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노정

일본 유학 - 1941.4.1. 새벽 2시 晶慶丸일본으로 출발.

true2020 2019. 3. 12. 16:28

 

* 1941.3.31 14;10 發 경부선 ひかり号 列車를 타고 서울역을 떠났다.

* 1941.4.1. 새벽 두 시, 부산 부두 晶慶丸 일본에 출발.

* 1943.9.30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 고등 공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 1943.10 중순 귀국.   

 

1. 서울에서 부산까지 8시간 기차 안에서 눈이, 코가, 입술이 붓도록 통곡했다.

 

1) "불쌍한 이 민족을 누가 책임지겠는가

 

▣ 1987.5.1(금) 남북통일의 기수가 되자. 한남동. 한국 지도자.

163-299 내가 동경을 향해 떠날 때 서울역에서부터 부산역까지 달리는 그 기차 안에서 눈에 눈물이 어려 가지고 한강 철교를 지나면서 눈물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구요. 

 

"내가 실패의 사나이로 끝나지 않겠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민중의 새로운 정부를, 미래의 하나의 사랑의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했어요.   

 

2) 서울역에서부터 하관下關까지 오버를 쓰고 통곡을 하고 간 것이 몇 시간이었더냐.

 

▣ 1983.5.1(일) 복귀 섭리의 회고.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127-030 내가 일본 갈 때, 서울역에서부터 하관下關까지 오버를 쓰고 통곡을 하고 간 것이 몇 시간이었더냐.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 나는 "하나님, 뜻 가운데서 당신이 갈 수 있는, 발돋움해 갈 수 있는 굄돌을 놓기 위해 사랑의 정열에 불타는 심정이 녹아나 가지고 흐르는 눈물 자국을 통해야 된다는 것을 내가 알았사오니 그런 길을 가게 해 주소서" 이런 기도를 한 거예요.

 

높은 자리에 안 찾아갔다구요. 빈민굴로부터···.  인간의 말단 자리에서부터 더듬어 갔습니다. 그 세계의 생활고에 허덕이는 인간상을 다 알고···. 어떤 분야든지 다 거쳤습니다. 노동도 해 봤고 농사도 지어 봤고 뱃꾼노릇도 해 봤고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내 일생의 천추의 한과 당신의 서글픈 모든 것을···, 6천 년 한을 품고 온 당신의 심정에 그 무슨 한이 남아 있거든 이 지식 하나 때려놓고 천만 대 때려놓고 풀 수 있다 할진대 그렇게 하시옵소서" 하면서 나온 거예요. 그런 길을 찾아 나온 나를 하나님을 "너를 사랑한다"는 얘기는 좀처럼 안 하십니다.

 

1967.12.10(일) 승패는 순간에 결정된다. 전본부교회.

019-029 부산으로 가는 차를 타고 가다가 한강을 바라보게 되면 옛날에 선생님으 큰 뜻을 품고 일본을 향하여 가기 전에 한강을 바라보면서 비장한 각오를 하던 것과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갈 때 바다를 바라보면서 비장한 결의를 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을 때 동정하며 오바를 덮어 주던 일본 부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2. 1941년 4월 1일 새벽 두 시에 부산 부두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기도

"내가 지금 비록 떠나지만 너를 더욱더 사랑하고 너를 위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려 주마"

 

▣ 1969.2.2(일) 나의 뜻과 신념. 전본부교회.

- 제2차 세계 순회 노정을 떠나시기 앞서.

 

022-120 선생님이 1941년도에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부산을 향해 서울역을 떠날 때 서울 장안을 바라보면서 불쌍한 이 민족을 누가 책임지겠는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지금도 한강변에 가면 불쌍한 이 민족이 해방되는 한날을 위해 눈물 흘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지만 이 민족은 아직도 불쌍한 민족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022-122 일본에 갈 때는 보통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기차로 8시간 걸립니다. 나는 그때 기차를 타면서부터 오버를 뒤집어쓰고 통곡을 했습니다. 눈물이 끊이지 않아서 눈이 붓고 코와 입술이 붓도록 울었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그런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눈물. 하늘을 사랑하고 싶어했던 그 사연, 이 민족에게 심어 주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그 하소연이 이 민족 앞에 기필코 남아질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민족 앞에 남아지지 않으면 통일의 젊은 가슴 가슴에, 통일을 원하는 사나이의 가슴 가슴에 남아 달라고 선생님이 부탁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선생님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은 그 장래가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통일교회를 비판하고 선생님이 가는 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논란하는 사람들은 큰 회개를 해야 될 것입니다.

 

* 이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으로 말한다면 선생님은 어느 애국자보다 더 많이 흘렸습니다. 선생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1941년 4월 1일 새벽 두 시에 부산 부두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비록 떠나지만 너를 더욱더 사랑하고 너를 위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려 주마"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022-123 또한 선생님이 일본의 궁성을 지나게 될 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린 한을 품은 외로운 사나이로서 그 궁성을 응시하면서 "이제부터 20년 후에는 하늘이 한민족을 중심 삼고 승리의 깃발을 꽂으실 그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생님은 이미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습니다.

 

"지금은 네가 우리 민족을 핍박하지만 앞으로는 반대로 내가 명령만 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너를 향하여 이 궁성을 향하여 화살을 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25년 만인 1965년도에 이루어졌습니다.

 

3. 일본 천황을 잡아치우는 운동을 했어요. 지하운동을 했습니다.

 

▣ 1965.11.1(월) 소망의 조국의 슬픔. 광주교회.

- 제1차 세계 순회 마치고.

 

155-315 일본 가서도 선생님은 일본 천황을 잡아치우는 운동을 했어요. 지하운동을 했습니다. 南京과 다리를 놓아 가지고, 그런 얘기하면 참 여러분이···. 참 아슬아슬한 무엇이 많았습니다. 마, 그건 그만두자구요.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슨 뭐 하늘을 사랑한다구요? 내, 앞으로 이제 전부 다 한번 재심사를 하려고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하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4. 학창 시절에 한국을 바라보며 울 때가 많았다.

 

▣ 1967.8.13(일) 萬民之願 統一世界. 전본부교회.

018-334 선생님이 외국 갔다 와서 김포비행장에 내려서 한국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파 속으로 울었습니다. 선생님은 學窓(배움의 창가라는 뜻으로, 공부하는 교실이나 학교를 이르는 .)時節에 한국을 바라보며 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에 이 뜻을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세워야겠다는 계획이 그대로 되었다면 지금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50이 가까워 오는 지금 또다시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학창 시절에 세웠던 계획대로 되었다면 아마 이렇듯 황폐한 나라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 통일교회를 몰라보니 선생님의 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한국에 통일교회가 없었다면 한국의 앞날은 단 하루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동양에 통일교회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일본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공산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현재 통일교회에 속한 여러분에게는 이 민족을 살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개척자의 사명을 견지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또 하루하루를 정리하면서 내일의 승리를 위해 달려갈 것을 맹세해 주기 바랍니다.

 

 5.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1971.10.9(토) 중앙수련원.  국가와 우리의 사명.

- 전국 사업소장 수련회.

 

049-159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나라 없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때 내가 원수의 나라 일본으로 떠나면서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눈물 흘리던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아요. 한강 다리를 지나면서 눈이 통통 붓고 코와 입술이 아프도록 울었어요.

 

관부 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도착한 날이 3월 21일이에요. 그때부터 나라를 중심 삼고 일본에 가 가지고 별의별 일을 다 했습니다.
나라 없으면 못 삽니다. 여러분, 나라가 있어요?  원수의 나라에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했다가는 그 길을 망치는 것입니다.

 

6.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뭐냐?

 

▣ 1990.2.17(토)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라. 국제연수원.

- 세계일보 과장 이상 간부.

 

199-213 내가 소년 시대 8살 10살 때부터 우리 집안에는···. 우리 증조부가 이승훈 씨, 최남선 씨 같은 3.1운동의 주역인 5인들과 친구입니다. 이 박사도 친구고 말이에요. 그분은 일제와 투쟁하다 감옥살이를 하고 그랬다구요. 그랬기 때문에 일경들이 우리 집을 언제나 주시했습니다.

 

그런 걸 보게 딜 때 "누가 우리 집을 이렇게 못살게 하고 이 나라를 이렇게 못살게 해? 우리 할아버지나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애국 동지들을 보면 누구보다도 나라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왜 나라를 갖고서 사람 행세를 못하고 밤에 몰려다니면서 쑥덕공론을 해야 돼?" 그런 것이 참 의문이었다구요.

 

"이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이 나라를 살릴 수있는 길이 뭐냐?" 하는 걸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이 나라가 일본보다도 센 나라였다면, 강한 나라였다면 이렇게 안 되었을 것이다" 하는 걸 알았지요. 문제는 그거예요. 약하기 때문에 약한 배경과 약한 기반에 서 있기 때문에 비참한 운명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그때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 뭐냐? 세계 제일의 강국이 어느 나라냐? 그건 미국이다. 그때 벌써 미국이란 걸 알았어요. 그러면 미국이 일본보다 다 큰 나라인데 미국도 일본이 하는 놀음과 같이 자기 국권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약한 나라를 점령해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 마찬가지다. 한다!

 

그러면 정의의 국가, 이 세계를 대표해서 정의의 자리에 서서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보호하고 키워 줄 수 있는 그런 정의의 나라는 없느냐? 어릴 적부터 그런생각을 했어요. 만약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 할 때는···.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역자적으로 볼 때 그거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창조주가 있다면 창조주는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럼 나라를 살리고 이런 압박받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창조주가 있다면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를 잡아서 이 일을 성사시키겠다 한 것입니다. 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내가 기독교니 무슨 교니 종교를 통해 가지고 주 욱 탐사했어요.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을 내가 한번 만나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러면서 10대를 지나고 20대를 향하면서 신앙적 노정에서 여러 가지 고민도 했어요. 그러면서 일본에 가 봐야 되겠다. 일본을 거쳐서 미국을 갔다 와야 되겠다. 현지에 가 가지고 약소민족이 서러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체험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다면 내가 바라는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모험을 하는 대표자로 등장해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모험해야 돼요. 출세를 바라는 사람은 모험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