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이요한 목사- 야목교회를 집단 복귀시킨 원리수련회

true2020 2019. 1. 25. 16:28

▣ 천애로 인도받은 삶 198 / 이요한 선생

 

내가 뜻길을 걸어 오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성사된 많은 경험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겅기도 화성군 매송면 양목리 야목교회 사건이다.


기성교단이 몽땅 통일교회로 넘어온 것이다. 야목교회는 본래 감리교 소속이었다. 이 교회는 1946년 6월 평양에서 참아버님을 만난 차상순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차 목사님은 1910년 황해도 신천군 화산리 3대째 장로교를 신봉해온 가문에서 태어나셨으며, 만주 동북 신학원을 다니면서 전도사 생활을 한 분이다. 그리고 참아버님을 만난 뒤에는 손수레를 끌면서 물건을 팔아 경제적으로 도우셨다. 

 

1954년 11월경 나는 참아버님의 지시로 야목에 가게 되었다. 평양에서부터 참아버님을 따랐던 차상순 목사님이 야목 감리교회에서 목회자로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나를 보내셨던 것이다. 


차 목사님은 1953년 봄부터 이 교회를 맡아 이끌어 오셨다. 나는 차 목사님을 만나 참아버님께서 찾으신다는 말씀을 전했다.  차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서울 흥인동 교회로 올라와 유효원 협회장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재출발을 하였다. 


차 목사님은 야목교회를 하나님 앞에 복귀시키겠다는 다짐을 한 뒤, 신도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고, 동산의 노래를 가르쳤다. 


1955년 겨울에는 강현실 전도사와 강경렬씨, 김순겸씨가 찾아와 부흥회를 하면서 성령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지만, 반발 역시 나타났다. 


차 목사님은 1956년 12월 3일부터 1주일 원리수련회를 요청하여 내가 직접 가서 말씀을 전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다는 옛말처럼 한 두 명도 아니고 교회 전체를 놓고 원리말씀을 전하자, 그 사실이 곧 감리교회 교단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원리를 듣고, 감화를 받은 차 목사님과 120여명의 감리교인들은 1957년 4월 17일 감리교회 교단의 제재와 압력행사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통일교회로 집단 회심하여 식구가 되었다. 

 

당시 청년 식구였던 주희영 장로는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 당시 원리수련을 통해 교인 대부분은 성령과 불 체험을 했다. 신령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하얀 불줄기가 교인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고, 말씀은 떡 같은 불덩이가 되어 교인들에게 먹혀졌다. 기적이 일어났고, 모두가 중생을 통해 심령이 부활되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저도 그때 체험을 했는데, 스스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는 변신이 되었다. 


겨울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청년교인이 통일교회는 나쁜 곳이며, 이단이라는 반론을 폈지만 누구 한 사람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 학생은 감리교회 중앙재단에 보고하게 되었고, 문제는 확대되어 소송으로까지 갔다. 수원지청에서는 화해를 하거나 떠나가라는 것이었다. 


결국 1957년 5월 사택까지 내어주고 물러났다. 그후 온 식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12일 만인 1957년 6월 7일 새 건물을 지어 기념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순수하게 원리말씀을 듣고, 죽었던 심령이 되살아난 야목교회 식구들을 생각하면, 기독교 전체가 참아버님 앞으로 다시 돌아와야 할 복귀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실체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참아버님께서는 야목교회를 자주 찾으셨다. 


* 1959년 5월 서울교회와 인근 7개 교회 청년들과 함께 찾아와 모내기를 하셨다. 

* 1959년 7월 20-8월 31일 제2회 전국 전도사 40일 수련회를 개최하셨다. 참아버님은 40일 수련 기간 중 21일을 이곳에서 보내셨다.

 

* 새마을 운동의 시발점이 야목교회다.

* 야목에서 낚시를 하시며 환태평양 섭리와 해양섭리를 구상하셨다. 야목은 해양섭리의 전초기지다.

* 야목은 제2의 정주다. 

* 야목에 수련소를 지어 남북의 지도자들이 수련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