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1.2.12(일) 전본부교회. 모시고 싶은 아버지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장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눅 6:43-44, 47-49; 13:25-27)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인간이 이념의 세계를 찾아 절대자를 모시지 못하는 한, 슬픔은 연속됩니다.
인간이 이념의 세계를 찾아 절대자를 모시지 못하는 한 슬픔은 연속됩니다. 이념의 세계에는 인간이 아닌 절대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절대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 하나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고 우리는 부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으며 국가의 주권자를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 본래 우리 인간은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존재가 마음과 몸이 하나되지 못하고 부모와 하나되지 못하고 이념과 하나되지 못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가치하게 된 것은 타락의 보응입니다.
* 우리가 최후에 모셔야 할 분은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 절대자는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우리는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와 하나될 때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 절대자를 모시는 곳에서만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 우리 인간은 세상 것 가지고는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늘땅을 녹여 낼 수 있는 절대자를 모시는 곳에서만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들은 오늘도 내일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 절대자와 내적으로 인연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체인 동시에 생활의 주체요 생활의 주체인 동시에 이념의 주체입니다.
▶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이상 가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 인간을 수습하여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시나니 그것은 이 인류를 대하여 친히 아들이라 하고 딸이라 하겠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렇게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기필코 모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 우리가 영원히 모시고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분은 누구냐? 바로 영원무궁토록 존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인류가 타락이라는 서러운 운명에 봉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행복은 사람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위주로 한 것입니다. 반드시 창조주를 위주로 하여 행복을 주장하고 선의 이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에도 몸에도 창조주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에도, 여러분의 일생의 노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감각까지도 창조주와 더불어 인연되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어떠한 운명의 곡절에 처하더라도 그 곡절을 넘어 그 참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나의 아버지"하고 최후의 한마디를 남길 때까지 인간은 가야 합니다.
* 어떠한 운명의 곡절에 처하더라도 그 곡절을 넘어 그 참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역사적인 소원과 자기 생애의 소원의 심정을 품고서 "나의 아버지"하고 최후의 한마디를 남길 때까지 인간은 가야 합니다. 죽음길이 가로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갖고 계시며, 무한히 기쁜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갖고 계시며 무한히 기쁜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기쁘고 좋은 감정만 갖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슬프다면 인간들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슬픔의 심정을 갖고 계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과 핍박과 죽음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고통의 선물을 안겨 드렸습니다. 핍박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죽음을 선물로 안겨 드렸습니다.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으로부터 선의 선물, 기쁨의 선물, 만족의 선물, 희락의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죄는 인간이 지었는데 그 죄를 사해 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원통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지은 자가 사함받아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죄는 사람이 짓고 죄를 사해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해야 되다니 이는 무슨 연고인가. 부자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 깊은 곳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을 대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계시지는 못했습니다. 왜? 죄악된 이 땅이요 죄악의 침범을 받고 있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 복귀역사는 구원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섭리해 나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체를 갖추지 못한 무형의 신으로 계시기 때문에 실체를 가진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타락하여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인간들 앞에 실체적인 대표자로 보내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리하여 메시아를 중심 삼은 개인, 메시아를 중심 삼은 가정, 메시아를 중심 삼은 세계를 택해 나오는 것입니다.
▶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지금까지 기독교 신자들은 주님만 만나면 다 되는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났으면 어떻게 해야 되느뇨?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기에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간 뒤에는 주님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자신 앞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을 모셔야 할 끝날의 성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최고의 자리에 계십니다. 최고의 자리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感情이건 意識이건 全體가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를 위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를 모시는 자는 어떠한 자냐? 아버지를 통하여서 살고 아버지를 통하여서 죽고 아버지를 통하여서 행동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를 통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할 끝날의 성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밥을 먹으나 자나 깨나 어떠한 행동을 하거나 그 모든 것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해야 합니다. 이것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 아버지 앞에 효자가 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세밀한 분야까지 아버지와 같이 의논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아버지와 같이 하는 사람이 효자입니다.
* 하나님의 슬픔이 무엇이냐 할 때 하나님이 고통받을 때 같이 고통받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인류를 붙안고 나오시는 하나님은 혼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혼자 억울함을 당하고 혼자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같이 한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그 슬픔을 같이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고통이 심했고 슬픔이 심했습니다.
* 오늘 이 끝날 이 시대가 아무리 악하고 아무리 사망의 물결이 휩쓸어 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막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고통 가운데에서 뒤넘이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가치적인 존재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참다운 효자효녀가 될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 낙망하거나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품고 그런 자리에 처해 있는 아들딸을 권고하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셔야 되겠습니다. 모시는 데는 어디서부터 모셔야 되느냐? 기쁨의 자리에서 모실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슬픔을 붙안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자리에서부터 모셔야 됩니다.
* 우리는 기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제일 슬픈 자리, 제일 고통스러운 자리,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하나님과 더불어 苦痛당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慰勞를 받고 아들이라는 認定을 받아야만 영원한 이상세계가 이루어진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원무궁토록 아들로서 하늘땅 앞에 자랑하고 여러분 자신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을 참으로 모시는 자는 어떠한 자냐? 기쁨과 소망 가운데서 모시는 자가 아니라 고통 가운데에서 모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 주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붙들고 "내 아들아, 내 딸아, 내가 여기 있나니 참고 견디며 싸워라" 하고 위로해 주는 자입니다.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한 하나님을 영원한 내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011-097 하나님은 인류 앞에 끝날이 되면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豫告하셨습니다. 이 환란 시기는 6천 년 역사 노정에 있어서 하늘의 슬픈 곡절이 성도들에게 부딪치는 때입니다.
인간들의 因緣이 다 깨져 나가고 믿을 수 없는 環境에 부딪치는 때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올바로 산다 해도 그 양심으로 자기의 생애를 주장할 수 없는 때입니다.
* 그때는 소망이 흔들리는 때요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는 때요 믿고 따라 나가던 지도자가 흔들리는 때입니다. 주의는 물론 종교, 양심, 부모의 심정까지도 전부가 다 흔들리는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으셔야 되느냐? 그것은 참다운 하나님, 역사적으로 수고한 하나님과 동참했다고 하는 가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 그런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런 어려운 자리에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참다운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교회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어떠한 주의가 동요되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어떠한 주권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고 자기의 부모가 변한다고 슬퍼하지 말고 자기의 형제가 변해 떨어진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의지하고 믿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동요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泰然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動搖되지 않고 이 시간도 나를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기 직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셨지만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만나 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의 자리를 넘어서 만나려고 하셨습니다. 왜? 사망선까지 사탄이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선상을 넘어야 했습니다.
▶ 내 소원을 위해서 아버지를 부르지 말아야 됩니다.
* 오늘 우리들이 아버지와 상봉하려면 인간들이 피해 가는 그런 고통 이상의 자리에서 하늘을 모셔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慰勞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를 慰勞해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소원을 위해서 아버지를 부르지 말아야 됩니다. 아버지가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 전에 내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여, 이렇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대하더라도 "나는 당신 앞에 이렇게 되겠나이다" 하며 아버지 앞에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위로해 드려 봤습니까? 무엇을 달라고만 했습니다.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해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해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기도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후손, 죄지은 무리들은 복을 달라고만 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을 통하여 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한 몸이 患難을 겪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患難을 겪게 해 주시옵고, 내 몸이 찢김을 당하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찢기게 해 주시옵소서. 복과 영광은 당신이 받으시고 벌과 고통은 저에게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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