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김봉철 선생

true2020 2016. 5. 20. 16:22

▣ 하늘나라 청지기 金鳳哲

- 1932.7 함남 북청에서 출생

- 1955.4 통일교회 입교

- 1972.12 요한 웨슬리 신학본과 졸

 

* 1954년 가을 어느 날 지나가는 길가 교회(부산)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에 끌려 당돌하게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청한 것이 통일교회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동기다. 

 

* 부산에서의 생활도 몇 달 못 가서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 서울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는 주일. ···뜻은 잘 모르지만 선생님이 우시면 같이 울고, 선생님이 웃으시면 같이 웃었다.

 

* 1957년 7월 20일, 특별 40일 하계 전도가 시작되었다. ···"전도 나갈 사람 손들어 봐!"라고 하시는 선생님 말씀에 나도 번쩍 손을 들었다.

 

이요한 목사님의 장님인 이대위 군과 짝이 되어 경북 영덕으로 떠났다. ···결과적으로 한 사람의 식구도 뜻 앞에 찾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40일간 하루도 빠지지 않으시고 선생님께서 몽시 가운데 나타나시어 "의심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고 끝까지 따르라"고 하시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 선생님은 전도 나간 전 식구들에게 직접 싸인하신 원리해설을 보내 주셨다. 

 

* 1958년 4월 부산교회, 어느 집회에 말씀이 끝난 다음 "봉철 씨, 통영에 가지 않겠는가?"라고 이요한 목사님께서 말씀이 계시기에 어리둥절했다. "누가 기도하고 설교하라고 하는 줄 아는가? 집이 비었으니 집 지키러 가라는 거야."    

 

* 1958년 7월 그토록 뵙고 싶었던 선생님께서 특별 40일 순회 도중 충무에 오셨다. ···미륵불이 환생하는 곳이라는 전설이 담긴 미륵산 彌勒寺에서 며칠 머무시다가 진주로 떠나셨다.

 

선생님께서 어린 식구들에게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으셨다. 대부분 "잘 모릅니다"고 했다. 다시 선생님께서 "아무에게도 내가 누군지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 747 지프차로 떠나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닦으며 말 없는 충성을 다짐했다.

 

* 1959년 1월 협회 제1차 40일 수련회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본부로 갔다.

 

* 10일 만에 한 번씩 치르는 4번의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말씀은 유효원 협회장님과 안창성 선생께서 담당해 주셨다. 틈만 있으면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격려해 주셨다.

 

* 40일 수련이 끝날 무렵 전 수련생 70여 명이 선생님과 서울 남산으로 갔다. 어디를 가시나 먼저 말씀을 내리신다. ···말씀을 끝마치고 친히 노래도 부르셨다. 유 협회장님도 부르셨다. "그다음에는 누가 노래 부를 사람이 없는가?" 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어디서 나온 용기였는지 나도 모르겠다. ···노래 제목은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구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눈물 어린 인생 고개 몇 고개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쓰린 하소 적어 가면서  오늘 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1절을 부르고 앉으려니 2절을 부르라 하셨다. 또다시 부르라 하시어 3번을 계속 불렀다.

 

* 1962.6.4. 72가정의 일원으로 과분하게 축복을 받았다. 상경하라는 본부의 지시대로 청파동으로 갔다. 주시는 말씀과 지승도 할머니의 영계에서 바라는 축복받을 자격에 대한 말씀을 듣고 보니 자신이 없었다.

 

* 김진경 씨와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은사 후의 시험이라고 군에서 앓았던 신장염이 재발되어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었다.

 

* 선생님께서 전 축복가정에게 임지를 배정해 주셨는데 나의 임지는 전북 김제라고 했다.  ···내 얼굴을 본 식구들은 "송장을 치르게 되나 보다" 하고 걱정도 되고 겁이 났다고 했다. 대수술을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아 몰골이 보기 딱했던 모양이다.

 

* 지금도 이상헌 선생님은 나만 보면 "봉철 씨는 기적을 먹고 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다. 

 

* 선생님께서 내가 제일 두려운 말씀이 있다면 "하늘이 나는 너를 모른다"는 것이라 하셨다.

 

* 1970년 12월 부인 대원 동원 때의 말씀에서 "금번 부인들 동원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없다"고 하셨다. 3년 전도 출발 전에 임신한 아기가 태어나게 되어 얼마간 서울에서 지냈다. 애기 낳은 지 100일이 가깝지만 갓난아기를 맡길 적당한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하나님께 담판 기도를 했다. "3일 후까지 애기 볼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내가 애기를 업고 안고 설교와 강의를 하게 됩니다. 하늘의 뜻이면 당신의 딸을 임지로 보내겠습니다"고 했다.

 

하늘은 기도를 들어주셨다. 입교한 지 얼마 안 된 유정희 씨가 교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정말 감사하고 기뻤다. 애기 엄마도 마음놓고, 산청 임지를 향해 떠났다. 

 

젖 달라고 보채는 원섭이에게 젖 대신 우유를 먹이면서 엄마 대신 고맙게 잘 키워 주었다. 엄마가 3년 전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선영이와 원섭이는 엄마에게 가지 않으려고 한다. 낳은 정도 크지만 키운 정 또한 못지않음을 알게 되었다.   

 

1970.8.11(화) 전국 지구장 수양회. 부산 동명장 여관.

033-162 그러니 여러분 개인을 중심 삼고 다시 한 번 비판해 봐야 합니다. 공과 사를 중심 삼고 결혼 전과 결혼 후에 있어서의 차이가 뜻적인 입장에서 전진할 수 있는 내용만 있으면 좋겠지만 여기에는 틀림없이 후퇴할 수 있는 내용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체와 내 가정이 보다 차원이 높은 공적인 기준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낮은 기준에 끌려 들어가는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정은 빨리 혁명을 해야 합니다. 그런 가정은 생이별을 해야 됩니다.

 

* 김봉철! 결혼하고 나니까 어떻든가? 결혼하고 나서 뜻길을 가는 데 지장이 있었나? 지장이 없었어? 그럼 보탬이 되었나? 그래, 결혼하기 전보다 나아? 부담은 안 느껴?

 

부부가 한 마음이 되면 繁殖이 벌어지게 됩니다. 뜻을 중심 삼고 부부가 하나되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디 순회를 할 때에 아내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목욕재계하고 흰옷을 입고 기도하고, 정성 들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에는 살풍이 볼 수 없습니다. 그 가정은 항상 봄철과 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