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이요한 목사- 하나님, 나의 하나님

true2020 2019. 1. 25. 16:21

▣ 하나님, 나의 하나님 / 간증1 - 260

이미 흘러간 물로써는 물방아를 돌릴 수 없다. 신조차 과거를 개혁할 수 없다는 아리스코텔레스의 말이 정확한지도 모른다.


* 1916.9.4 평북 선천군 선천읍 봉산동에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 어머님의 손에 이끌리어 선천읍 장로교회에 다녔다.  

* 아버님은 이인호, 어머님은 문정수 씨였다.

* 나는 3남 중 차남이었고, 위로 누님이 한 분 계셨다.

* 어릴 때 나의 이름은 이태윤이었다.


* 봉천에서 중국인 중학교를 다니다가 만주사변으로 중국 하남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거기서 한국인 장로교회에 다니다가 24살 때 지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것이 목회의 첫발이다. 교인은 2, 30명되었다. 내가 직접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한국말로 설교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심해지고, 일본세력이 강해지면서 영사관으로부터 한국어 설교를 금한다는 전갈이 왔다. 그후 나는 곧장 영사관의 허락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신학공부를 할 셈으로 일본 동부신학교에 입학, 1년 가량 이 학교에 나가게 됐으며, 1943년 문교부 시책으로 각 신학교가 통폐합됨으로 연합신학인 일본신학교로 옮겼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교장의 질문을 받고, 너무 솔직히 대답하여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상검토에서 30명의 한국학생 가운데 유일하게 나만 퇴학을 당한 것이다.


한국에 나올 수도 없어서 일본에 계속 있으면서 군수공장으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나의 나이 25, 26세가 되어 젊은 사람으로 징용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군수공장에 들어가 일단 징용을 면하게 됐다. 여기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일했으며, 일요일이면 몇몇 마음이 맞는 한국인끼리 모여 예배를 보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나의 신앙에 또 하나의 격변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해 10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 미국으로부터 구호품이 들어오자 교역자들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지고, 정치에 참관하게 되자 성직을 버리기 일쑤였다.


* 그런 가운데에서도 만주나 고향 혹은 일본 등지에서 만났던 교우들이 모여 잘 믿어 보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우리 교회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던 나는 목사들이 벌거벗은 것과 담배를 피우는 꿈을 꾸게 됐다. 교회가 먼가 부끄러운 상황에 이르렀구나 하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스쳐갔다. 또 현 교단에 "하나님의 촛불이 옮겨졌다"는 몽시와 "한국 주 재림"이라는 글자가 적힌 내용이 號外 新聞처럼 보여지는 꿈을 꾸게 됐다.  


* 그후, 서울에서 몇 시간 거리 떨어진 어느 교회를 맡아 서울에 거주하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이 교회와는 남대문 교회 장로님을 통해 인연을 맺어, 인도자가 빈 얼마 동안 시무한 것이다. 그러면서 남산 청해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한 학기를 다녔다.


* 38선 때문에 평양의 신앙열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熱誠 信徒들로부터 "평양이 과연 한국의 예루살렘이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분들로부터 평양에 은혜가 많은 청년 한분이 있는데, 가정에서 집회를 하다가 옥중에 들어가셨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청년의 말씀을 들어본 사람들에 의해, 그는 남이 알지 못하는 뜻을 아는 분 같고, 뭔가 비범한 분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말을 하는 분 가운데 옥세현씨가 있었다. 그분은 당시 40대 중반의 부인이었는데, 남대문 교회 교인들을 통해 알게 됐다.


* 그때 옥세현씨가 받들던 그 청년은 한국에 재림주가 오시며, 기성제단을 사명을 다 못하고 불이 꺼져 바리세 교단과 같다는 주장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 말에 공감이 됐으며, 그래서 목회자들의 방황이 일어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나는 곧 남쪽으로 피난민 대열에 끼여 내려오다 부산에 도착, 초량교회에 피난민들과 일단 거처를 정했다. 


다시 제주도에 들어가 몇 개월 동안 배급 주는 식량으로 지나게 됐다. 


* 마침 이봉운 장로님의 사모님되시는 분과 쌀 배급을 타 가지고 오다가 쉬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신앙적으로 진지한 내용이 많이 거론됐다. 그래서 하루는 이 장로님 댁을 방문했는데, 장로님을 그다지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사모님이 무척 반가워했다. 


* 이 가정은 내가 부산으로 가 얼마 후에 나의 편지를 받고 부산에 도착하여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1952년 하반기에 부산에서 2, 3개월 헤매다가 …가정집회를 통해 서울에서 만난 옥세현씨의 거처를 알게 됐다. 그래서 범일동에 산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으나, 옥세현씨는 못 만나고 선생님을 만나서 시중을 들고 있음을 알았다.


이미 서울에서 소문을 듣고 선생님이 어떤 분인가을 알게 되었던지라, 먼저 선생님을 만나뵙고, 교인을 데리고 범일동 토담집을 찾았다.


나는 성진씨 어머님과 타락원리부터 들었다. 선생님께서 원리책 원본을 그해 여름에 다 쓰셨다면서 그것을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용이 무척 어려웠다. 후편 40일을 중심한 복귀섭리역사에 대한 말씀에 가장 감명을 받고, 그 내용을 베껴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 교계에서 우리에게 반대의 화살을 돌리게 된 동기는 옥세현씨의 남편되시는 우장로의 영향도 컸다. 그분은 옥씨 할머니가 평양에서도 선생님을 따르더니 부산에 와서까지 따르게 되자 못마땅하게 여겨 많은 핍박을 하고, 교계에다 밀고하고, 재림주로 따르고 있다고 여러 가지 모함을 했다. 


옥씨 할머니 남편인 우장로는 그후 고려파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어 부인과 이혼한 후, 재혼하고 말았다. 이 사람은 평양에서도 큰 교회 장로였고, 신학공부를 했기에 선생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우습게 본 것이다. 


* 원리를 듣고 보니 성서적으로 근본문제를 해결하고, 비밀이 드러나게 되어 무조건 선생님을 따르고 존경하게 된 것이다. 


* 그 당시는 각자 생활보고를 선생님께 하였다. 가정에서 있은 일, 교회에서 일어난 일, 각자 처소에서 생긴 일을 보고하면 선생님을 그 보고를 들으시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직접 지시해 주셨다.  


* 간혹 답답하시면 낮에 잠깐 범일동 뒷산에 오르셨으며, 수정동에서는 나도 같이 몇 번 올랐었다. 한 바퀴 주위 뒷산을 돌아오면 벌써 사람들이 와 있었고, 그들을 상대로 또다시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은 자신이 무슨 계시를 받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는데 식구들의 생활을 훤히 알고 계시는 것이었다. 산에 갔다가 불시에 내려오셔서 알 리가 없는데도, 그 때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훤히 아셨으며, 식구들이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꿰뚫어 보셨다.


* 특히 그 당시에는 회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으며, 믿음에 대한 확고한 자세를 갖도록 말씀하셨다. 선생님 자신도 많이 우시고, 식구들도 예수님의 서러움, 하나님의 슬픈 사연을 듣고 자주 울었다.


또 가인 아벨에 대한 말씀이 당시 주된 내용이라면, 70년대를 전후하여서는 탕감법에 대한 말씀을 하였고, 근저에 와서는 참사랑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시는 것을 보면, 신앙의 급수에 따라 말씀을 주시는 것 같다.


* 현재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지만 초창기에는 대체로 기성교회의 신앙을 했던 사람, 사회적으로 지위를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긍정하고 낮아지려고 하지 않았다. 


*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아벨과 가인의 관계에 대해 주로 말씀하셔서 기본적인 신앙의 기대를 세우려고 하셨다. 이런 신앙의 기대를 쌓은 후에 속죄의 시대, 탕감의 시대를 거쳐 참사랑의 시대, 자녀시대로 섭리해 오신 것이다. 


* 1953년 여름이 되자 선생님께서는 전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우선 강현실 전도사를 7월 20일에 대구로 파송하셨다. 선생님은 개척 전도에 여자를 먼저 파송하시고, 그다음 8월 초순에 남자인 나를 전도 일선에 보내셨다. 


* 말씀의 사자로서 나는 열차편으로 대구역에 도착했다. 우선 지승도 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 나는 가지고 온 가방을 두고 안지랑이 산을 올랐다. 나는 대구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어떻게 전도를 시작할까 생각도 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곳 봉우리에는 권사나 집나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와 있었다. 대부분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었다. 주위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다. 그 가운데 남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날 오전 나는 말씀을 했고, 그들은 은혜를 받았다. 


* 모두들 흠뻑 은혜를 받고 며칠만에 산에서 내려와 예배를 가정에서 보게 됐다. 그 다음부터는 임춘자 집사의 요청으로 그 댁에 가 예배를 보았는데 3, 40명 모여 들었다. 그때까지도 체계 있는 원리말씀보다는 하나님의 사정,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타락의 동기, 재림의 장소 등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중심삼고 전하였다. 


* 특히 그당시는 신랑 신부의 역사를 많이 했다. 할머니나 중년부인들도 모두 처녀의 마음이 되고, 신랑을 만나는 계시를 많이 받았다. 


* 1953년 가을에 선생님께서 대구에 처음 오셔서 봉산동 교회에서 며칠간 머무르셨다. 그러시다가 그해 12월 24일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당시 부산에 유효원 선생이 입교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찾아 가셔서 20일간 강의를 해 주셨다. 


* 봉덕동 교회에서 옮긴 곳이 대신동 2층집이었는데 선생님은 이곳에서 용문산으로 떠나셨다. 


*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1) 하나님의 말씀의 대신자라는 심정

2) 원리말씀을 수육해서 인격체화시켜야 한다. 로고스의 실체.


* 선생님은 말씀을 전해 주셨고, 몸소 말씀의 실체임을 보여주셨다.


*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하며, 소 메시아로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