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6.7(일) 전본부교회. 기도와 생명
▶ 기도 중에
031-295 타락한 후손이기 때문에 복귀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 아버님을 상봉해야 할 자신을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 내가 내가 아닌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하겠사옵니다. 나는 누구일 것이냐? 부모를 통해 태어났지만 부모의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종족을 통하여 태어났지만 종족의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 오로지 세계를 넘어 아버지의 것이라는 이 엄청나고도 고귀한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저희들은 당신의 거룩한 존전에서 부족하고, 慘憺한 자신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희를 슬픔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칭찬과 기쁨으로 맞아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저희들이 외로운 환경에 휩싸여 들어가더라도 그 심정이 외로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옵니다.
* 생명이 살아 있는 순간에 아버님을 대한다고 할 수 있는 그 한때가 올 수 있게 하시옵소서.
* 세상이 "아니다" 하고,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적 기준을 타파하기 위해 저희들은 많은 눈물의 고비를 넘겼사옵니다. 서글프고 한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복귀의 노정을 가던 그때의 일들은 과거지사로 모두 흘러갔사옵니다.
그러나 남아진 우지 차제는 아버지의 사랑의 실체로서, 그런 결실체로서 남아져야 할 것이옵니다. 흘러가는 역사와 더불어 민족의 비판을 받아 쓰러지고 없어지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깨달아야 되겠사옵니다.
* 오늘 나는 나를 위한 나가 아닌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역사를 짊어져야 할 나요, 세계사를 개척해야 할 나요, 천정의 인연을 책임지고 증거해야 할 나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부족한 모습이지만 아버지여, 당신께 드리기 위한 예물로서 고이 바쳐쳐야 할 나라는 것을 깨닫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그런 나의 손길은 당신의 손길과 같이 거룩한 손길이 되어야 하겠고 나의 용모는 당신의 기쁨을 헤아릴 수 있는 용모가 되어야 하겠으며 나의 태도는 당신이 천년만년 자랑할 수 있는 태도가 되어야 하겠사옵니다.
* 저희들은 망하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의 하는 일을 구경하고 감상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수와 싸워야만 되겠습니다. 그들을 치고, 그들과 원수가 되어야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악을 용서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악에 속해 있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악을 제거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뜻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 참은 영원과 같이 하는 것이요, 참은 영원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참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말을 해야 되겠습니다. 참된 오관을 통하여 느끼는 감정 전체가 아버지 앞에 바쳐드릴 수 있는 참된 제물이 되어야겠습니다.
* 인간은 아버지의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에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사옵니다.
* 아버지와 상관 없는 만남은 쓸 데 없는 것이옵니다. 매일 습관처럼 출석하는 것은 아버지 앞에 보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 苦海
- 타락한 세계를 거쳐 나가야 하는 우리들은 지극히 불쌍한 자가 아닐 수 없다.
031-303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 즉 타락권이 우리의 생활권내에, 우리의 세계 앞에 전개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031-304 이 타락한 세계를 거쳐 나가야 하는 우리들은 지극히 불쌍한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타락권을 벗어나려는 입장에 설 때, 미래의 소망을 향해서 현실을 타개해 나가려는 입장에 서게 될 때 나타나는 모든 환경은 그와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 앞에 편이 될 수 없고 협조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길을 가야 할 인생행로이기 때문에 이것을 보편적으로 苦海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슬픈 바다요 외로운 바다요 처량한 바다요 무서운 바다입니다.
* 이러한 고해의 길을 가려는 한 사람이 있다 하고 그 사람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苦海와 같은 환경에서 배를 타고 출항하는 그의 앞에는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수많은 생명을 삼키던 怒濤가 가로막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一葉片舟와 같은 형상을 지닌 한 개인의 생명체가 있다고 할 때 그가 가는 길이 얼마나 고독하고 처량하고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러한 길을 알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 일을 천 번 만 번 말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일이 말려 끝이 날 일이냐? 말릴래야 말릴 수도 없는 입장에 선 것이 타락한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아는 사람의 배후에는 그러한 길을 떠나려 하는 사람에게 "어서 가라"고 그가 가는 길을 축복하기 전에 염려의 마음과 걱정의 마음과 아타까운 마음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타락된 이 세계, 칠흑같이 어두운 암흑 가운데 사로잡힌 이 천지, 방향도 없고 갈 표준도 없는 인류의 행로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르쳐 줄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 있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지금까지 이 둘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과 서러움과 슬픔과 고충이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 인간의 부모로서,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서 방향을 제시하며 명령하게 될 때 하나님은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승리할 줄 알고, 기필코 갈 줄 알고 우리에게 명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이 되었느냐?
*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가라고 명령했는데 그 사람이 그 길을 못 갔을 때에는 세 사람을 동원해야 하고, 그 세 사람마저 못 갈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라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한번 하려고 했던 것을 실패하게 되면 또 해야 되고 그래도 실패하면 또다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하늘이 또 명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절대적인 위치에서 절대를 향하여 명령할 수 있는 때는 한 번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절대적이기 때문에 재차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인간이 실천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루어야 합니다.
031-306 한 사람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그 한 사람으로서 사명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책임지어진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한때 한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묵묵히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거듭해 역사를 끌고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역사시대의 어려운 환경, 공포의 환경을 타파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이 있었느냐? 그러한 참다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참은 둘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 환경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신념이 서 있느냐?
- 절대적인 신앙과 절대적인 실천.
* 여러분들은 고독한 항해를 떠나는 일엽편주와 같은 입니다. 그러기에 각자의 환경에 따라 노도도 만날 것이고 폭풍도 만날 것입니다.
그런 환경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신념이 서 있느냐? 어떤 항구를 향하여 간다 하는 목적관이 뚜렷하냐? 그 환경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 다시 말하면 몰아치는 모든 슬픔의 여건들, 모든 사망의 여건들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과 신념을 갖고 있느냐?
그러기에 나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다가올 것이냐? 또 내가 그 위협을 제거하고 일어설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서 이것을 극복하고 돌파하고도 남을 수 있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찬양할 수 있는 그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해 봤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번 믿었으면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라. 그리고 한번 결심하고 한번 말한 것은 절대적으로 실천하라,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가는 신앙세계가 인류 앞에 제시했던 내용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절대적인 신앙과 절대적인 실천으로서만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가는 과정에서 절망하게 되면 목적의 세계, 소망의 때를 맞지 못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환경을 극복하지 않으면 소망의 한때를 맞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에 도달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신앙과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사망의 물결이 휘몰아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앞을 바라보면서 여유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최후의 순간을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촌각 중의 촌각을 다투는 자리에서 생명을 걸고 나서는 모범적인 실천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어려운 고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가능성마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 하나님이 틀림없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필요한 것이 기도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
* 이러한 입장에 있는 여러분은 하나님이 틀림없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필요한 것이 기도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기서의 기도는 습관적으로 경을 읽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판정짓고 판가리하기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내 생명의 맥박이 연장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해결의 요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순간을 걸어 놓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담판기도를 해 보았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각자가 남겨야 할 중대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 "참이 있었다. 내 생명보다 귀한 그 무엇을 남겼다"
- 과거의 생활이 주는 생활이었으면 죽음길에도 공포가 없을 것이다.
031-308 이 땅 위에 왔다가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는 최후의 자리에서 과거를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과거의 모든 사실들이 영상으로 지나갈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생명체를 가지고 지금까지 인연된 환경과 남겨 놓은 사연 등 지난 날의 모든 것이 일생의 최후의 순간에 자기의 마음에 영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참이 있었다. 내 생명보다 귀한 그 무엇을 남겼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비록 이 땅 위에 왔다가 가더라도 보람 있는 한때를 남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왔다 가는 이 인생행로가 행인과 같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모든 과거의 사연을 회상해 볼 때, 그 모든 사연이 머리를 흔들며 회상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졌으면, 그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자기 얼굴에 환희가 넘치며 자기의 모든 문제가 이상에 잠길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도 그에게는 위로의 한 장면으로 장식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이 공포의 순간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을 남겼다념 그의 과거도 죽지 않은 것이요 현실도 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과거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민족이 따라올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세계 만민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인연을 남긴 사람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선하였느냐 참되었느냐,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참과 선은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남에게서 결과를 맺게 하든가 남에 의해서 시작되어 나에게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야만 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리에서 천지의 모든 존재는 주고받는 인연을 거쳐야 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생활이 주는 생활이었으면 죽음길에도 공포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었고 남을 위해 희생했으며 참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눈물도 남으로 말미암아 흘렸고 내 생명도 남으로 말미암아 투입했고 내 소원도 남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내 맥박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생명력을 끌어모아 남을 위해서 투입했다고 할진대는 그 과거는 빛날 수 있는 과거일 것입니다.
* 양심의 가책이란 자아를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생애를 반평생 이상 남겼으면 그것이 자기를 절반 이상 꽁꽁 얽어맬 것입니다.
이러한 생애를 남겼다면 최후의 운명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자리에 설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생애의 도표가 선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그려져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슬픔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와 같은 인생행로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인륜도덕도 그런 길을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남을 위해서 가는 길이 쉬운 길이냐? 쉽지 않다.
031-310 남을 위해서 가는 길이 쉬운 길이냐?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가는 길도 쉽지 않거늘 남을 위해 가는 길이 쉽겠습니까? 이건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타락인간이 그냥 그대로 간다면 타락세계에서 그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자기를 위해 가는 생활을 해서는 타락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타락한 환경권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 삼고 살다가는 그냥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몸부림을 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革命을 해야 됩니다. 鬪爭을 해 야 됩니다.
거기에는 갖은 여건들이 개재될 것입니다. 그 일들은 고개를 끄떡이며, 환영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이 길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고 몸을 비틀면서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길은 고통의 길이요, 슬픔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타락권내의 환경은 모순된 환경입니다. 모순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그 모순된 환경을 타개해야 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인간들은 자기를 위주로 하는 생활에서 떠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과 타협하고 거래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상의 境界線을 突破해 가지고 넘어선 경지에서부터 그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031-312 이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한 순간을 어떻게 생활권내에서 모색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이 방법을 찾기 위하여 연구하며 찾아 나서는 길이 도의 길인 것입니다.
이 도의 길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을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그는 얼마나 심각할 것이냐? 아무렇게나 가고 오는 걸음이 아닐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의 고개를 넘는 걸음일 것입니다.
그의 실체는 이러한 절박한 심정으로 고개를 넘기 위한 결의에 찬 마음 자세를 가지고 행동하는 실체일 것입니다.
031-314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순간은 평상시와 같은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을 것이며 온 몸에는 골수에서 솟아나는 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힘을 주더라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상의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의 짧은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말은 뼛골에서 우러나온 최후의 음성이 아니었겠습니까?
"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하는 그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정성을 다 들이면서 아버지와의 인연을 찾아온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고 간곡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배후에 숨겨진 실낱 같은 소망의 한 빛이 바로 마음에서 솟아난 울부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는 그런 경지를 필히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거기에서 잡아지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절대로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번 잡은 것은 천년만년 놓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이 입산수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 놀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들이기 위해서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성은 얼마만큼 들이느냐? 그 정성의 한계점이 어디냐? 그것은 먼저 無我之境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무아경지는 정상적인 자리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밑의 골짜기에 떨어진 입장에 서 가지고 어려운 세상이 짐을 졌다면 누구보다도 큰 짐을 졌고, 불쌍하다면 최고로 불쌍한 자리에서 최고로 절박감을 느끼는 그러한 자리에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탐지해 나가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031-316 그러면 우리가 공포에 휩싸인 사망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사망권 안에서 노력하고 뒤로 떨어지고 내가 이러고 저러고 하는 혹은 더 깊은 환경의 골짜기에 들어가더라도 하나님과의 인연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줄을 붙들어 줄 수 있는 주인이 있고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 있고 또 나를 붙들고 어려움을 극복해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을 가져야 합니다.
031-318 하나님을 위해 죽는 길이 있다면 죽어도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 길이 있다면 내 생명을 끊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하면서 느꼈던 안팎의 시련을 뒤돌아보게 될 때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 가치 있는 자가 된다면 죽음길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 그러기에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해야 합니다. 절대와 통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자리는 단 하나입니다.
사탄세계와 하늘세계가 하나되려면 먼저 교차되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늘세계를 넘어가려면 현실의 인연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완성하면 기도가 필요 없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패들, 이거 참 틀려 먹었다는 거예요.
말이야 잘 하지, 완성하면 기도가 필요 없다고.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완성의 기준은 국가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소원을 성취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유대교와 합해 가지고 세계의 중심 국가로 등장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런 자리가 완성의 자리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개인 완성을 하면 개인으로는 설 수가 있지만 가정의 사탄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가정이 완성하면 종족 사탄이 남아 있고 종족 완성을 이루면 민족 사탄이 남아 있고 민족 완성을 이루면 국가적인 사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통일교회에 들어오자마자 다 완성이에요? 완성하려면 절실히 기도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기도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선생님은 담판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얼마나 절박한 때인지 모를 것입니다. 복귀섭리의 첨단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뼛골에서 우러나오는 그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한 때인 것을 절감했다면 그다음엔 멍청하게 세월을 보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담판기도를 해야 합니다.
잠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무가 잘 자라려면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지려면 아무도 모르는 괴로움을 겪어야 되고 수고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031-320 도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죽음길을 가야 합니다. 죽어서 할 고생을 살아서 탕감하려니 그런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억천만년 고생할 것을 이 땅 위에서 생전에 축소시켜 가지고 탕감해 버리자는 겁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돼요. 이처럼 도의 길은 영원히 수난의 노정을 가야 하는 것을 이 땅 위에서 수난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탕감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감이라는 말 알지요? 탕감에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조건, 그 조건이 없으면 여러분이 구원받겠어요?
여러분은 조건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니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하긴 무엇을 자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축복도 조건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길을 넘어가야 됩니다. 여기는 사망세계이기 때문에 이 사망권을 전부 끊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것은 전부 사탄과 가까운 것입니다. 전부 반대입니다.
031-322 자기의 일을 위해서 자기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왜 망하느냐? 하나님은 그런 일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일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올라가 가지고 그 일과 하나되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새로운 시대에 보냄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031-324 여러분이 옛날같이 심각한 자리에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럴 자신을 갖고 있습니다.
* 하나님과 여러분은 원래 부자관계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양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아들이 하는 것은 아버지가 하는 것이며 아버지가 하는 것은 아들이 하는 것입니다. 같이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이 아들의 것이요 아들의 것이 아버지의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무서운 것은 이러한 부자의 인연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공짜로 입잠 벌리고 받아먹으려고 그러지요?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들딸이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짜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안 되어야 겠어요 되어야 겠어요? 아들딸은 누구를 닮느냐? 아버지 어머니를 닮습니다. 부모를 닮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와 함께 사느냐? 부모와 함께 삽니다.
여러분은 부모와 천리만리 떨어져 있어도 부모를 닮아야 됩니다. 여러분, 닮았어요?
031-326 내가 지금까지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지만 하나님을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저를 고생시킵니까? 축복해 주신다고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생님하고 얼마나 약속을 많이 했겠어요? 얼마나 많이 했는 줄 알아요? 수십만 번 약속을 했습니다. "너는 요렇게 될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때에 내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증거 자료를 갖다가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면서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이 속았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속인 종자와 인연 맺은 타락권내의 미스터 문이니 별 도리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선생님을 염려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믿지 못할까봐 별의별 사람을 다 선생님 앞에 증거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나오면서 이제까지 고문을 당하고 별의별 서러운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가는 사람 즉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흘려 보지 못했던 새로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내 생애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흘려 보지 못한 새로운 눈물을 흘리고 죽자"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만한 심정을 가지고 죽었느냐? 선생님은 그 이상의 심정을 가짐으로써 하나님께서 "너는 누구보다 낫다." 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죽은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는 천년만년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죽더라도 그러한 심정과 내용을 갖고 그러한 자리에서 죽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매를 맞아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이보다 더 슬픈 눈물을 짓고 안타까와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은 역사시대의 그 누구에게보다도 나를 통하여 애석한 사연을 남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것을 필생의 소원으로 삼고 나왔습니다.
* 나는 복귀노정을 다 알고 하나님에게 "당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닙니까?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는 기도를 합니다.
시시하게 지나간 것에 대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같아하실 수 있는 이 길을 지켜 나갈 것입니다. 10년 아니 백년 혹은 천년 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을 이 시대에 어떻게 인연을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어떻게 그때를 위해서 피땀 흘리고 그때를 위해서 어떻게 수고의 조건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선생님이 모색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나온 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선생ㄴ임이 여러분에게 "가자!" 하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두고 보라는 겁니다.
자기의 욕심대로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참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욕심장이의 정성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031-328 한 나라를 놓고 섭리하는 데 있어서도 비밀이 많습니다. 조그마한 가정에도 말 못할 비밀이 있습니다. 하물며 천지를 복귀하기 위한 노정에 비밀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앞에 한마디도 털어 놓을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을 털어 놓으면 그 누구도 이 길을 가겠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한꺼번에 털어 놓지 못하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선생님을 따라 나오면서 이렇고 저렇고 하며 말을 해 가지고 지금까지 선생님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욕먹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를 어떻게 통일시키느냐를 생각하며, 그 때를 위해 하나님과 담판하면서 기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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