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차상순 목사님

true2020 2015. 9. 10. 12:09

▣ 車相淳 牧師님  "이 생명 다하도록"

 

* 1910.7 황해도 신천군 화산리에서 출생

* 1957.4 야목 교회 전도사

 

* 우리 집안은 3대째 장로교를 신봉해 왔다. 할아버지가 독실한 신자였고, 어머니가 신앙 가운데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등에 엎혀서부터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학교는 기독교 계통인 광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는 상급학교가 없어서 소학교인 문화보통학교 4년을 또 다녔다.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객지로 나갔다. 객지에서 몇해 있다가 고향에 와 보니, 우리 집에서 30여 명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이전에는 내가 살던 동네는 40호 되지만, 교회에 나가는 가정은 우리 집뿐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한 여름에 농촌이 아무리 바빠도 주일이면 교회에 꼭 나갔다. 교회는 우리 집에서 약 2키로 떨어졌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빠짐없이 나가니, 세상 사람들은 비웃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 40세 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분의 머리에 큰 혹이 나게 되었다. 시골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모든 의사들은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한번 해 보려면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 자식들은 서울 병원으로 모시고 가기로 했으나, 환자되는 아주머니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기 병을 고치려고 토지를 팔면, 자식들은 다 거지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자식들에게 안 가겠다고 하고, 우리 어머니에게 기도를 한번 받아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 어머니를 모셔다가 며칠 밤 철야를 하면서 기도를 했더니, 혹이 온데간데없이 나았다고 한다. 돈도 하나도 안 들이고, 병이 낫게 되니, 집안과 친척들까지도 좋아서 다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이 집뿐만 아니라, 친척까지 나오게 되니까, 3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 20세 때 일본에 건너가서 만 10년을 살았다. 거기서 공부하려고 야간 학교에 다녔으나, 신경쇠약에 걸려서 중단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까, 교회에 다니지 못 하다가 25세 때 한인교회에 나가면서 다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당한 주기철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받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각오하고, 십일조 생활을 계속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부러워서 30여 회 성경을 독파했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의문이 생겨서 목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못 얻었다.

 

당시 신사 참배와 창씨 개명을 강요하면서, 한국 사람에 대한 차별은 심해만 갔다. 나는 이런 꼴을 안 보고, 조용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동북 신학원을 다니며, 전도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역시 신사참배 문제가 있었다.


* 그리고 신학원에서 가르치는 선생, 부흥 목사들에게 성경의 어려운 문제들을 질문하면 하나도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맞지 않고, 마음의 고민만 하다가 해방 바로 전에 고향으로 다시 나왔다.

 

*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1946년 6월인데 날짜는 기억이 안 난다. 해방 이듬해, 처가댁에 갔다. 하루는 처형댁하고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믿음의 친구인 김성복씨의 집을 찾아갔다. 이 집 주인 내외는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다. 그 집을 방문했는데, 윗방에서 내가 앉아 있는 아랫방으로 내려오는 청년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셨다. 


내가 선생님을 본 첫인상은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체격이 좋으며, 얼굴이 맑고, 훤한 미남호걸인데, 첫눈에 호감이 갔다. 그때가 선생님이 27세이고, 내가 37세로 10살 연상이다. 내려오시자마자 말씀을 하시는데 내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훌륭한 말씀을 하셨다. 


또 성경상의 어려운 문제를 물어보면 속이 시원하게 해석을 해 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좋은 선생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 주일이 되었다. 선생님은 로마서에 있는 사도 바울의 심정과 바울이 박해받고, 고생하며 전도하는 노정과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런 훌륭한 설교를 들은 것 같았다. 


* 기도하는 음성은 파도와 같이 높았다 낮았다 하는데, 이런 이상한 기도에 내 마음이 시원하고, 얼마나 기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처음 예배부터 우시면서 시작하여, 설교나 기도를 우시면서 하셨고, 끝날 때도 울음으로 마치셨다. 끝나고 나면 선생님 와이셔츠는 땀에 젖어 쥐어짜게 되고, 선생님 앉으신 앞에는 눈물이 흘러서 번지고 있다. 예배가 끝나면 식구들은 서로 은혜받은 간증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 나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나갔고, 만주에서 목회생활도 하며 유명한 부흥목사 설교도 많이 들었지만, 선생님과 같은 설교는 듣지 못했다. 너무도 은혜가 넘쳐흘러, "참, 여기가 천국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주일마다 특별히 잘 믿는 독신자들이 자꾸 모여들어, 그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가정 집이 비좁게 됐다. 예배를 볼 때마다 말씀은 로마서의 바울의 말씀을 제목 삼아 하셨다. 


* 나는 혼자 생각에 이제야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으니, 문전걸식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믿고 따라야겠다고 결심했다. 평양에서는 원리말씀을 많이 하지 않으셨다. 


다음 해, 1947년에는 집회장소를 옮겼다. 바로 나의 처형, 정명선 집이었다. 이 집도 역시 크지는 못 했다. 한 칸도 못 되는 윗방에서 선생님은 주무셨다. 먼저 계시던 방은 길이가 다섯 자밖에 안 되는 삼각형이었는데, 선생님이 누우시면 다리도 뻗지 못하셨다. 이 방도 길이는 길었으나, 좁았다. 선생님은 밤새 말씀을 하고,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드셨다. 그리고 아침 5시에 일어나시는 생활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그러셨다. 


* 저녁마다 선생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다.  여자 식구는 4, 5명, 남자 식구는 나 혼자서 새벽 두 시까지 꼬박 듣곤 했다.


* 그리고 선생님이 식사하시는 것을 보면, 그릇에 곱게 담은 밥을 3분의 1만 잡수셨다. 그렇게 체격이 좋고, 또 한창 청년인데 식사를 조금 하시고 어찌하나 염려도 되었다.


밤새 말씀하시고 2, 3시에 잠자리에 들면, 모든 식구들은 정신없이 자는데, 선생님은 혼자 엎드려서 또 기도를 하셨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선생님의 기도 소리를 듣고, "아, 문선생님이 또 기도하신다" 하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했다.     

 

식구가 점점 늘어나 4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 몽시와 계시를 받고 증거들를 했다. 어떤 이는 "만왕의 왕이요, 한국의 왕이라" 받고, 어떤 이는 "재림주, 위대한 선생"이라고 받았다. 그리고 "아기 주님"이라고 받기도 했다.


* 하루는 뒷집에 사는 할머니가 계시를 받고, 아침에 말씀을 하는데 "선생님 성명을 개명해야 된다"고 하면서, 문선명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본명은 문용명이셨다.)

 

* 선생님께서는 때로는 답답하실 때 나더러 산보를 가자고 하셨다. 뒷산으로 가서 학교 운동장에 학생들이 운동하는 것도 내려다 보셨다. 가끔 산보를 나가시는데, 남자는 나하고 원필씨뿐이었다. 원필씨는 이때 20세쯤 되었다.


* 하루는 선생님께서 박씨 할머니와 대보산에 가셔서 여러 날을 기도를 하고 오셨다. 대보산은 평양에서 진남포로 가는 중간에 있는 산인데, 안창호 선생의 기념각이 있는 산이다. 


* 평양성내의 모든 교역자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어떤 목사에게는 편지를 써서 주시고, 어떤 분에게는 말씀으로 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편지를 써서 주신 것을 가지고 가면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목사나 장로에게 가서 욕만 얻어먹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한번은 재건교회에 갔더니 6, 7명이 나의 팔다리를 들고 내동댕이 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돌아온 적도 있었다. 


하루는 복중교에 가라고 해서 나하고 할머니 한 분이 같이 갔다. 이 교회는 허호빈 교주를 중심으로 120여 명이 모인다고 하였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교주는 옥중에 끌려가고, 그의 어머니가 교주 대리 구실을 하고 있었다. 


* 우리가 복중교에 들어가니, 오늘 귀한 손님이 두 분 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우리가 점심 때가 되어서 도착하게 되었는데, 아침 밥상을 점심으로 대접했다. 이 밥상은 재림주가 어느 때 오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침밥으로 떠 놓았던 것을 주는 것이라 했다.   


언제나 아침에 재림주님 밥상을 차려 놓았다가 점심 때에 새 밥상을 차리고 나서 아침 밥상은 할머니, 허호빈씨의 어머니가 먹는다고 했다.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재림주님이 어떤 모양인지 할머니 보고 기도해 보라고 했다. 할머니 말이 "재림주님은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겼으며, 대학을 나오고, 춘향이가 이도령을 옥중에서 상봉하듯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선생님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선생님도 한 번은 현실교회의 투서로 허호빈씨가 수감되어 있는 옆 감방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 1948년 2월 20일 경이었다.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정주 선생님 본댁에 다녀 오라고 하셨다. 정주에 가라고 한 것은 지승도 할머니가  계시를 받았는데, 3월 초하룻날 하늘적인 큰 잔치의 예식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기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본댁에는 해가 지는 황혼에 도착했다.  


* 식구로는 선생님 할아버지, 선생님 아버지, 선생님 어머니, 선생님 형님 내외가 살고 있었다.


* 처음으로 갔으나 선생님 소식을 듣겠다고 집안 친척들이 방안에 꽉 찼다. 그날 밤에 나는 선생님은 장차 큰 일을 세계적으로 하실 위대한 분이라는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부모들은 기대에 어긋나는 모양이었다. 부모님의 생각은 선생님이 직접 집에 오지 않고 사람을 보낸 것과 또 공부를 그만큼 했으면 귀가를 하여 취직이라도 해서 돈벌이를 했으면 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은 곽산 성진씨 처가집에 가서 선생님 소식을 전했다. 이 댁에는 성진씨 외조모님과 외삼촌 내외가 살고 있었다. 집은 큰 기와집인데 염소를 기르는 대농가여서 살림이 아주 넉넉해 보였다. 여기서 하루를 지내고 평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평양에 돌아와 보니, 선생님은 22일 주일에 투옥을 당하셨다. 집은 빈 집 모양으로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40여 명씩이나 모이던 식구는 한 명도 얼씬하지 않았다.


* 3월 초하룻날 하늘적인 큰 잔치를 해야 된다는 계시를 받고, 모든 식구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국에서는 그날이 바로 3.1절이라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여 미리 선생님을 붙들어간 것이었다.


하루는 옥세현씨가 와서 나의 안사람과 같이 음식과 갈아 입을 옷을 준비해 가지고, 나와 셋이서 보안서에 면회하러 갔다. 그러나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그래서 가지고 간 사식과 옷을 넣어 드렸더니 한 시간쯤 되어 선생님이 옷을 갈아 입으시고, 입고 있던 옷을 내보내 왔다. 선생님의 명주 바지 저고리가 온통 피투성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싸늘해졌다. 


* 선생님은 형을 받으신 후 1개월 반 가량 평양 형무소에 계시다가 멀리 흥남 감옥으로 옮기시게 되었다. 옥중의 옥이라고 하는 흥남감옥에서 약 3년간 옥고를 치르시고 6.25동란의 발발과 국군들이 북진함에 따라 1950년 10월 14일 출감하게 되었다. 


* 그리고 40여 명의 식구들은 신앙이 없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평양에서도 독실히 믿는 신자들이 많았다. 그때도 "뜻이 3년이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생님이 투옥되게 되니, 대부분의 식구들은 낙심하게 되었다. 


* 1950년 11월말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남한으로 피난을 가야 된다고 했다. 북에서는 중공군이 따라오고 평양 사람들은 모두들 피난을 떠났다. 나는 선생님한테 가 볼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아내에게 피난 가지고 하니, 죽어도 여기서 죽는다고 혼자서 떠나라고 했다.    


1950년 12월 5일 할 수 없이 혼자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선생님은 12월 4일에 원필씨, 박정화씨를 데리고 피난을 떠나셨다. 대동강교에 도착하니 다리는 벌써 유엔군이 폭파하고, 배도 다 끊어져 버렸다.


* 나는 수원까지 700리를 20일간 도보로 걸어 나왔다.그리고 수원교회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되었다.


나는 6.25 사변 때 두 번 죽음 고비를 넘겼다. 한 번은 평양에서 인민군에게 잡혔는데 권총을 가슴에 대고 공민증을 보자고 했다. 거기서는 당원이어야 신임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소속도 없고 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죽게 되면 개죽음이 될 것 같아 기도라도 하고 죽으려고 마음 먹었다.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았으나 갑자기 무슨 기도가 나오지를 않았다. 다만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 사람이 나를 몰라서 나를 죽이려 하니, 죄를 저 사람에게 돌리지 말고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내 생명은 하늘이 받아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다.


눈을 뜨니 총을 쏘려고 하다가 구둣발로 냅다 차더니, "이까짓 것 죽여야 처치만 곤란하다"며 가 버렸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기도는 만능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렸다.


또 한 번은 서울에서 수원으로 남하를 하는데, 기찻길로 가지 않고 시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시흥에서 장교 5, 6명이 피난 행렬 속에서 청년들을 골라 내 가지고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걸려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나는 내려올 때에 배낭 하나를 지고 나왔다.그 속에 갈아 입을 옷을 한 벌 넣어 가지고 나왔다. 장교들이 나더러 배낭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꺼내 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 양복 주머니 속에 이북에서 쓰는 공민증이 나왔다. 공민증을 보고, 나보고 간첩이라고 하면서 남한을 정탐하고 다시 이북으로 가려고  이것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어떻게 회피할 도리가 없었다. 


이 장교들은 몸둥이를 들더니 우선 무릎을 끊어 앉아 있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북에서 인민군에게 잡혔을 때는 속으로 기도했지만, 오늘은 큰 소리로 기도하고 죽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기도하려니 기도가 나오지 않아 주기도문을 큰 소리로 외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아멘." 하고 눈을 떴다. 몽둥이로 때리려고 하다가 "예수 믿느냐?" 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3대째 예수꾼이라 했더니, "미안하다" 하면서 돌려 보내 주었다. 그래서 기도의 함으로 또 한 번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었다. 그리고 "기도는 만능이다" 라고 외쳤다.   


* 서울에서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 나는 제3부두에서 제일 힘 안드는 레이숀 박스를 운반하는 일이었다. 하루 일해야 그저 하루 입에 풀칠할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다음에 알고 보니까 선생님도 부두에서 드럼통 굴리는 일을 하셨다는데, 그 부두에 갔으면 만날 수 있었겠지만, 거기는 너무 힘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갈 수 없었다. 


* 부두에서 몇달 동안 일을 하다가 우연히 목사 친구를 만났다. 내가 만주에서 목회 생활을 했기 때문에 현실교회 목사를 많이 알았다. 이 목사는 대전 제일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자기 교회에 와서 심방을 담당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심방 전도사로 시무를 하다가 가월리라는 곳에 개척전도를 나갔다. 


비록 간판은 장로교지만 설교는 선생님에게 들은 말씀을 중심하고 전했더니, 모두가 은혜가 된다고 하여, 쉽게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때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국민 전체가 비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을 때, 선생님에게 들은 소망찬 말씀만 전했다. 그때 어떻게 그렇게 신념에 찬 설교를 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하다. 


한번은 감리교에서 시무하는 목사를 만났는데, 자꾸만 수원 야목교회서 목회를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야목교회는 재적이 120명이나 되는데, 평균 출석률이 80~90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이요한 목사가 찾아와 "선생님이 나와 계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야목교회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감리교 목회자 명부를 보고 알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운동장 옆 양옥집에 계시는 선생님을 뵈러 갔다. 선생님을 뵙고 나서 유협회장으로부터 원리강의를 들었다. 


* 교회에 책임이 있어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교회에 돌아와서도 원리강의를 들으면서 배운 "동산의 노래"가 귓가에 쟁쟁하였다. 나는 심령이 가라 앚을 때마다 "동산의 노래"를 부르면서 혼자서 힘을 얻곤 하였다.


야목교회를 복귀하기 위해 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원리말씀으로 교인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내 설교를 듣고서 통일교회 원리라면서 감리교 중앙본부에 알리게 되었다.


목사나 전도사가 모이는 감리교 지방회의에서 나를 불러 세워놓고 심판을 했다. 그래서 나는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예수를 믿고, 한 성신인데 이단이 어디 있느냐"고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또 "통일교회서 가르치는 말씀이 옳고, 성경 해석이 옳고 해서 교인들에게 설교한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논박했다. 그러나 감리교 측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하여 제명 처분을 했다. 나는 제명 처분을 해도 좋다고 하고, 목회를 계속했다. 그러고 있으니까 감리교 중앙본부에서 다른 목사를 야목교회로 파송하게 되었다. 


주일이 되자 목사와 감리사가 왔다. 주일날 예배는 내가 설교를 했는데, 밤 예배 설교는 새로 온 목사가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저녁 예배를 보러 갔다가 그쪽에서 강단에 서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나왔다. 내가 나오니까 80명 교인이 다 나를 따라 나왔다. 그 자리에는 신학교 다니는 학생과 할머니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교회를 빼앗겼으니 집회 장소를 따로 짓자고 교인들끼리 의견이 모아졌다. 교인들이 땅과 재목들을 내놓아 10일만에 다시 교회를 짓게 되었다.  


* 선생님께서 성혼식이 지난 다음에 많은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목사로 임명을 해 주셨다. 


* 목사로 임명을 받고 제천지역장으로 부임받아 시무하다가 인천교회로 가게 되었다. 


* 인천에 가니까 밥을 얻어 먹을 곳이 없었다. …동인천교회에서 10리 떨어진 주안에서 유효영씨와 효민씨가 양계장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밥을 먹게 되었다. 점심은 굶고 아침 저녁 식사하기 위해 두 번씩 10리 길을 왕복하게 되었다.   


* 그때 선생님께서 지역장들에게 자전거를 사 주시고, 지구장들은 오토바이를 사 주셨다. 나는 자전거 하나를 하사받고 인천, 수원, 부평, 강화 등 7곳을 순회하기도 했다.


특히 어려웠던 일은 40일 특별전도기간에 보리밥만 먹고 활동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보리밥을 먹으면 뱃속에서 잘 받지 않아 굶다시피 하면서 활동하였다. 


* 그리고 경남 순회사를 거쳐 거제도 등 몇 곳에 있다가 구리교회를 책임지게 되었다. 구리교회에서 10여 년 시무하고 선생님께 말씀드려 내 나이 예순여섯에 목회를 그만 두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을 이북에서부터 가까이 모시고 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볼 때, 선생님은 우리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점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 첫째가 선생님은 영계의 모든 사실을 아신다는 것이다. 


둘째, 미래의 세계 정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인류의 비전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셋째, 예언을 하신다는 것이다. 


넷째, 잠과 식사를 주관하신다. 


다섯째, 선생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꿰뚫어 보시고, 끄집어 내신다. 


여섯째, 선생님의 계획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신다. 우리가 선생님 말씀대로 움직여 주지 못해서 그렇지, 선생님 말씀에 절대순종하고, 명령대로 움직여 준다면 무엇이든지 만사형통이다. 


* 나는 1960년도에 조정희 권사와 기성축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