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이요한 목사- 가인세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true2020 2019. 1. 25. 16:37

천애로 인도받은 삶 140 / 이요한 선생                                                 

범내골 토담집은 두 평 남짓한 단칸방이었다. 별도의 부엌은 없고, 솥 하나를 얹은 부뚜막 옆으로 허리를 굽히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사실 한 가족인 참아버님과 성진님 모친(김선길), 성진님께서 생활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지만, 형편이 못 되어 며칠을 그냥 함께 생활한 것이다. 


좁은 방에서 다섯 명이 함께 잔다는 것은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수 없어서 김원필 선생과 옥세현씨 그리고 나는 그 집에서 나왔다.  1953년 1월 그래서 옮긴 곳이 수정동이었다.

 

성진님 모친은 더 힘드셨을 것이다. 어느날 참다 못한 성진님 모친이 "교회를 하려면 버젓히 교회를 짓고, 교인들을 오게 하려면 교인들이 올 장소를 만들 것이지!" 성진님 모친은 식구들이 많이 찾아오는 데다, 비좁은 공간에서 예배를 보고, 잠도 자려고 하니 답답하다는 생각이 차올라 참지 못했던 것이다. 

 

참아버님은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가인 세상에 대해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자신이 피난민인데다, 토담집에서 사는 곤궁한 처지였지만 돈이 생기면 즉시 그것을 모두 털어 남들을 배부르게 대접하는 데 쓰셨다


그리고 남편들에게 서러움을 받고 살았던 여성들에게 주시는 참아버님의 위로와 사랑은 참으로 놀라운 것들이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당시 식구들에게 부닥치는 일에 대해, 모두 다시 없을 큰일인 것처럼 이해해 주시고 풀어 주셨다. 

 

참아버님께서는 남을 위해서는 돈을 쓰시면서도 교회를 지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김원필 선생이 하루에 100달러까지 벌어오던 때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교회를 짓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 100달러면 굉장히 큰 돈이었다. 그러나 참아버님께서는 돈을 모으시지도 않으셨고, 교회를 지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날 들어온 돈은 그날로 다 쓰셨다. 

 

때때로 누군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아시고, "오늘 누가 온다. 갈비 사 먹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미리 먹을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고기 파는 분이 매일 왔던 기억이 난다. 당시 찾아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避難民이었다.


특히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꼭 실컷 먹여서 보내셨고, 어렵게 사는 사람이 오면 손에 든 것을 전부 주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자신의 것은 한푼도 남겨놓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 나중을 위해 돈을 모으시지 않으시고, 눈에 띠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건네 주셨다. 먼저 나온 식구들에게는 기성복이나, 값싼 옷을 사 입히셨지만, 새로 온 식구들에게는 새 옷을 맞춰 입히셨다. 


당신과 함께 살아야 할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돈을 아끼시고, 손님들에게는 돈을 많이 쓰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워낙 일반 사람들과는 생각하시는 것 자체가 다르고, 행동하시는 것도 달라서, 왜 그러시는지 궁금해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참아버님께서는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으시다. 

 

1974.4.28 (일)전본부교회    

71-17 내가 내 손으로 장거리에 가 가지고 내 옷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나에게는 지극히 깍쟁이라구요. 개인으로서는 나를 위해 돈을 한푼도 쓰지 않는다구요. 내가 사면, 식구들을 위해 사는 거라구요. 식구를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구요. 


1970.6.4(목) 공적인 만물. 전본부교회. 제6회 참만물의 날 (음 5.1).

31-260 선생님은 어렸을 적에 공책을 쓸 때에는 줄이 쳐진 부분부터 쓰는 것이 아니라, 맨 꼭대기부터 썼습니다. 어떤 때는 한 장에 두 번씩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공책 한 권을 더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아껴써야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에 대해서는 착 깍쟁이입니다. 지금까지 양복 하나 선뜻 맞추어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옆에서 자꾸 하라고 해야 해 입었습니다. 자기가 선뜻 들어가서 해 입으면, 옷 해 입는 맛이 없습니다. 옆에서 자꾸 해 입으라고 하고, 맞추어 입으면, 옆에서도 칭찬을 하고 멋있다고 감상이라도 해 주어야 좋은 것입니다. 혼자 해 입고, 잘 되었냐고 물어보는 것은 스스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시한 일은 선생님은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생리가 아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970.8.11(화) 심정과 공적 생활. 부산 동명장 여관.

- 전국지구장 수양회.


33-160 선생님은 나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쓰는데는 깍쟁이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뭐 사주고 하는 데는 돈을 푹푹 쓰지만, 나를 위해서는 껌 하나도 안 삽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후식하라고 무엇을 갖다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후식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습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이 바지도 어머니가 해 줘서 입은 것입니다. 여름이 다 된 6월까지 겨울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겨울 양복 입고 있다고 해서 누가 통일교회 문선생이 겨율 양복을 입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1971.4.18(일) 구리 교문동 통일동산.

- 부활절 서울지구 합동 야외예배.


43-60 선생님은 나를 위해서는 깍쟁이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돈 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식당에 들어가 혼자 밥을 먹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먹고, 입는 것까지 간섭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