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鐘九 … 내 젊음 뜻을 위해 바치리.
○ 흥진님 메시지 중에 - 100일 수련
참부모님 노정에 대해서 박종구 회장이 강의를 하게 됩니다.
참부모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기독교권이 외면하게 되고 갖은 고통과 서러움을 겪게 되셨고 흥남 감옥소에서 죽음의 자리 가운데로 내몰리셨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위로하시고 출감 후에 하나님께서 내려 주실 축복에 감사하며 당당하게 나아가시는 모습,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극복하시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시면서 하나하나 하늘의 비밀과 사탄의 정체를 밝히시며 원리를 찾으시는 장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시겠다며 손수 제자들을 찾으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장면, 역사적인 성혼식의 장면, 현재 성약시대 섭리 역사를 진행하시는 단계적인 장면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영인 수련생들은 하나님께서 지상에 참부모님을 보내주셔서 지상천국을 만드시고자 하는 깊으신 은사와 사랑 앞에 감사와 함께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던 것을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 1939.2.9 충남 서천 비인면 칠지리 출생
* 1956.1.20 통일교회 입교
* 1961.5.15 최윤정 씨(춘천, 교사)와 36 가정 축복
* 1961.5.16 5.16 혁명.
-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와 육사 8기생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 3년간 군정통치(국가재건 최고회의)
* 1년 6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학보 제대라는 영예와 상장을 안고 제대했다.
* 1961.6.1 중앙대학교 법학대학 3년 계몽운동을 위해 휴학.
* 1963.3.18 충주지역 8대 지역장
* 1964.3.1 충북 성화 학원 설립
* 1964.6.1 충주지역 기대장
* 1966.9.5 충북지구 순회사
* 1971.11.1 종로 교역장
* 1972.9.1 경북 교구장
* 1974.5.11 협회 전도부장. 세계구국대회 때 동원부장.
"이 대회에 120만 명을 모으지 못하면 한강물에 빠져 죽겠다"는 심정으로 뛰었다.
* 1976.3.18 세계 순회사
* 1978.12.20 미국 카프 책임자
* 1981.9.10 독일 프랑크푸르트 반핵 데모 저지 데모
* 1982.4.3 승화
▶ 간증
* 3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 생후 100일 만에 전북 군산으로 이사,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3살 때 아버지(박갑윤)를 여의는 불운을 겪었다. 그래서 20살부터 靑孀寡婦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김옥희) 슬하에서 살다 보니,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과 노부모를 모시고, 어려운 가사를 꾸려 나가셨다.
* 7살 난 형과 8개월밖에 되지 않은 유복아(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태어난 자식) 그리고 3살짜리 나를 데리고 삯바느질이나 남의 집 빨래를 해 주는 등 닥치는 대로 험한 일을 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아 용하게도 살아 나오셨다.
* 이때부터 가난은 숙명처럼 나의 주위를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시장을 돌아다니며 엿을 팔기도 했고 다방을 찾아다니며 양담배를 팔기도 했다. 그리고 이익이 남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가져다가 팔았다.
* 1952.10.3(13세) 나를 애처롭게 생각한 외삼촌이 군산 상고 使喚(관청이나 회사,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이듬해 봄, 나는 그 학교 야간부에 적을 걸고 공부를 병행하였다. 학교 선생님들은 재빠르게 일 잘하는 나를 가리켜 "쌕새기"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 사무실 청소나, 시험지 프린트는 물론 선생님들이 지시하는 잔심부름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일은 수업시간에 맞추어 어김없이 종을 치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종과 마침 종을 자그마치 6년간 치게 되었다.
나는 종 치기와 더불어 중 고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형님을 중학교에 보낼 때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재봉틀을 팔아서 입학시킨 뒤 어두운 등잔 밑에서 손으로 삯바느질을 하셔야 했던 때를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혼자 중 고등학교를 마치게 되었던 것은 어머니에게는 물론 나에게도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1956.1.20 (17살) 군산상고 2학년 재학 시 강의홍 여사의 인도로 군산교회에 入敎했다. 하나님께서 비로소 나를 부르신 것이다.
* 1960.7.20 (21살) 하계 전도 당시에는 장항에 파송되어 전도활동을 하게 됐다. 나는 행장을 차리면서 "나도야 간다. 젊은 힘 힘찬 맥박의 고동을 느끼며 저 한없는 죄악의 씨를 멸하러 20대 젊은 나도야 간다"라고 시인처럼 되뇌었다.
하오 5시 전주를 출발하여 1시간 20분 후인 전도지 장항에 도착했다. 장항! 그 얼마나 고대하였던 곳인가! 그러나 온 강산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제 사탄의 일선에 나 혼자만이, 하늘의 말씀을 지닌 한 인간이 서 있는 것이다. 임시로 外三寸 宅에 숙소를 정하고 아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씀과 아버지의 심정을 전했다.
* 임지에서 맞이한 첫 주일에는 장로교회를 찾아가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기막힌 예배였다. 그러한 분위기에도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치 회칠한 무덤 같은 곳이었다.
* 1960.7.27 전도가 잘 되지 않아, 정성을 들여야 되겠다 생각해서 금식을 시작했다. 금식을 하면서 8.1부터 원리 선포에 주력하기로 했다.
우선 "원리 선포"라는 타이틀 아래 전단지를 만들어 시내 곳곳에 뿌리고 포스터를 붙였다. 강의 장소가 여의치 않아 사거리를 택했다. 드디어 8월 1일 강의 준비를 끝내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며 기도를 올렸다. 어찌 된 일인지 사거리에 나와 불을 켜고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동네의 건달 녀석들만 모여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였다. 나 자신도 모르게 평소의 몇백 배의 큰 힘이 솟아올랐다. "아무도 없어도 좋다. 예수님의 제자도 어부, 세리가 아니었더냐? 좋다. 외쳐 보자" 하는 마음이 솟구쳤고 마침내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기 통일교회에서 온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단으로 몰리고 있는 통일교회 이단자의 괴수가 이 자리에 나왔으니 여기에 오십시오!" "통일교회의 괴수가 왔으니 여기에 오십시오"라고,
나는 긴장한 가운데서 20분 정도 외치니 목이 쉬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드디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금방 100여 명의 사람들이 사거리를 꽉 메웠다. 나는 그들을 대상으로 통일교회를 간단히 소개한 다음 서론과 창조 원리 일부를 강의했다.
1시간 30분가량 강의를 하고 집에 돌아오니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렇게 며칠 동안 노상 강의를 계속했다. 이후에는 기성교회 교인들을 상대로 동리마다 다니며 말씀을 전했다. 또 강의를 했다.
* 8월 16일 판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 뵙고 나니 많은 힘이 생겼다. 돌아와서는 전도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했다. 월포 주민 50명을 모아 놓고 "통일교회란 무엇이냐?"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그들 가운데는 통일교회를 당장 세우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 어느덧 40일이 지났다. 여러 가지 아쉬움도 남았다. 인연 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난 후에 하오 8시 차로 군산에 도착했다. 매주 토요일에 장항에 가기로 약속했다.
* 1961.5.15 청파동 교회에서 성혼식을 마친 후 돈암동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 우리의 첫날밤이 밝기도 전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 우리들의 첫날밤은 불을 끌 필요가 없었다. "윤정 씨 내일은 예산으로 내려가야지?" 나는 첫날밤부터 "내일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 "내려가야죠···"라고 아내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 아내는 다음날로 전에 하던 계몽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예산군 덕산면으로 내려갔고 나는 40일간의 순회 길을 떠났다.
*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가난을, 이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없을까 하고 얼마나 많은 나날을 번민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얻은 결론, 그것은 무지에서의 해방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이 무지를 타개하는 데 앞장서리라 다짐했다.
* 그러던 중, 군에 입대한 후, 1년 6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학보 제대"라는 영예와 사단장의 상장을 안고 제대했다. 제대 후 대학 2학기 복교하기까지 약 9개월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복교하기 앞서 먼저 계몽사업부터 시작할 치비를 차렸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다. 8년 간이란 긴 세월 동안 숱한 각고와 모멸로 얼룩진 고학을 해 온 나로서는 그 향학의 문을 미련 없이 닫는다는 게 여간 어렵고,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불과 졸업을 1년을 앞두고 휴학을 했으니 이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결정을 했으나 어머니와 형님을 설득시키는 일이 큰 문제였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서 어머니에게 "서울에 올라가 공부할 터이니 3만 원만 마련해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3만 원은 큰돈이었다.
* 나는 이렇게 어머니를 속이고 형님이 마련해 준 돈을 들고 집을 나섰다.
* 1963.3.17 나는 학자금으로 타낸 3만 원을 들고 충주로 향했다. 그동안 예산군에서 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아내는 이미 2개월 전에 충주로 거처를 옮겨 역시 계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성서동 105번지 5평 남짓한 2층 방 하나를 전세로 얻어 충주성화학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 "한문과 영어를 무료로 가르친다"는 모집 광고가 나붙자 충주 제사공장 아가씨들 30여 명이 모여들었다. 성인반을 만들어 나는 몰려든 이들에게 한문과 영어를 가르쳤고 아내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용산동에 빵 가게를 차렸다.
그러나 이들을 수용할 장소가 큰 문제였다. 그래서 2만 원짜리 전세로 얻은 이 2층 살림방을 교실로 겸하여 쓰게 되자 집주인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11시가 되는데 밤늦게까지 시끄럽다고 다른 데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다. "재수가 없으니 별것들이 와서 속을 썩인다"는 것이었다. 결국 집주인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집을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을 사려면 최소한 10여 만 원이 있어야 했다.
* 그러나 한 아주머니의 소개로 방 2개 부엌이 있는 집을 4만 원에 구입하게 되었다. 계약금으로 2만 원을 주고 1개월 후에 2만 원을 주기로 하고 다음날 이사하기로 했다. 나머지 돈을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수업하기도 곤란한 집이었다. 그래서 급기야 토담집이나마 새로 짓기로 했다.
* 시작만 하면 무슨 결과가 나겠지 하는 단순한 계산에서 古家를 허물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돈을 마련할 길은 군산에 있는 고향 집에 가서 억지를 써서라도 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철면피하게도 군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군산에 도착은 했어도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 때는 졸업장을 타 가지고 온다고 했는데 이렇게 초췌한 몰골로 어떻게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러나 어머니를 만나 뵙고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나의 얘기를 들으신 어머님은 몹시 놀라시는 것이었다.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학원을 지어야 하니 돈 5만 원만 달라고 생떼를 쓰다시피 했다. 어머니와 형님은 다시는 주지 않겠다고 했다.
* 의견 충돌만 벌이다 결국 나는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갈 곳이라고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데까지 무작정 걸었다.
* 나는 문득 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학생들이 생각났다.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새삼스럽게 다시금 결심을 굳혔다. 나는 다시 미쳐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 나는 황혼 녘에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만 계시고 형님은 밤일을 나가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우셨는지 눈두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날 밤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곤히 잠들고 계셨다. "어머니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니, 형님! 이놈을 용서하십시오" 하며 나는 숨을 죽이고, 자리를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가난하지 않아야 할 내 후손들을 위하여 "나는 기꺼이 도둑이 되리라"고 마음먹고, 장롱의 서랍을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장롱 속을 뒤졌다.
가난한 집에 거액의 돈이 있으리란 계산은 애당초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형님의 대화에서 언뜻 비료값에 대한 얘기를 들은지라 혹시나 하는 射倖心사행심(요행을 노리는 마음)에서였다. 떨리는 손으로 장롱 속을 뒤졌다. 그리고 신문지에 싸여 있는 돈뭉치를 들고 집을 뛰쳐나와 월명산을 향해 허둥지둥 치달았다.
움푹한 구릉에 앉아 4만 원을 안고 흐느꼈다. 너무 분하고 서러움이 북받쳤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돈을 마련했다는 안도감은 어쩔 줄을 몰랐다.
* 나는 산을 내려와 정류장으로 향했다. 차표를 끊는데, "저놈 잡아라!"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종구야!" 하는 어머니의 애끊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막 개찰을 하려고 하는데 "종구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나는 꿈이길 바랐다.
* 나는 달아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났지만 마치 석고처럼 굳어져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시더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시며 "종구야! 가거라. 네 뜻이 정히 그렇다면 해 볼 수 없지. 뉘라서 그 뜻을 막겠느냐. 이왕 하려면 멋지게 해라" 고 하면서 오히려 격려를 해 주시는 것이었다.
* 나는 노모의 주름진 모습을 보며 "어머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머니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앞에 부끄럽지 않은 종구가 되겠습니다" 라고 거듭 다짐했다.
* 충주에 도착. 가져온 돈으로 잔금 2만 원을 치르고 남은 2만 원으로 15평짜리 토담집을 짓고자 했다. 토담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은 2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내는 빵가게를 팔자고 했다.
* 다음날부터 나는 집 짓는 작업에 들어갔고 아내는 빵바구니를 들고 장사를 나갔다. 윤선생과 권선생이 나를 도와 자갈과 모레를 날랐다. 기초 공사가 끝나자 흙벽돌을 쌓아야 했다.
흙벽돌 집일망정 그 의의가 다르니 "피를 뽑아 판 돈으로 흙벽돌을 사자"는 의견에 합의했다. 모두 300g씩 뽑아 그 값으로 2천 원을 받은 후 흙벽돌을 샀다.
* 비를 피해 가며 담을 쌓았기 때문에 자그만치 14일 걸려서 벽돌쌓기를 끝냈고 다시금 기와를 얹을 지붕을 급조했다. 그런데… 대들보가 부러지며 지붕이 폭삭 주저앉아 버리고 만 것이다. 또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 허리띠를 졸라메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결국 70일 만인 8월 13일에야 완공을 보게 되었다.
* 집을 지으면서 꾼 돈 2만 원 때문에 빚장이 아주머니가 매일 찾아와 돈을 갚으라고 야단이었다. 더구나 아내는 해산일이 가까워 왔다.
그래서 한 푼이라도 모아야겠다고 생각하여 도로포장 공사장으로 나갔다. 하루 임금은 100원이었다. 그렇게 해서 얼마간 모은 돈으로 애기 받을 준비를 했다. 解産期가 다 된 아내는 이를 악물고 기를 써서 아들을 낳았다.
나의 등과 이마엔 진땀이 흘러 내렸다. 물론 내가 아기를 받아냈다. 아기를 목욕시키면서 나는 아빠가 된 감격에 젖었다.
* 1964년에는 신문에 학생을 모집 광고를 냈으나 마감일에 응모한 수는 겨우 6명뿐이었다. 우리 셋은 10일에 걸쳐 6백 호를 방문했다. 2월 15일 그때까지 접수된 인원만도 600여 명, 시험당일 540명이 몰려왔다.
15평 교실에 그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 300명을 떨어뜨리고 240명을 뽑아야 했다.
* 아내는 빵 장사를 하면서 선생들과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졌다. 하루에 두 끼씩 식사를 하니장사가 잘 되지 않는 날이면 굶기가 일쑤였다. 그것도 보리죽으로 연명하다 보니 낮 수업 8시간, 밤 수업 4시간을 하고 나면 기진맥진했다.
* 하기 방학 때는 교실 증축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상경하여 장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자원한 선생과 학생 모두 21명이 출발했다. 가는 날까지 차비를 구할 수 없어,도보행군을 결행했다.
* 1964년 7월 25일 0시 사업대원들은 340리 되는 서울을 향해 우렁찬 출발을 고했다. 이날 밤 12시까지 목표지점인 광나루에 도착하려면 최소한 10리를 40분 안에 걸어야 했던 것이다.
* 1981년 9월에는 유럽으로 옮겨서 공산당의 데모와 맞부딪쳐 싸우기도 했다. 1981년 9월 10일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일이다. 나는 국제승공연합 총재이신 선생님으로부터 독일에서의 반핵 데모 저지에 관한 특별지시를 받은 바 있었다.
국제공산주의의 세계전략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선생님은 "최근 구라파에서 일고 있는 소련의 원격 조정하의 반핵 데모가 속히 중단되지 않으면 자유 진영 내부에 암적 존재가 배태胚胎될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결국 소련의 구파라 적화전략은 물론 세계 적화의 지름길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엄숙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분을 똑바로 보았다. 당신의 얼굴엔 투쟁으로 얼룩진 숱한 경륜과 권위 뜻과 의를 위하여 일보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와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사상과 그 추종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의지가 서려있음을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예, 해보겠습니다" 라고 나는 힘 있게 대답했다.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무거운 사명의식을 느꼈고 또 그분의 심정에 감화되어 등줄기에는 뜨거운 기운이 물결치고 있었다.
이렇게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승공의 기틀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은 후 10일이 지났다. 벌써 유럽에는 50여 명의 대원이 도착했고 영어에 능통한 50명의 일본 대원이 도착했으며 미국 대원은 내가 직접 31명을 선발하여 독일로 데려왔는데 그날이 9월 20일이었다.
프랑트푸르트에서 70킬로 떨어진 캄 부르크라고 하는 곳에 있는 국제승공연합 독일 수련소에서 우리는 10일간 승공 사상 수련회를 가졌다.
나는 기도를 마치고 본으로 향했다. 장소는 본 대학 교정,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운동장의 3분의 1일 메워져 있었다.
나는 130명의 대원을 불렀다. "그대들은 박종구의 명령에 의해서 이곳에 와 데모를 벌이는 소극적인 자가 되지 말라" "그대들은 그대들이 동기가 되어 그대들의 진실을 말하고 그대들의 정의를 세우라" "그대들은 비겁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외치고 또 외치라."
120명의 대원들은 포스터를 두 개씩 안쪽으로 접어서 우리의 슬로건을 감추고 10개의 플래카드를 돌돌 말아 모두는 나의 명령이 떨어질 것을 기다렸다.
상오 11시부터 연예 프로가 진행되었는데 벌써 청중은 20만을 돌파했다. 운동장은 입추立錐(송곳을 세움)의 여지가 없었다. 1시가 되니 28만 명이 모였다는 안내 방송이었다. 1시부터 본대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두 번째 연사가 연설을 시작하면 일제히 반대 데모를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메가폰을 들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위장 평화로 진정한 평화를 파괴하지 말라!" "공산주의자들은 즉각 위장 평화시위를 중단하라!"
120명, 28만에 비하면 얼마나 적은 숫자인가? 우리의 외침은 운동장에 퍼졌고 사람들은 우리의 구호에 귀를 기울였다.
연사도 1분 이상 말을 제대로 못 했다. 외치고 외치고 또 외쳤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전단지를 청중을 향해 던졌다.
* 10월 10일 독일 수도 본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대규모 데모가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10월 5일 나는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고 데모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야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단호하게 "해야지!"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캄 부르크로 돌아왔다. 즉시 대원들에게 반대 데모의 취지서를 작성했다. 전단지 2가지 10만 장씩 20만 장, 포스터 500장, 독일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유엔 사무총장, 미국 대통령, 독일 수상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120개의 피켓, 10개의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우리의 슬로건은 "거짓 평화로 진정한 평화를 파괴하지 말라"였고 몇 가지 결의문을 채택했다.
* 10월 9일 하오 7시 120명의 모든 대원은 캄 부르크에 집합했다. 나는 다음날에 있을 데모에 대한 세밀한 주의사항을 시달하고 그다음으로 이튿날 새벽 포스터 500장을 본 시내에 붙일 대원 21명을 선정, 그의 책임자로는 독일인 게르하르트 바셀을 지정했다.
새벽 2시 그들을 본으로 떠나보내고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 6시 일어나자마자 깨끗이 목을 하고 내복을 갈아입었다.
한두 시간 후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 날은 25만이 모인 곳에서 데모를 해야 했다.
오늘 내가 어떻게 될지 그것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니 준비를 해야 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나이, 박종구", 나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러고 나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희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과거 1000년간 공산주의 사상은 인류의 생명과 존엄성에 먹칠을 했고 또 이 거짓 사상을 위하여 투쟁하다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라고 기도했다.
현장에 나타났다. ··· 난투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가 바로 내가 필요한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 대원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가 있으면 그 순간 달려들어 그들을 막아 내가 대신 싸움을 맡았다.
*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독일 사람들은 한국의 태권도를 대단히 겁낸다. 나는 "너희들이 바라는 평화가 폭력이냐?" 외치며 태권도 폼을 잡으면 아무도 덤비려 하지 않는다. 나는 큰 주먹과 태권도 몸 덕분에 덕을 톡톡히 보았다.
* 그들의 지도자가 또한 자기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가자 신이 나서 외치고 또 외쳤다.
* 1시 45분 이제 15분이 지나면 그들의 정식 프로그램이 끝나고 가두시위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는 많은 폭력배도 와 있었다. PLO독일 그룹도 거기에 와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데모가 끝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와 우리 대원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이번 데모에 경찰이 전연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던 것이고 따라서 이곳 데모 장소에는 경찰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곳에 주저앉아 끝까지 버틴다 해도 우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큰길에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2천여 명이 우리의 대원을 두고 두꺼운 벽을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자 사과 계란이 날아오기 시작하고 음료수 캔이 날아오는가 하면 맥주병도 수없이 날아들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 나는 당황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 어려움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랄까. 엊저녁에 본 경찰이 우리에게 한마디 가르쳐 주기를 무기나 몽둥이들은 휴대할 수 없으나 당신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양말 속에 돌덩이를 넣어 준비해 두었다가 그들이 폭력을 가하면 그것을 휘둘러 대라고 일러 준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양말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 나는 "큰길에서 작은 길로 나가라!"고 외쳤다. ··· 우리를 쫓는 숫자가 500명으로 줄었다. 우리를 둘러쌀 공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맨 앞줄은 검은 재킷에 검은 바지, 검은 마스크를 한 패들이었는데 그들은 몽둥이, 파이프, 쇠줄을 가지고 휘두르며 미친듯이 덤벼 들었다. 그들과 우리 대원 간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사실 우리는 숫적으로 너무나 열세일 뿐만 아니라 전혀 폭력을 모르던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내 생명을 던질 것을 각오한 나는 폭력을 가하는 공산당들의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야말로 좌충우돌했다.
* 이제는 약 3미터의 간격이 생기게 되었다. "누가 너희들의 책임자인가?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키가 장승 만한, 마치 프러 레슬링 선수를 연상케 하는 거한이 내 앞에 나타났다.
"네가 책임자인가?"
"그렇다. 그래, 오늘 당신들은 정말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는가?, 만약 싸우겠다면 우리는 끝까지,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오늘은 때가 아니다. 너희는 오늘 평화 데모를 벌이고 있지 않은가. 만약 사상자가 생기면 너희 데모는 무효다! 자, 어쩔 테냐? 나는 이 단체의 책임자다. 우리는 대학에서 활동한다. 너희가 언제 어느 대학에서든지 우리와 만나 한판을 겨루자면 언제고 대해 주겠다. 오늘은 살상을 피하자. 어떤가? 내 의견을 받아들이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서너 명의 폭력배들을 불러 상의를 하더니 "너희 단체의 이름이 뭐냐?"
"CARP다. 대학생 단체다"
그는 우리의 이름을 다시 확인한 다음 호각을 "삑-" 불었다. 그 호각소리에 그들의 폭력은 일순간에 끝났다.
* 하오 5시 캄 부르크에 120명 모두가 도착했다. ··· 우리는 그룹을 지어 축구시합을 했다.
* 축구가 끝나고 보고회를 가졌다.
* 저녁 식사 후 우리의 자랑 Rock aroll band인 Blue Tuna Band의 열기에 찬 음악에 맞추어 우리는 승리의 춤을 추었다.
1. 충주성화학원
▣ 1970.8.11(화) 심정과 공적 생활. 부산 동명장 여관.
- 지구장 수양회.
033-160 여기 있던 박종구 갔어요? 선생님이 그에게도 이야기했지만 박종구가 맡고 있는 성화학원이 상당히 긴박한 상태에 있는 것을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협조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선후관계를 가려서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돈을 국가적이고 세계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중심 삼고 써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청평에 땅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땅을 사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세계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기 위해서 땅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민족 시대를 지나 점진적인 세계 시대 앞에 섰기 때문에 이 시대를 위한 국제적인 교육 기관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거에요. 이러니 당당하다는 것이빈다. 그것을 위해서는 아무리 돈을 써도 양심의 가책을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교회를 위해서 돈을 써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현재 국가적으로도 위신을 세워야 할 때에 있습니다. 승공활동이라든가 외적인 모든 문제를 중심 삼고는 국가의 상위권에 있는 사람들 앞에 두각을 나타내고 대한민국이 바라볼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내적인 입장에 있는 교회가 형편없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체면을 세워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체면 세울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만일 우리가 체면을 못 세우게 되면 승공연합의 이사장은 높아지지만 통일교회의 문 선생은 낮아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이런 문제를 중심 삼고 볼 때 내적인 교회의 체면을 세워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교회의 체면만 세워지면 선생님이 움직일 것입니다.
▣ 1976.3.2(화) 청주교회. 통일교회란 무엇인가.
085-089 그렇게 알고 여러분들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낙심하지 말고 충북에서 태어난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구요. 알겠어요?
그래서 원래 내가 청주에다가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거예요. 어디 갔나? 박종구! 성화학원 만들어 가지고 말이에요, 뜻 맞는 유지가 몇 사람만 있으면 틀림없이 내가 중고등학교를 세우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놀음놀이가 틀렸어요. 그래서 지금 정지상태에 있지만 한번 더 내가 테스트해 볼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러니까 낙심을 하지 말라구요.
2. 능청맞은(속으로는 엉큼한 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는 천연스럽게 행동하는 태도.) 데가 있다.
▣ 1971.8.13(금) 우리의 사명과 책임. 창평.
- 제1차 교회장 수련회.
046-151 여러분 축복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무서운 것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영계에 가 보라구요. 여러분이 잘못하고 영계에 가게 되면 여러분의 선조들이 심판합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이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누가 사탄이 된다구요? 타락한 인간에게는 누가 참소하는 사탄이 되었습니까? 종이 되었지요?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사탄은 누가 되느냐 하면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선조들이 "이놈의 자식, 너 왜 그렇게 했어! 이 자식아. 남자라는 게." 그런다는 겁니다. 여기 박종구는 안 걸리나 한번 죽어 볼래? 얼굴이 넓적해 가지고 능청맞은 데가 있거든.
3. 개척정신이 농후한 사람.
▣ 1972.7.16(일) 종로교회. 선악의 분기점에서.
059-169 종은 새로운 소식이나 특별한 소식을 멀리, 많은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울리는 것입니다. 그 종소리가 울리게 되면 나라에 새로운 일이 생겨나고 그 종소리가 울리게 되면 특별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연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종로교회 사람들은 통일교회에 있어서 언제나 새로운 사건을 제시하는 데 특별한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에 이곳의 책임자로 온 박종구 군은 아주 개척정신이 농후한 사람입니다. 남이 가는 길을 따라가기를 좋아하지 않고 남이 하지 않은 새로운 일을 선두에 서서 하기를 좋아하는 기질이 있다는 것을 지난 몇 개월간을 통해서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충주에 있을 때 성화학원을 신설해 가지고 많은 영향을 미친 그런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이 이런 책임자를 만난 것이 종로교회와 인연이 있어서 그렇지 않으냐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로교회는 통일교회에 있어서 새로운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모체가 되었으면, 서울 장안에서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059-204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구요. 오늘 내가 오긴 왔다구요. "뭐가 어떻고 어떻고, 선생님 선생님요 ··· ." 이러면서 이 박종구 수작이 아주 근사하다구요. "선생님, 16일에는 한 번 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내가 틀림없이 200명을 모아 놓ㄹ을 테니까 꼭 와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그래, 200명 모아 왔어요? 200명 더 되나, 이게? 안 됬으면 약속 위반이에요. 약속을 못 지켰으니 벌을 받아야지. 그런 이갸기했지? 왜 위반했어, 왜? (···) 에이, 이 녀석아!
3. 싸울 때는 싸워야 된다.
▣ 1978.2.13(월) 미국을 살리는 주역. 미국.
- 미국 주 책임자.
096-324 선생님은 문제를 일으켰나요, 안 일으켰나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뉴욕에서 문제를 일으켰다구요.
양키 스타디움 대회도 마찬가지예요. 문제를 일으킨 거예요. 내가 그로스터에 가서 투나 잡이를 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다구요. 새벽같이 나가서 문제를 일으켰다구요. 남들은 8시에 밥 먹고 나가는데 이 녀석들은 새벽같이 나가서 잡아 가지고 오니 기분이 나쁘지요.
언제나 내가 출세를 하고, 남다른 무엇을 남기기 위해서 선의의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에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신문쟁이들하고 싸움도 하면서 "이 녀석, 너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싸움도 할 줄 알아야 된다구요. "보고도 못 본 체하지 말라"는 거예요. 싸울 때는 싸워야 된다구요. 적어도 원리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선의의 싸움도 할 줄 알아야 된다구요. 난 그런 사람이에요.
내가 알아보니까 하나님이 그런 걸 좋아하더라 이겁니다. 약해 가지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를 맞고 힘이 없어 가지고 겸손한 건 하나님도 안 좋아한다구요. 힘이 있어 가지고 머리를 숙여야 된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도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내가 타이거 박, 그 녀석을 좋아하는데 그 녀석한테 내가 주먹질을 하면서도 그 녀석을 내가 좋아한다구요. 그런 게 필요하다구요.
이거 지지리 욕먹고 지지리 천대받으면서 겸손해? 에이, 그런 자식, 나 그거 원치 않아요. 내가 지금 통일교회 책임자니까 이러고 있지, 나는 안 지는 거예요. 왜 욕을 먹어요? 길가에서 왜 욕을 먹느냐 말이에요.
내가 통일교회 책임자니까 이러지요. 어떤 때에는 레버런 문이 통일교회 창시자가 된 것을 후회할 때가 많다구요. "이놈의 자식! 이놈의 자식! 이게 뭐야." 하고 말이에요.
보라구요. 선생님과 같이 눈이 작은 사람은 무서움이 없는 사람이에요. 눈이 큰 사람은 겁이 많다구요. 그건 그렇다구요. 선의의 세계에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구요. 왜? 반대하는 목사가 있으면 왜 싸움을 못하느냐 이거예요. 주먹질을 않고도 얼마든지 입으로 얘기해서 때려잡을 수 있는 거예요.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서 담판을 짓는 거예요. 별수 있어요.
말보다도 주먹이 빠를 때가 많다구요. 사탄이 그래요. 사탄이. 사탄이 그렇다구요. 사탄이. 자기보다 약하게 되면 쳐들어 온다구요. 쳐들어 와서 친다구요. 그걸 알아야 돼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선생님은 양면을 갖춘 사람이라구요.
4. 캘리포리나 주 기동대 고문
▣ 1978.11.27(월) 보스턴 쉐라톤 호텔. 기동대 활동에 대하여.
- 주 책임자 회의.
102-102 캘리포니아 주 전체는 닥터 더스트한테 맡길 거라구요. 거기에 고문 격으로 박종구를 임명한다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곳에는 동양 사람이 많기 때문에 관계를 맺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구요.
▣ 1979.4.1(일) 벨베디아.
- 통일 신학원 40일 수련생.
104-086 지금 서부에서는 카프 운동을 벌이고 있다구요. 36가정 타이거 박이라는 사람을 두목으로 세워 가지고 공산당하고 싸울 수 있는 대표로 세워 가지고 "냅다 밀라"고 한 거예요.
지금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다구요. 그래 이번에 축복가정에게 전부 다 "애기 버리고 나라 살려라! 애기 버리고 남편 버리고 그 이상 공산당하고 싸워야 되고 나라를 사랑해야 된다" 고 했어요. 이번에 가정을 전부 다 때려 모는 거예요.
5. 타이거 박이라는 이름을 내가 지어줬다.
▣ 1979.10.26(금) 본부교회. 섭리사적 현 시점.
- 아버님 귀국 환영 집회.
105-229 거기는 매일같이 공산당들과 공격전이에요. 매일같이 싸움하는 거에요.
* 그래, 그 책임자로 누구를 세웠느냐? 박종구, 알지요? 박종구? 박종구한테 타이거 박이라는 이름을 내가 지어줬다구요.
6. 미국에서의 활동.
1) 카프 활동.
▣ 1980.1.1(화) 세계선교본부.
- 제13회 참하나님의 날 0시 말씀.
106-273 아까 박종구가 이번에 대학생들 460명을 수련시켰는데 밖에서는 야단하던 녀석이 말씀을 듣고는 통일교인보다 더 열렬해 가지고 하는 것을 볼 때 이상하더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이 녀석아, 이상할 게 뭐가 있어? 때가 그렇게 된 줄을 모르느냐?"고 했어요. 이 녀석들, 때도 모르고 이상하다고 하는 거예요.
2) 순회사
▣ 1983.3.1(화) 미국. 탕감과 회개.
- 미국 지도자.
125-024 죽은 타이거 박에게도 "네가 한 주일에 두 번씩 미국 대륙을 횡단해라. 몇 주일을 달려라. 이 자식아!" 하고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비행기를 타는 데 있어서 기록을 깼어요. 역사 이래 미국 내에서 기록을 깬 거예요. 사흘 전에 뉴욕에 가더니, 또 언제 와서 샌프란시스코에 있고 또 사흘 후에 뉴욕으로 가는 것을 전부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행기 스튜어디스들이 전부 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바쁠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비행기 회사에서는 자기 비행기를 중심 삼고 한 사람이 단 기간에 제일 많이 탄 기록을 깨뜨린 사람이 타이거 박이라고 해서 상을 줘서 상까지 받았다는 보고를 들었어요. 상까지.
7. 1981.9.10.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반핵 데모 저지에 관한 특별지시.
- 1981.10.10 본에서의 반해 데모 저지.
▣ 1982.1.1(금) 세계선교본부. 가정교회의 승리.
- 제15회 참하나님의 날.
116-200 자, 레버런 문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데는 생명을 내놓고 해요, 생명을 안 내놓고 해요? 공산당 반대 데모 요번에 Bonn(독일)에 가서 타이거 박에게 데모를 하라고 지령을 내린 거예요.
그러니 공산주의자들이 타이거 박을 더 미워하겠어요, 레버런 문을 더 미워하겠어요? "이놈 레버런 문, 이 자식이 전부 다 코치해서 저렇게 만들었다" 이럴 거라구요.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에게 그런 위험이 있어요? 없다구요. 그런 지대에, 안전지대에 왔기 때문에 이 홈 처치를 만든 거예요.
8. 1982.4.3. 36가정 박종구 선교사 성화.
▣ 1982.4.11(일) 미국.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117-297 이 죽음을 싹 넘어서는 날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존전에 서는 거예요. 복중에 있던 애기는 죽는 거예요. 죽지만 다시 태어나서 누구 앞에 서느냐? 부모의 존전에 서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부모의 존전에 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알겠어요?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거예요. 어디에 서느냐? 하나님의 존전에 서는 거예요.
이 부모는 영원한 부모라는 거예요. 지금 이 세계의 부모는 Limited Parents지만, 이것은 Eternal Parents라는 거예요.
지금 박종구도 영계에 갔지만 그것을 볼 때 여러분들은 "아이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야! 참 좋겠다"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9. 박씨가 문제.
10. 기억되는 사람.
▣ 1984.2.13(월) 섭리 역사의 전통을 존중하라. 믹구.
- 인진 흥진님 약혼식.
130-305 지금 박씨가 야단이에요. 박 정권도 박씨가 야단해 가지고 됐고 통일교회도 박씨가 야단이에요. 가만 보라구요, 박씨. 박보희 그다음에는 박씨가 누군가? 타이거 박 또 그다음엔? 박씨가 문제예요, 박씨가.
그래, 이 박씨들은 말이에요, 통일교회 박씨들은 대한민국의 공화당 박씨를 가서 소화해야 된다 이거에요. 다리를 놓아야 된다 이거예요.
130-323 박종구도 뜻을 위해 활동하다가 갔다구요. 기억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에요.
▣ 1998.8.17(월) 코디악. 순결 강사 특별 연수.
295-049 박씨가 문제입니다. 박 대통령과 박보희가 만났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통일가에 박씨 사위가 몇 명이에요? 박보희, 박종구, 박중현 셋입니다.
남미 책임자인 박구배 박상권 그다은엔 박동하입니다. 전부 다 박씨입니다. 이상하지요? 지금 유엔 공작하는 것도 박씨입니다. 박씨가 미국을 개척했다구요. 박씨가 잘못한 것도 많지만 잘한 것도 많습니다.
11. 셋째 은진. 사위.
▣ 1987.11.8(일) 본부교회. 하나님의 기대.
170-114 요전에 우리 셋째 딸 은진이가 결혼했어요. 저 박종구 아들하고 결혼했거든요. 그게 떨레가 얼마나 많은지! 거 형제가 많고 시어머니에다가···.
그래도 어떻게 하나 가만히 보니까 용하더라구요. 척척척 어머니도 구슬려 가지고 쓱쓱쓱하고 그러더라구요.
▣ 1999.1.1(금) 제32회 참하나님의 날 경배식. 우루과이.
298-090 박가가 문제고 최가가 문제고 또 한가가 문제예요. 또 대한민국에 있어서 이득삼을 중심 삼고 최씨예요. 최씨. 최성모를 중심 삼고 결판을 하는 거예요. 선생님을 잡아넣은 것이 최성모하고 박 대통령이었지요? 박가지요? 박 대통령이지요? 박가예요, 아니에요?
선생님 사위 가운데 박가가 몇 마리 되나 보라구요. 박보희 아들이 선생님 사위지요? 박씨의 아들이에요. 또 그다음에 누구예요? 박 누구예요? (박종구.) 종구는 죽었어요. 이래 가지고 남긴 가정이 선생님의 십자가가 돼 있어요. 알겠어요?
그다음에는 또 뭐예요? 박중현의 아들이 누구야? 박중현! 누구야? 인섭이 상대가 누구야? 선진이. 박씨 사위들의 여편네가 문제예요. 우리 인진이 문제가 됐어요. 그다음에는 은진이 문제가 됐어요. 선진이 문제가 됐어요. 전부 이렇게 되었어요. 탕감법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나는 그걸 알고 있어요. 어머니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