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 1917년 11월4일에 경상북도 구미(선산군)에서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 1926년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 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 수업시간에 박정희는 남보다 먼저 손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 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
*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 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 뒤 생가로 이동했다.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인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
* 1932년 3월 1일에 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의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
대구 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조혼은 일반적이었다.
*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 사범을 졸업하였고 경상북도 교육청에 대기 발령받았다가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그해 박정희의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다. 박정희는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는데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 만주군관학교 재학 시절 (1940~1942)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나이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를 증거로 내세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한다. "
만주국과 일본제국의 관계는 그저 일제가 조종하는 괴뢰국 이었을 뿐이므로, 이 증거로 말미암아 섣불리 친일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라는 주장도 있으나, 혈서의 내용에서 본인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칭하며 일사봉공, 목숨을 건 충성 등을 맹세 하였기에 논란을 피하긴 어렵다. 박정희가 쓴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학 시절 (1942 ~ 1944)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한다.
그리고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제5· 6· 7· 8· 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이며,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57기로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 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 · 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구명으로 사형을 면하고 강제 예편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 6· 7· 8· 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 등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서거하였다.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57기로 졸업하고,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구명으로 사형을 면하고 강제 예편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장교로 참전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3시, 5.16 군사 정변(5·16 군사 정변은,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 등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 9기 출신 일부 장교들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이유로 제6군단 포병여단,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던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 등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서거하였다.
북한은 5·16 군사 정변 발생 이전부터 남한에서 군사 정변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주재 중공 대사관이 정변 당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 혁명 정황〉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 부수상이 대사관 측과 만나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5월 16일 하오 중공 측에 혁명에 관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군사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북한은 특히 정변 발생 직후, 군사정변 주도세력을 남로당계로 보고 당일 지지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인 5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극심한 반동에 의한 쿠데타이며, 혁명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당초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북한 당국이 중공 외교관에게 전한 회의 내용에는 "우리는 경계를 강화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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