편지를 써서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 무덤을 찾았어요. 그 후 할아버지를 파주에 갖다 모셨어요. 그런 역사가 있다구요.

 

그걸 보면 우리 조상도 나쁘지 않은 모양이지요? 지상에다 그만큼 연락해서 죽은 땅까지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차원이 높아야 된다구요. 지금 그 시대의 얘기는 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078-093 3.1운동 때 원래는 우리 할아버지가 이승만 박사나 최남선 씨와 동기라구요. 거기 규합하는 데 있어서 운영하고 전부 다 그랬어요. 5도 책임하려다가 못해 가지고 이명룡이라는 사람이 결국 정주군의 장로였는데 그때 목사는 우리 할아버지였지요. 그 사람이 장로니까 할 수 없이 목사 대표로 갔다가 3.1운동 사건이 벌어져 가지고 33인 중의 한 사람이 된 거라구요. 거기에 원래는 우리 할아버지가 들어가야 되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그러면서 잘살던 우리 집의 모든 재산을 전부 다 북경의 임시정부에 갖다 바쳤다구요.

 

나는 그 우리 할아버지 증조부가 목사이고 해서 훌륭하게 알았거든요. 그때 내가 7살 때라구요. 내가 그 할아버지 하게 되면 하나님같이 알고 있는데 그때 말이 나기를 "아무개 문 목사 광산하다가 전부 다 패가망신해 도망갔다"고 난 거예요.

 

동양척식회사에 자기 형님, 우리 할아버지 재산을 전부 다 저당 잡혀 놓고 그때 돈으로 7만 원을 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납금하기 위해서 가져갔으니, 이게 목사가 광산을 해서 전부 다 손해 봤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전부 다 가짜 목사로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랬더라 이거예요. 그 문서를 찾아 가지고 지금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 놀음을 한 할아버지라구요  

 

이런 말을 왜 하느냐? 나 자신도 역사적인 그런 선조를 거쳐 대한민국을 중심 삼고 지금까지 걸어 나왔지만 이 할아버지가 정선에서 빗장사를 하면서 말년에 "내가, 고향을 떠난 내 자신이 무슨 뭐 어디 고향을 가자고 그러겠느냐?" 하고 있다가 정선 선화당을 통해서 한번 닦기웠다구요. 

 

빗장사를 하니까 공산당인지 모른다 해 가지고 할아버지를 데려다 조사한 거예요. 그때 강원도에서 경무대 이 대통령에게 연락해서 그때 처음으로 알았지요. 이 대통령 친구라구요. 이래 가지고 연락을 하니 아! 이런 놀음이 어디 있어? 직접 경찰서에 가서 당장에 그분을 모셔 들이라고 한 거예요. 

 

그때 왔으면 통일교회 문 선생 이렇게 고생 안 한다구요. 오늘날 이 꼴이 안 됐을 거예요. 그때 이 대통령에게 왔으면 한자리가 별 것 아니라구요. 당당한 기반을 닦고 내가 해방 후 이 복귀적 사명에 있어서 국가 민족을 기반으로 한 터전을 닦을 수 있었다구요. 그때에 찬성했더라면 지금은 그 할아버지가 영계에 가서도 좋아할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란 때가 있는 것입니다. 때를 잘못 놓치면 역사에 한을 남길 수 있는 이런 기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어요.  

 


▣ 1987.6.5(금) 리틀엔젤스. 눈물의 고개를 넘어서 이상 세계로.

- 서울 동 지부장단 승공결의대회.

 

166-151 우리 從祖父(할아버지의 형이나 아우)가 이 박사하고 친구라구요. 3.1운동 선언문을 기안한 최남선 씨와 전부다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북 5도를 수습하기 위해서 목사로 시무하신 분입니다.

 

이 박사가 그때 자유당을 창당해 가지고 건국을 한 이후에 우리 종조부에게 와 가지고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헬리콥터를 보내왔어요. 그때 할아버지는 정선에 있었는데 "내가 늙어서 정치는 싫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때 우리 종조부가 이 박사하고 하나 되었더라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렇게 비참하게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박마리아를 중심으로 이기붕 일가가 이대 사건을 중심 삼고 완전히 미국 선교사들과 하나 돼 가지고 춤추려다가 그 일가의 말로, 그 정권의 말로를 보게 된 것입니다.

 

공화당 때는 또 차지철을 중심 삼아 가지고 계교를 꾸며서 통일교회를 어떻게 하든지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사람을 시켜서 "당신들이 금년 11월 3일까지 그랬다가는 큰일난다"고 통고했습니다. 그런데 엿새를 앞두고 그 야단이 벌어져 가지고 그렇게 된 꼴을 내가 본 거라구요.

 

통일교회는 지상에서 전부 추방당했습니다. 추방당했어요. 그 뒤 40년이 돼 가지고 40년, 400년, 4000년 역사를…. 여러분들이 통일교회 원리를 알면 세밀이 알게 돼요. 지금 때가 어떤 때인지 확실히 압니다.

 

그때 한국은 40년을 되돌아가 가지고 남북으로 정권수립이 돼 가지고 분립돼 버렸습니다. 왜 분립됐느냐? 지도이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 삼은 지도이념이 없었다구요. 미국과 미국 교회가 왜 그때부터 분립되었느냐? 하나님을 중심 삼은 종교와 국가의 지도이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종교가 하나되고 대한민국의 독립과 더불어 남북이 하나될 수 있는 때였는데 그러한 지도이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렇지 않았어요?

 

해방된 직후에 미국파, 중공파, 소련파 3파전을 중심 삼고 서로가 옳다고 하고 이 박사는 정권을 수립하고 암살 문제가 벌어지고 혼란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 기독교는 신사 참배한 기독교와 옥중 생활하던 재건교회 그다음에는 지하에 있던 신령 집단들이 전부 나와 가지고 혼란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런 거예요.

 

▣ 1987.11.1(일) 제3이스라엘 나라. 본부교회.

169-324 파주에 모신 우리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세상 할아버지이지만 그분이 세워 셋째 할아버지입니다. 맏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인데 우리 할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저당 잡혔어요. 그때 금광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분이 목사님입니다. 훌륭한 목사님이었어요. 영어도 잘하고 체격도 나보다 잘났다구요. 훤칠하게 생겼어요. 나도 뭐 이만하면 못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왜 웃어요? 사실이지.

 

그 할아버지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종가 며느리인데 종가 며느리의 재산, 우리 어머니의 재산을 전부 저당 잡혀 팔아 가지고 그 돈으로 금광을 하다가 전부 날려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밖에 거짓말할 게 있겠어요, 왜정 때에 말이에요? 그런데 죽고 난 후에 유서를 보니 그 돈을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납부한 거예요. 그런 사실을 유서에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건 누구도 몰랐어요. 내 그걸 보고 "훌륭한 할아버지구나!"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지상의 대한민국 땅에 있어서는 애국자이니만큼 이 대한민국의 땅에 오는 것은 영계도 애국자의 길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청평에 있는 문장로 꿈에 나타나서 "내가 어디에 묻혀 있느니라" 하면서 강원도 정선군 무슨 면 무리 리 이름까지 가르쳐 주었다는 거예요. "문 아무개 집에 있다가 죽었으니 그 집에 가서 알아보면 나를 찾느니라"고 똑바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 아침에 일어나서 그 주소를 썼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준 대로 하도 신기해서 말이에요, 그다음에는 편지를 했다구요. 그 주소와 그 이름으로 답이 왔겠어요 안 왔겠어요? 그런데 틀림없이 답이 왔다 이겁니다. 이상하지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꿈에 가르쳐 준 주소에 편지를 해서 그 답을 받아 가지고 그 주소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할아버지를 파주에 모신 거라구요. 그런 양반들은 땅 위에 그러한 공이 있기 때문에 지상에 나타나서 자기의 일생을 가르쳐 주어도 하늘은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파주에 가게 되면 흥진 군 원전도 거기 있고 그 할아버지도 거기 있지요? 그런 할아버지입니다. 그러한 가정적 배후에서 선생님이 태어났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1987.12.4(금) 한남동 국제과학통일회의와 학계의 기반.

- 대학기관 대표자 회의, 곽정환 세계선교본부장, 이상헌 통일사상연구원원장 보고 후 말씀.

 

170-304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러 나가면 죽는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래서 우리도 절대 공부를 안 시키려고 한 거예요. 파주 할아버지가 구학문 학자인 동시에 평양 신학 11회 졸업생이에요. 신문학을 다 하고 영어도 잘하는 양반이거든요. 조카들을 전부 다 공부시켜야 될 걸 아는데 할아버지로부터 전부 다 나가면 죽는다고 하니까 못 시킨 거예요.

 

▣ 1988.10.8(월) 세계통일국 개천일. 용인 일화연수원.

181-249 영적 기독교 문화권 대승리 기반 위에 오시는 재림주님을 중심 삼고 한 나라를 새로이 신설하는 거예요. 그것이 40년 만에 일제에 의해서 해방을 가져온 한국입니다. 한국을 중심 삼아 가지고···.

 

그때는 남북이 안 갈라졌다구요. 군정시대에 있어서 이 박사가 배포가 있어야 되는데···. 선생님이 했으면 틀림없이 통일을 했다구요. 내 말만 들었으면. 그때 선생님의 나이 26살이었어요. 자유당 창당 시 창당 요원 5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내가 들어가 가지고 배후 공작을 하기로 했어요. 목사들이 전부 다 반대해 가지고 문제가 벌어져서 지금까지···. 통일교회 수난길이 거기서 시작했어요. 이건 지나간 역사의 이야기지요.

 

선생님 가정적으로 보면 우리 종조부가 목사였어요. 이 박사하고 친구예요. 둘도 없는 친구예요. 왜정 당시에 갑종 요주의 인물로 지탄을 받아 가지고 감옥살이도 했지, 2년 반의 감옥살이를 해 가지고 나오면 이게···. 

 

종조부는 한학자인 동시에 신학자였어요. 한시도 잘 쓰시고 참···. 최남선과 친구거든요. 3.1운동 선언문을 기안할 때 5사람인가 몇 사람인가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내가 직접 들었다구요.

 

문장도 잘 쓰고 영어도 잘했어요. 신학교를 나왔으니까. 한학을 한 사람이 신학교를 나왔으니 혁신적이지요. 보게 되면 체격도 좋고 한자리하게끔 생겼어요. 골격적으로 보면 말이에요. 그런 뭣이 있다구요.

 

종조부가 유명한 목사였어요. 그래서 이북 5도의 책임자였어요. 3.1운동 때 33명에 들어가야 되는데 5도에서 3.1운동을 주도하기 위해서 33인 축에 못 들어갔어요. 정주교회 장로를 자기 대신 3.1운동 선언문을 배포하는 데 참석시키고 5도를 직접 지도한 사람이 우리 종조부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33인 주요 멤버로 들어가야 된다구요. 이 박사와 친구라구요. 5도를 책임질 수 있는 기독교의 그런 무엇이 없었기 때문에 책임을 진 배후를 하나님은 이미 작정해 놓았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정치적인 풍토가 있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순진한 기독교 목사였어요. 그 사상을 그냥 그대로···. 

 

* 이래 가지고 돌아다니며 고향 떠나 수십 년 동안 지내다가 해방된 후에 우리 고향에 한번 돌아왔더랬어요. 그전에 좋지 않은···. 목사가 말이에요, 요즘으로 말하면 증권과 마찬가지지요. 옛날에는 期米라고 그랬어요. 벼 사는 운동 말이에요. 그런 놀음했다고 했어요. 자기가 동척회사에 와서 빚을 전부 다 내 가지고 형님네 재산을 전부 다···. 거 형님하고 짰지. 형님은 도왔지만 모른다고 나가자빠지게 되었어요.

 

그래 목사가 외도해 다 광산하고 말이야, 기미期米하다가 형님의 재산 전부 다 파탄시키고 거짓말로 속여 문서장을 저당 잡혀 팔아먹고 망하게 됐으니 야간 도망했다 그런 소문이 났다구요. 그래서 우리 종조할아버지 이름이 기독교 배경 세계에서는 아주 타락한 사람으로 몰려나왔다구요. 그러한 모든 운세가···.  그 동척회사에 저당 잡힌 돈들이 전부 다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 자금으로 바쳐졌다는 증서가 나왔기 때문에 밝혀졌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냥 그대로 죽어 가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에게는 작은 시아버지와 마찬가지인데 재산 전부 다 팔아먹고 그랬으니 얼마나 불평했겠어요? 그 죽을 영감이라고 말이에요. 망할 영감이라고. 그래,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객지 생활을 한 거예요. 경상도로부터 강원도로 돌아다니면서 동해안 산협 지대를 다니면서 붓 같은 것 팔면서···. 

 

학자니까 글방 찾아다니면서 훈장을 중심 삼고 똑똑한 사람 가르쳐 주는 그런 운동을 해 나왔다구요. 그렇게 살다가 이 박사가 들어와 가지고 나라를 세웠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필요하거든요. 구학문에 능통하지 신학문에 능통하고 그러니까 정선에 있을 때 헬리콥터로 세 번씩이나 모시러 왔었다는 거예요. 그래도 "아, 나 정치 안 한다구. 신앙하는 사람이 정치하는 것은···."  이랬다구요. 이래서 이 박사하고 하나 안 되어서 그렇지 만약에 이 박사하고 하나되었더라면 내가 얼마나 멋졌겠어요?

 

이론을 중심 삼고 우리 종조부를 설득만 시켰으면 이 박사 일족과 환경 여건, 기독교 간부 모든 것을 소화시키는 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등등의 배경을 하나님은 준비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맞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것이 역사시대에 번번이 이루어 놓은 실수였더라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 1989.6.24(토) 한국뿌리찾기연합회의 갈 길. 한남동.

- 한국뿌리찾기연합회 지도자 회의.

 

191-111 이때에 이 박사! 파주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이 목사예요. 하늘은 참 가정적으로 잘 준비해 놓았던 거예요. 우리 종조부가 나하고 같이했으면 손자한테 전부 다 교육받아 가지고 목사고 뭐고 보따리 다 둘러맸을 거예요. 둘러매게 돼 있어요. 성경 토론하게 되면 나한테 배워야지 할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 줄 것 아무것도 없어요. 거, 신학이란 간단한 거예요. 책을 읽으면 아는 것 같지만 이런 원리 체계는 몰라요. 물어보면 열이면 열 꼼짝 못 하고 나한테 굴복하게 돼 있어요.

 

그래, 유명한 분이거든. 그 양반이 한학자로서 최남선의 친구고 독립선언서 작성한 다섯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에요. 이러한 한학자고 신학자고 영어 잘하고 허우대가 좋아요. 나보다 잘생겼어요.

 

우리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내가 볼 대에 "야, 할아버지는 멋지게 생겼네. 한자리해 먹겠는데 왜 도망 다니지. 저렇게 밤낮없이…." 내가 그랬다구요. 할아버지는 잘났는데 좀 못난 것처럼 야간 도망 다니는 거예요.

 

왜? 독립군들 전부 다 우두머리가 되어 가지고 이북 5도의 노회장했거든요. 노회장을 하고 이래 가지고 3.1운동 때는 이북 5도의 노회장이니까 그걸 코치하려고 정주로 내려갔는데 이렇게 되니 3.1운동 때 그 대신 누가 참석했느냐 하면 거기 장로 중의 이명룡 씨가 33인 중에 들어간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가 들어가는 거지요. 그런 애국자의 가정에서 자랐다구요. 그래 가지고 우리 할아버지는 그때 이 박사하고 친하고 다 그랬어요.

 

그 할아버지에겐 우리 어머니가 조카며느리거든요. 그때에 우리 어머니가 시삼촌 감옥 간다고 전부 닭 잡아가고 뭐하고 그런 것 다 생각이 나요. 2년 반씩 옥중 생활했거든요. 만세사건의 주모자가 돼 가지고 이래 가지고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그때 그분의 형님이 우리 할아버지지요, 종조부 형님이 나에게 할아버지 아니에요? 우리 할아버지는 종손이고.

 

그래, 애국자 집안이 패망국이 돼 가지고 살면 뭐하냐 이거예요. 망하면 집이고 뭐고 필요 없고 거지 떼들처럼 일가가 어디 흩어지고 다 그래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모든 재산, 자기 모든 것을 투입해 가지고 나라 살리는 운동한 거예요. 그중에는 형님 재산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동척회사, 동척회사를 중심 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 빌려 줘 가지고 물지 못하면 농지 빼앗아 가지고 일본 사람을 교체 입주시키는 놀음한 거예요. 그 이외의 사람들은 만주로 쫓아버린 거예요. 이런 환경이 되니 돈 있으면 뭘 하느냐 이거예요. 

 

191-115 그때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한 실력이 있고 이 박사가 종조부 친구고 이렇기 때문에 정선에 있는 것을 알고 생전에 대통령 되어 가지고 정선 경찰서장을 통해서 세 번씩이나 제발 나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그때 눈 딱 감고 이 박사와 하나됐으면 내가 왜 고생하겠어요?

 

그래, 하늘은 그렇게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뜻을 몰라, 인간이 한 발짝 틀림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계열이 이렇게 이루어져 가지고 세계사적인 비참상이 벌어지고 나라가 망하고 세계가 망할 수 있는 인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신학 박사고 목사고 다 이런 양반인데 내 말 들었으면 나한테 꼼짝 못 하고 잡히게 돼 있지요. 이 박사는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안방에 들어앉아 가지고···. 

 

원래 자유당 편성할 때 내가 5사람 중의 한 사람이에요. 목숨을 내세워 가지고 이렇게 했었는데 그때 할아버지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요!

 

191-117 그러니 홀로 이렇게. 기성교회 전부 다 왜정 때 반대했던 이 패들, 신령파들 반대하고 이래서 이런 패들하고 싸움이 벌어지는 거지요. 그러나 국가적 기준에서 딱 이 박사 중심 삼아 가지고 나하고 하나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2차 작전으로 연세대학 이화여자대학, 남자 여자와 마찬가지로 아담과 같고 해와와 같은 2세 중심 삼고 딱 묶어 가지고. 이 박사 이거 브레이크 걸려고 그랬다구요.  

 

 

▣ 1990.2.15(목) 고생의 철학과 3권 복귀. 한남동.

- 향토학교 간부 및 간사.

 

199-080 한국은 그때 독립국가가 아니었어요. 그때가 2차 대전 직후였어요. 기독교 문화권을 중심 삼고 통일 천하가 된 때예요. 그런데 그것이 깨져 나간 거예요. 하나 못 되어 가지고. 선생님을 중심 삼고 전부 다 하나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미국 선교사들과 이화대학 등이 중심이 되어 가지고 다 망쳐 놓은 거예요.

 

그때 이 박사가 내 말만 들었어도···. 그때 파주에 계시는 우리 할아버지가 목사였거든요. 유명한 목사였어요. 이 박사하고 친구고 최남선하고도 친구였어요.

 

이 박사가 대통령 되어 가지고 우리 할아버지한테···.  할아버지가 강원도 정선에서 목사였어요. 유명한 목사였다구요. 한학자였고 신학문도 했어요. 영어도 잘하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외교 같은 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다 다니면서 했어요.

 

3.1만세 때 교회 총회장으로서 책임자였기 때문에 그때 우리 교회 장로였던 이명룡 씨가 우리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33인에 들어간 거예요. 이승훈 씨랑 전부 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주모자였어요. 원래는 우리 할아버지가 33인에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만세 사건 때 제일 많이 학살된 사건이 정주 사건 아니었어요? 정주교회 교인들을 전부 불살라 죽인 거예요. 그 할아버지가 이 박사와 하나되었더라면 내가 고생 안 했지! 뒷방에 들어가서 할아버지만 녹여 놓았더라면 다 되었을 것인데···. 

 

해방 직전에 지하운동을 하던 기독교 교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해방 직후에 주님이 온다는 소문이 났었어요. 그래서 내가 지하교회의 신령한 사람들은 안 만난 사람이 없이 다 만나 봤어요. 그런데 해방 직후에 군정이 나타나면서 신사 참배한 사람들···. 

 

친일파들이 한국 내정을 잘 알았잖아요? 군정이 수립되어서 편히 하니까 그런 친일파들을 잡아서 쓰고 그다음에 미국에 갔다 온 패들을 썼어요. 전부 다 외형적이잖아요?

 

그때 신령한 구약적 에덴 복귀파인 박동기 파와 신약적 에덴 복귀파인 김백문 파가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나를 김백문의 제자로 알고 있어요. 김백문의 제자가 될 게 뭐예요? 내가 60일 동안 거기에 가서 그 단체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그들이 내 말을 안 들었다구요. 전부 다 욕심 때문이에요. 세례 요한 같은 집단을 다 준비했던 거라구요.    

 

* 그것을 보게 되면 신사 참배한 패, 중간 패, 신령한 패가 있었어요. 그때는 신령한 패들을 몰랐어요. 대외적인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가인권 기독교인들과 하나되는 바람에 여기서 분립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때 선생님을 중심 삼고 하나되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참…! 선생님이 40세에 세계를 주름잡고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소련이 안 나오고 중국이 안 나왔을 거예요. 통일 천하가 되었을 거예요. 알겠어요? 결국은 한국이 책임 못함으로 말미암아 삼팔선이 생기고 양극으로 벌어졌던 거예요.

 

 

▣ 1992.2.11(화) 가야 할 천국 기지. 한남동.

- 일본 책임자. 일본어.

 

227-114 그중 작은할아버지는 목사였는데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한문에도 능하고 중국 역사도 훤히 아는 그런 한학자였습니다. 또 평양 신학교를 나왔는데 영어도 잘했어요. 서양 문명도 꿰뚫어 볼 줄 아는 독립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3.1 독립운동에 있어서 독립선언문의 공안을 작성한 5명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 1992.6.3(수) 전통 교육 실천을 통한 통반 격파. 한남동.

231-218 우리 증조부는 죽어서 정선 골짜기에 묻혔는데 그거 어떻게 알아요? 숱한 시련 가운데서 나라를 사랑해 가지고 감옥에 가든 어디를 가든 나라 사랑하는 일념을 중심 삼고 나라의 상대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서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 기반이 있기 때문에 거기는 언제나 와서 활동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직접 와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용기 장로도 계시를 받았는데 증조부가 살던 주소를 알려 줘 가지고 찾아가서 파주에 모셔 놓은 것입니다. 그게 꿈같은 얘기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그게 어떻게 해서 가능하냐 이거예요. 살아생전 일생을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대학자라구요. 한학자이며 신학교를 나오고 영어도 잘하고 모든 면에 있어서 활동을 잘하신 분이었습니다. 이승훈 씨를 코치하던 할아버지입니다. 이승훈 씨는 오산학교를 세운 창시자입니다. 그 사람은 소학교밖에 못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작은할아버지의 코치를 받아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거라구요. 그거 작성한 5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최남선하고도 다 친구거든요. 

 

그러니 땅 위에서 자기의 모든 전력을 다해 투입한 것이 사탄 세계 이상이 됐으니 그것이 창조 원리로 볼 때에 원리적 기준에서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위의 제재를 받지 않고 지상과의 관계를 맺고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 1991.1.16(수) 책임과 실적. 한남동.

213-150 왜정 때 우리 종조부가 동척회사 앞에서 목사를 했어요. 옛날 광산에 期米라는 게 있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증권 투자예요. 이것이 도박과 마찬가지라구. 그걸 해 가지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헌납하고 그랬다구요. 그 기미를 몇만 석을 샀다가는 그만 망했다고 해 가지고 남이 돈 줘서 야간 도망을 한 거예요.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진해 가지고 목사가 도박을 하다가 나쁜 죄를 지어 가지고 경찰이 따라다니는 것을 피해서 경상남북도의 산악지대를 다니며 붓장사를 하면서 일생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 할아버지 유서를 통해서 전부 다 군자금으로 헌납했다는 것이 드러난 거예요. 그런 애국자의 전통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 할아버지가 정선의 산중에 묻혀 있었는데 그걸 몰랐어요. 그러다가 문용기 장로의 꿈에 나타나 "아무개 집 뒤에 내가 묻혀 있다" 하면서 주소 성명을 가르쳐 주어서 그대로 편지를 하니까 답이 온 거예요. 답이 와서 가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문 씨가 있어요. 그래서 그 뒷산에 묻혀 있는 것을 모셔다가 지금 파주에 모신 거라구요.

 

그러한 충신의 실적이 있기 때문에 지상에 선한 후손이 나타난 것과 연결시킬 수 있는 이런 입장에 섬으로 말미암아 개죽음이 돼서 흔적도 없을 것을 자기의 본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인연과 연결시켜 가지고 파주 동산에 묻히게 된 거예요. 여러분들이 가서 인사드릴 만한 분이야. 알겠어요?

 

그분이 이 박사하고 친구고 최남선하고 3.1운동 선언문을 기안한 5대 책임자 중에 한 사람이었어요. 3.1운동 때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명룡이라고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 교회의 장로였어요. 그때 우리 할아버지는 이북의 총책임자인 5대 대표로 이미 들어가서 전부 다 조종하고 있으니 3.1운동 만세 사건에 마음대로 참석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대신 이명룡이를 쓰라고 해서 33인이 된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는 이름 있는 목사였는데 영어도 잘하고 걸출하게 잘 생겼었다구. 당시에 이승훈과 같이 오산고보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도 활동을 했다구요. 정주에서 인물이 많이 난 것이 다 우리 할아버지 시대의 그런 애국 동지들이 도왔기 때문이야. 

 

이 박사하고 친구고 하니 정선에 가서 붓 장사도 하고 이랬는데 이 박사가 주권을 잡아 가지고 정선의 서장을 통해서 세 번씩이나 헬리콥터를 우리 할아버지를 모셔 가려고 했지만 "이 사람아, 내가 지금 이렇게 늙어 가지고 나라를 위해서 뭘 하겠나?".  지금까지 신앙이 정치 종교 분립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려웠다는 거예요. 그때 우리 할아버지가 이 박사하고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요. 내가 한 1년 전에만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었어도….

 

이 원리만 있으면 할아버지는 돌아가는 거예요. 그랬으면 고생 안 하지요. 자유당을 만들 때 5대 편성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선생님이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1997.10.31(금) 사탄 혈통 단절과 이상 천국. 이스트가든. 

- 제38회 참자녀의 날 경배식.   

 

288-021 이 박사가 자유당을 선택할 때 거기의 요인 가운데 한 사람이 나였어요. 기독교를 수습해 가지고 일하려고 했던 것이 기독교가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못했어요.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미리미리 방어하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우리 증조부는 이승만 박사하고 친구예요. 최남선하고도 서로 친구예요. 신학과를 나왔기 때문에 영어도 잘 하지 한학에도 정통한 유명한 한학자라구요.

 

이렇게 안팎으로 모든 것이 움터 나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를 맺는 데에도 그렇고, 그런 면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외교적인 활동에 능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민족이 바라보는 소망의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 삼고 쓰러져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금 조달을 우리 할아버지가 국내에서 했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 형님 되는 우리 할아버지의 모든 재산, 종손 되는 우리의 모든 재산을 그때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抵當을 잡혀 가면서 그런 일을 한 거예요. 그것이 사후에, 죽고 난 후에 유서에 남았어요. 그때 돈으로 7만 원이에요. 7만 원. 굉장한 돈이라구요. 그래 가지고 목사가 그러한 놀음을 했기 때문에 말이에요, 자기 형님, 일족의 모든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그것을 무엇으로 변명하겠어요? 요즘으로 말하면 주예요. 株. 

 

주권 판도와 마찬가지로 그때 期米라는 것이 있었어요. 벼 몇만 석, 몇십만 석씩 산다는 거지요. 이자를 걸고 해서 말이에요. 주식 거래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작은할아버지께서 거기에 재산을 전부 다 투기해서 망했다 하고 소문을 내는 그것밖에 길이 없었어요. 

 

그래 가지고 야간 도망한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잘못해서 외도하다가 도망갔다고 소문난 거예요. 그 유명한 할아버지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 속사정을 누가 알아요? 아는 할아버지는 그러한 얘기를 안 하고 조카며느리 되는 우리 어머니는 모르니까 전부 "저놈의 영감, 우리 집을 망친 원흉이다" 이랬다구요. 그런 역사가 남은 것입니다. 

 

288-023 알고 보니까 그렇게 돌아갔어요. 그렇게 돌아가서 한이 남겠으니 강원도 정선의 문 씨 집 뒤에 묻혀 가지고 영적으로 문용기 장로에게 "내가 이러이러한 주소의 아무개 집에 묻혀 있다" 이렇게 현몽을 한 것입니다. 하도 신기하기 때문에 주소를 적어 가지고 편지를 썼는데 그렇다는 답이 왔어요. 그런 영적인 역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애국자의 정신을 가지고 죽어 갔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렇게 현몽한 그 주소를 찾아가서 무덤을 찾아 이장한 것이 지금 파주 할아버지의 무덤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위하여서 죽어 간 사람은 그 후손이 망하지 않아요. 그런 가정에서 선생님이 태어났어요. 우리 가정이 그런 독립사상을 갖고 나왔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