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이요한 목사- 위인을 만날 것이라는 스님의 예언

true2020 2019. 1. 25. 16:21

▣ 위인을 만날 것이라는 스님의 예언   천애로 인도받은 삶 21 / 이요한

내가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스님이 우리 집에 들러서 어머니의 부른 배를 한참 보다가,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위인을 만나야 살 사람이지 혼자서는 수명을 다 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1919년 세계기독교 대회 통계에 따르면 선천읍의 기독교인 비중은 세계 어느 지역보다 높았다고 했다.  

 

3.1운동 민족 대표 중에 양전백, 길선주 목사 두 사람이 있다. 

 

선천은 이미 1898년 휘트모어 선교사가 지부를 개설하면서 기독교 부흥 열기기 시작되었고, 1902년 양전백 목사가 처음으로 장로로 장립되면서 교회 발전이 본격화되었다. 

양전백 목사는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한국 최초 목사 7인에 속했다. 

 

통일교 초창기 전도 부흥의 기틀을 다졌던 양윤영 선생이 양전백 목사의 조카이다. 

 

어머니는 시집 오실 때 찬송가와 성경을 가지고 오셨는데 언제나 선반에 모셔 놓았다고 들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제국와 대한제국이 한일합병조약이 경제로 체결된 이후 일본의 폭정이 날로 거세졌다.

 

결국 내가 7살 때 함경도와 평안도의 많은 농민들처럼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1905년 청나라는 일본과 간도협약을 체결한 뒤 간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만주 이주민은 1910년 20여 만 명에 불과했지만 광복 직전에는 170여 만 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만주는 지금의 동북지방을 말한다. 동북 3성, 영변(라오닝), 길림(지린), 흑룡강(헤이륭장)성이다.


당시 항일운동을 펼쳤던 조선 혁명군은 중국 남만주와 동변도 일대에서 활약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3대 항일 무장세력을 통합한 조선인 최대 규묘의 항일 무장세력이다.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은 1919년 23살의 어린 나이에 최시흥이 이끄는 천마산대에 입대 항일 무장운동을 펼치다 중국으로 건너와 육군주만 참의부 소대장을 거쳐 총사령관에 올랐다.

 

우리 가족은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신앙생활은 열심히 했다. 신명소학교 부근에 장로교 교회가 있었다.


어머님은 교회에 갈 때면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농사를 지을 때 입던 땀에 전 옷을 벗고 치마 저고리로 갈아 입으셨다.


우리 형제들도 깨끗하게 손질한 흰옷을 입고 교회에 갔다. 그래서 교회에 가는 날이면  명절처럼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