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홍순애 대모님의 간증 - 꿈에 그리던 주님을 뵈옵고.

true2020 2021. 6. 11. 11:32

▣ 증언 3 꿈에 그리던 주님을 뵈옵고 - 홍순애 大母님.

* 1914.2.22 평안북도 정주 출생. 어머니 조원모 여사와 함께 독실한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였다.

* 1933년 초등학교 교사 한승운 선생과 결혼. 10년 뒤, 1943년 한학자 참어머님 무남독녀로 출산.

* 1951.1.14 월남

* 1956 입교

* 1994.11.7 성화.

 

156 나의 원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이다. 정주에서 태어나서 평안남도 안주에 나와 쭉 살았다. 나의 모친은 나를 가지기 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수를 믿고서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나의 이름은 교회 목사님이 지어 주셨다. 그렇게 해서 19세까지 장로교 신앙 가운데 자랐다.

 

19세 되던 해에 이용도 목사가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나는 사흘 동안 은혜를 받았다. 또 당시에는 이용도 목사와 같은 황국주 씨가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주었다. 황국주 일파는 한 50여 명 정도였는데 간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며 한반도를 순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밀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면서 부흥집회 때에는 아우성을 치며 기도했고 영적인 역사를 일으켰다.

 

황 전도사에게는 4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아들을 업고 다녔고 또 아래로 누이동생도 있었는데 그 처녀 역시 자기 오빠처럼 성령의 불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용도 목사로부터 사흘 동안 은혜를 많이 받았고 황국주 전도사의 누이동생한테도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황 전도사의 누이와 그의 아버지, 전도 대원 그리고 나까지 6명이 전도를 떠났다. 안주를 떠나 신의주까지 걸으면서 전도했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다. 나를 포함한 전도대원은 이렇게 외치고 황국주의 누이는 "오늘 저녁 아무 곳에서 모이니 바쁜 것을 제치고 나와 주시라"고 외쳤다. 그때는 밤에 한 3, 4백 명이 예배당에 모였다.

 

* 일본 사람들도 와서 설교를 들었는데 그들도 입을 벌리고 갈 정도로 그 처녀는 영적이었고 성령의 불에 취하여 설교를 했다. 그런데 그때는 이용도 목사와 황국주를 監理敎와 長老敎에서 埋葬시키려 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를 어떤 곳에서는 받아들였지만 어떤 곳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행은 계속 걸었다. 이렇게 밤낮 100리씩 걷게 되니 말할 수 없이 다리가 부었다. 가기는 가야겠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쌍지팡이를 짚고 걷기도 했다.

 

* 신의주까지 갔는데 철산에서 어떤 할머니가 신의 역사를 크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우리보다 은혜가 클지 모르니까 가서 은혜를 받자"고 했다.

 

그러나 동행들이 "우리도 은혜받은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전도하는 길이니까 다른 데로 가자" 고 했다. 그래서 신의주를 돌아 개천으로 갔다가 개천에서 강계까지 갔다. 강계에 도착하니 100일이 되었다. 강계에서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가서 외치려고 했다. 아예 만주서 죽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다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계시가 내렸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밤낮 100리를 걸어 다리가 붓고 쌍지팡이를 짚고 다녀도 안타깝고 더 일을 하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돌아오니 이상하게 맥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 예수교회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새 예수교회는 황국주와 이용도 목사에게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는데 기성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린 교회였다.

 

* 나는 새 예수교회가 좋게 느껴졌다.

 

* 그들은 어찌나 열렬하게 신앙생활을 했던지 그걸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희게 씻는다"는 노래를 부르며 밤낮 울었다. 무슨 죄가 그렇게 많은지 밤낮을 통곡하고 울었다. 또 밤낮을 기뻐 뛰었다. 북한은 굉장히 추운데 겨울에도 밤이 가는지 낮이 오는지 모르고 밤이면 오버를 뒤집어쓰고 기도를 했다.

 

나도 새 예수교회에 가서부터는 매일 울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하며 통곡하고 과거 어려서 친구들과 놀다가 누구를 조금 미워했다거나 하는 일이 생각나면 양심의 가책이 조금도 들지 않도록 깨끗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통곡하곤 했다. 매일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 기성교회 목사, 장로들에게 큰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천지가 개벽하고 섭리를 모르는 목사, 장로들은 모두 큰 징계를 받아 죽어 넘어가고 그러지 않으면 다 회개할 줄 알았다. 그런데 3년이 지났는데도 잠잠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별것 없다. 이제는 기성교회식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두 맥들이 풀렸다.

 

* 그전에 우리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이 먼저 철산에 가서 은혜를 받고 온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은혜를 받고 와서는 날더러 자꾸 거기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냥 철산에 가 보니 새 예수교회와는 다르더라. 너도 빨리 가서 은혜를 받고 더 기쁘게 살아라" 하면 좋겠는데 그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나보고 "사탄"이라고 하셨다. ···"순종 안 한다고 사탄이라고 욕만 하느냐"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으로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저녁에 새 예수교회 교인들과 같이 밤새 이야기를 하고 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없어서 12시가 넘어서도 다닐 수가 있었다. 새로 1시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나의 친정아버님은 범같이 아주 무서운 분이어서 부친 몰래 살짝 문을 열고 내 방에 들어갔다.

 

잠을 자려고 치마를 벗으려는데 "순애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 새로 1시가 넘었는데 누가 나를 부를까?" 하고 생각하면서 치마를 벗으려다가 다시 입고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또 한 번 "순애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아버지의 음성 같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순애야, 순애, 있느냐?" 하는 소리가 또 들렸다.

 

* "어머니가 나보고 사탄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 말을 듣지 않고 있으니 주님이 철산에 빨리 가야 된다는 뜻으로 나를 부르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내일은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해서 철산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가서 보니 어떤 할머니를 보고 "새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동태만 살폈다.

 

* 그분은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촌 할머니이시지만 참으로 놀랄 만하게 일을 해 나가셨다. 또 보통 말하실 때는 새색시같이 겸손하게 가만가만 말을 하시지만 기도하실 때 보면 어떤 남자보다도 훌륭하게 기도하셨다. 아주 우렁찬 음성으로 기도를 하시는데 모든 사람의 심정을 꿰뚫었고 모든 사람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성경도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분이었는데 설교도 훌륭하게 하셨다.

 

* 그리고 철산에 가서도 새 예수교회에 있을 때처럼 절대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한국에서 나온, 그리고 우리 손으로 짠 무명옷만 입었다. 그러면 마음이 편했다.

 

* 그때부터 감사를 드리면서 쭉 성주교를 믿었다. 그리고 새 예수교회는 발을 끊었다.

 

* 얼마가 지난 후에 비로소 새 주님이 "오늘날 우리 기독 신도들은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모릅니다. 본래 예수님은 돌아가셔야 할 분이 아니었는데 인간들이 죽인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 계속해서 새 주님은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죽인 살인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 그다음엔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음란으로 타락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 얼마나가 지난 후에 하루는 그 할머니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순애야, 내 한 가지 묻겠는데 예수님이 왜 정혼한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오셨는지 아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 대목을 가지고 기도했라. 기도하면 하늘이 가르쳐 주신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를 했으나 아무리 기도해도 알 길이 없었다.

 

* 그러면서 8년 동안 철산을 드나들었다. 그러는 동안 새 주님이 돌아가셨다. 이것은 참 특별한 일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누구를 믿고 나갈 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답답했다. 나가는 길이 딱 막힌 것이다.

 

* 그때 평양에 허호빈이라는 사람과 그의 남편 이일덕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나보다는 연하였다. 이일덕 씨로 말하면 사람 잘 치는 깡패였다. 평양에서도 이름난 깡패였다. 체격이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앙에 들어와서는 절대순종이었다. 남자치고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도 철산에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새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았고 큰 역사도 일으키곤 했다. 그 사람들은 때로는 엉뚱한 일도 잘했다. 하루는 하늘에서 집을 다 팔고서 새 주님한테 들어가 살라는 지시가 내렸다고 하면서 식구들을 다 내팽개치고 철산에 왔었다.

 

그러자 새 주님은 "그런 게 아니다. 새 주님 시대에는 가정을 다 파탄시키고 믿는 시대가 아니다. 가정은 그대로 지키면서 아담 해와가 지은 원죄는 음란죄라는 것과 죽였다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한국이 에덴동산이 된다는 것만 알고 싸워 나가야 한다. 가정을 버리고 믿으면 모든 사람에게 부덕이 되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한 번은 허호빈 씨에게 큰 계시가 내렸다. 허호빈 씨가 기도하는 가운데 "40일 동안 집회를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것도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실과만 먹으라고 하셨지 언제 육식이나 화식을 먹으라고 하셨느냐?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한 끼에 사과 한 개씩, 하루 3개만 먹고 40일 동안 힘써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60여 명의 평양교인들이 하루에 사과 3개씩만 먹고 40일 동안 기도를 했다. 그때 기도는 딴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서 눈을 감고 "새 주님 역사"라고만 외치는 것이었다.

 

* 사람들은 처음에는 작게 "새 주님 역사" 새 주님 역사" 그러다가도 나중에는 차차 높아져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빙 둘러서서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면 집이 떠나갈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큰일이 벌어진 줄 알고 다들 와서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가 해방될 즈음에 허호빈 씨에게 역사가 일어났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탕감받고 새 삶을 얻어 부활할 터이니 집에 가서 자는 식구들을 깨워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은 그냥 "역사"를 외치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소변이 마려운 것도 모르고 있다가 팬티에 그냥 흘려보내면서도 "역사"를 외치곤 했다.

 

* 돌아가신 새 주님 사진을 벽에다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경배를 드리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그들은 아주 다정하던 부부라, 부부간의 사랑 행위를 끊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했다.

 

하루는 기도를 하려니 성욕이 최고로 발동해서 일덕 씨가 부엌에 가서 칼을 가져와 가지고 우리 서로 누구든지 먼저 발동을 하는 사람의 것을 자르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다정한 부부라 전에도 몇 번 결심을 했다가도 실패를 하곤 했는데, ··· 칼을 갖다 놓고서야 성공을 하고 사탄이 꼼짝을 못 했다는 것이다.

 

* 聖主敎 시절에 평양 교인들은 일덕 씨 집에서 모였다. 그 집은 방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성주교 예배당으로 쓰고 하나는 살림방으로 쓰고 있었다.

 

* 하루는 허호빈 씨가 새벽에 엎드려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배에서부터 움직임이 일더니 화닥닥 일으켜 세우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주님이 "어머니!" 하고 부르셨다고 한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천한 계집이 어떻게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도리질을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뭐라고 부르면 좋겠느냐?"고 하시길래,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부부생활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냐, 네 말이 맞다. 그러면 나는 선생님이라 하고 너는 사모님이라 하자"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허호빈 씨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그 시간부터 주님이 허호빈 씨의 몸에 임하셔서 역사하기 시작했다. 그 몸에 임하셔서 직접 말씀을 해 주시는데 아무리 영통을 한다 해도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영통은 없었다.

 

* 하루는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너 춘향이 얘기 모르지? 내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 주지" 그러시면서 춘향이에 대한 얘기를 쭉 해 주셨다고 한다. 맨 마지막에는 "너도 춘향이와 같이 굳게 절개를 지키고 끝까지 나가라"고 당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허호빈 씨는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절대순종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주님이 유대 나라에 오셨던 것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 "내가 하늘나라의 아들이었기에 다행이지 그 마리아가 당시 예수님을 낳아서 오 동짓달(음력으로 열한 번째 달)에 강보에다 그냥 싸 놓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다"고 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얼어 죽지 않았지 그렇지 않았으면 얼어 죽었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말할 수 없는 천대와 멸시를 받으셨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을 것도 제대로 입지 못하셨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허호빈 씨가 통곡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주님에게 이런 내력이 있었느냐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우리도 그 말씀을 듣고는 큰 감명을 받았다.

 

* 예수님이 목수일을 도와주신 것은 당신이 하늘의 큰 사명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사이에 내가 온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인해 하늘 아버지의 큰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다시 그 큰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 놓기 위해서였다"고 하시면서 "그때 마리아와 요셉이 내 말을 듣고 따랐다면 하늘의 뜻이 다 이루어졌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 예수님은 15세 되던 해에 마리아에게 하늘의 크신 뜻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는 아담으로 오고 당신은 복귀한 해와 격이니 둘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어 나가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책임을 못 했으니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 25세 되던 해에 또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요셉이 뒤에서 밀어주었으면 예수님의 뜻은 가정을 중심하고 출발했을 것이다.

 

* 요셉의 가정을 뛰쳐나가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시는데 마리아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없다고 주제넘게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했으니 기가 막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마리아에 대해 욕을 해도 시원치 않은 심정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여인이여,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 다음에는 허호빈 씨에게 "너희들은 지금까지 철산의 김성도 할머니를 재림주님으로 믿었지? 그러나 재림주님은 남자다. 장성하신 주님이 지금 암행어사와 같이 숨어서 일하고 계시니까 이제부터 재림주님의 옷을 만들라"는 명령을 하셨다고 한다.

 

처음에 3년간은 자기네 친족끼리만 만들었는데 그들은 많은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 아침저녁으로 주님과 그 사모님에게 경배드렸다. 그리고 훈련을 시키는데 ···. 한 번은 오 동짓달에 베옷을 입고 나가서 거지 생활을 하라고 내쫓았다. 돈도 한 푼 안 주고 먹을 것도 안 주면서 나가 거지 생활하라고 했다. 그래도 "예" 하고 나갔다.

 

* 한 주일 있으니 사람을 내보내서 그만했으면 됐으니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비가 줄줄 오는 장마철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일덕 씨네는 아이들이 다 죽고 남매만 남았었는데 그 아이들 다 사탄 새끼니 보기 싫다고 당장에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주님을 모시고 사는데 너희 같은 역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 하고 아이들 손목을 잡고 비가 줄줄 오는데 평양시내를 돌아다니며 거지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한 일주일쯤 있으니 사람을 보내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분은 절대순종이었다. 나가라면 나가고 들어오라면 들어오고 경배하라면 경배하고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자기는 부인을 주님께 바쳤으니 절대순종한다고 하면서 순종했다.

 

재림주님의 옷을 준비하는데 전부 한국에서 나는 것 가지고 준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재림주님은 한국에 오셨으니 그냥 갓 쓰고, 바지저고리 입으실 테니까 전부 한국식으로 준비하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나는 명주와 무명으로만 옷을 만드는데, 명주를 한 필 사 오면 먼저 그것을 빠는데 그것도 숫자를 맞추어서 12번씩 빨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12번 다듬었다. 그다음에 옷을 만드는데 바지는 몇 치 몇 푼, 이렇게 전부 치수까지 가르쳐 주어서 그대로 했다고 한다. 바지저고리 조끼 두루마기를 만들고 이 세상에서 한 나라 임금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하라고 해서 자기 있는 정성을 다해서 했다고 한다.

 

자기네 재산은 얼마 안 되니까 친정어머니에게 가서 친정어머니를 감동시켜서는 몇 대로부터 내려오는 친정의 재산을 팔아 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루는 친정아버지가 반대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친정어머니는 "우리는 하늘의 큰 뜻을 위해서 재림주님의 옷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영감이 반대를 하니 어떻게 하느냐?" 고 생각하면서 묵상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어떤 고통에 못 이겨 소리소리 지르며 앓다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고 한다. 반대하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때까지 팔지 못하게 하던 것까지 몽땅 팔아서 재림주님의 옷을 만드는 데 바쳤다고 한다.

 

그러니 동네에서 "저 집은 이제 망했다. 몇 대째 내려오는 것까지 팔아 가니 망했다"고 하며 욕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3년간 옷을 만들었다고 한다.

 

계속 옷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는 잔치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잔치를 하더라도 쌀을 12번 쓸고, 12번 씻어서 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대로 정성껏 12번씩 쓸고, 씻었다.

 

* 복중교 시대에는 기도가 없었다. 경배만 드렸다. 아침 점심 저녁에는 공식적으로 경배드리고 그의 마음에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나면 경배를 드렸다.

 

* 간간이 일덕 씨에게 역사가 내렸다. 한 번은 주님께 오늘 저녁 진지를 해 드려야 하니 나가 장사해서 돈을 마련해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덕 씨는 또 "예" 하고 나갔다. 그렇게 대답하고 평양시내에 나와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본전이 있어야 장사를 하는데, 그때 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빙빙 돌아다니고 있는데 퍼뜩 자기 친구 생각이 나서 그 친구한테 가서 사정을 하여 몇 푼을 얻었다고 한다.

 

그걸로 수저를 사서 길거리에 놓고는 "오늘 저녁 주님께 저녁 진지를 해 드려야 하니 어떻게 하더라도 이익을 남기고 팔아야지" 하며 서 있는데 조금 있으니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 오는지 동사남북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변변치 않은 수저인데도 잘 사주었다고 한다. 순식간에 그 수저를 다 팔았다고 한다. 팔고 나서 계산해 보니 이익이 배나 남아서 그걸 가지고 주님께 진지해 드릴 것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그런 적도 있었다.

 

* 허호빈 씨가 역사를 시작해서 복중교를 일으킨 지 3년 만에 성주교 교인들을 전부 찾아내라는 계시가 내렸다. 성주교 교인들은 순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허호빈 씨는 성주교 교인들에게 "여러분은 한국을 대표하고 세계를 대표하는 교인들이니 정성을 합해서 재림주님의 옷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부터 여러 사람이 재림주님의 옷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 나셔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셨는데 재림주님 때는 그래서는 안 되니 아기 때 입으실 옷부터 시작해서 차차 나이를 드시면서 입으실 옷과 다 자라면서 입으실 옷, 이렇게 일생 입으실 옷을 전부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한국에서 난 천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단과 같은 것으로도 만들었다. 그래서 북한의 뒤주( 따위의 곡식담아 두는 세간하나. 나무궤짝같이 만드는데, 기둥짧은 있으며 뚜껑절반 앞쪽된다.)는 굉장히 큰데 그 뒤주에다 손톱이 안 들어갈 정도로 옷을 만들어선 꽉 채워 두었다.

 

허호빈 씨는 우리에게 "너희들은 이렇게 훌륭한 자리에 참여했으니 아까운 것이 뭐며 아낄 것이 뭐냐. 이제까지 아끼고 사랑하던 것이 있으면 전부 바쳐라" 했다.

 

* 점점 공산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했는데도 우리는 사탄세계가 점점 되어져 가고 있으니 어떻게든지 내적으로 더 정성을 모으고 열심히 하자"고 했다. 마음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모아졌다. 그래서 의복도 변변한 것 있으면 입고 다닐 수가 없었다. 팔고 싶은 마음에 눈에 띄면 당장 갖고 나가서 팔았다. 들고나가면 사람들이 사기는 잘 샀다.

 

* 하여튼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였다. 모두들 새 예수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성주교에서도 "이루어진다, 이루어진다" 하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제 복중교에서 재림주님을 맞게 되었으니 이처럼 황공하고 감사한 일이 어디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 그때 수는 안주 사람들이 잘 놓았다. 그래서 재림주님이 나타나시면 말씀하실 적에 깔고 앉으실 방석 두 개, 하나님 재림주님 것 또 하나는 어머님 것 이렇게 두 개씩을 수를 놓아 만들었다. 하여튼 옛날 왕궁에서 하던 것 이상으로 준비하라고 해서 있는 힘, 있는 정성을 다했다. 재림주님께 해 드릴 옷감을 사는 데는 절대 깎는 법이 없었다.

 

* 그렇게 314명이 뒤주에 손톱이 안 들어가게 가득 해 놓고 또 사모님 옷도 그와 같이 색색으로 해 놓았다. 병풍도 그냥 그리면 밉다고 해서 12바늘로 수를 놓아서 해 놓았다.

 

* 그렇게 정성을 들이면서 나가는데 하루는 생각하니 허호빈 씨가 참 부러웠다. 그분은 밤낮 재림주님을 모시고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그래서 나도 몽시에라도 재림주님을 한번 뵈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몽시를 받았다.

 

깨끗한 초가삼간 집이 꿈에 나타났다. 나는 아래위 하얗게 입고 부엌에서 진지를 준비했다. 일을 다 끝내고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부엌을 나오는데, 모친이 "이 방은 누구도 못 들어가는 방이란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 대꾸도 안 하고 공손하게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앉았다.

 

새색시같이 얌전히 앉아 있으니까, 건장하신 분이 동쪽에다 상을 하나 차려 놓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공부하시다가 척 돌아 앉으시면서 "내가 너 하나 찾으러 이와 같이 공부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얼마나 감사하고 황공한 지 눈물이 저절로 나고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분의 손을 잡고 가만히 울다가 깨었다.

 

* 또 하루는 허호빈 씨가 "홍씨네, 하늘에서 재림주님 내외분이 신으실 갓신(생가죽을 기름에 절여서 만든 것으로 진 땅에서 신는 신의 하나로 유혜()라고도 하고, 징을 박았다 하여 "징신"이라고도 한다.)과 사모紗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를 안주에서 해 오라 하신다"하는 것이었다. 그 명령을 받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즉시 "예" 대답하고서는 안주에 가서는 갓신 잘하기로 유명한 집에 갔다. ··· "이 신을 신으실 분으로 말하면 말할 수 없이 훌륭하신 분이니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 놓으라"고 했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터이니 최고로 만들라"고 하면서 치수를 다 적어 주고 왔다.

 

일주일 정도 있다가 가서 보니 갓신은 얌전하게 잘 만들어져 있었는데 사모는 성글성글한 게 마음에 안 들게 되었다. 그 사모를 척 받아 드니까 팔에서부터 절여 오기 시작하는데, 하늘이 노랗게 되고 아예 몸이 꼼짝도 못 하게 되고, 급기야 그 집 방바닥에 붙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같이 갔던 어머니 뻘 되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에게 "어머니, 나 야단났어요." 그러니까, "왜 그러냐?" 그러셨다. 그래서 "마음이 들지 않는 사모를 들고 서 있으니 갑자기 팔이 저려 오고 발이 방바닥에 붙어 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러니까, "그러면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니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리를 쳤다. "아니, 이 영감, 이게 뭡니까? 이 사모를 가져가면 내가 당장에 죽습니다. 다시 잘하지 못하겠소?" 하고 눈을 부릅뜨고 야단을 치니 그 영감도 벌벌 떨면서 "예! 이번에 정말 잘하겠습니다. 난 그렇게 귀하신 분이 신으실 신인줄 몰랐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일주일 만에 다시 가보니 그때는 정말 맘에 들게 잘해 놓았다. 돈을 치르고 평양에 가지고 나오니 참 마음이 놓였다.

 

* 그 후 한 달쯤 되었을 때 몽시에 그분을 또 보았다. 나는 몽시를 보더라도 아주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한 달 전에 보이셨던 분이 나에게 오면서 "야! 순애야, 내가 북으로 더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 될 터이니 네가 제일 아끼던 이불과 요와 양복 한 벌을 배낭에 넣어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 하고 집에 들어가니 벌써 누가 준비했는지 이불과 요가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양복도 연한 색이면서 천이 좋은 것으로 해 놓여져 있었다. 그래서 정말 감사하고 기가 막힌 일이구나 생각하면서 정성껏 싸서 배낭에 넣어 드렸다.

 

그러니까 그것을 둘러메시면서 "내가 3년 있다가 올 테니 너는 3년 동안 마음 변치 말고 기다려라" 하시더니, 북쪽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면서 혼자 외롭게 가시는 것이었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나는 한없이 울었다. 혼자 공부하러 가시는 모습이 그렇게 외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시고 "3년 동안 마음 변하지 말고 있으라"고, 물론 나는 마음 변하지 않지만 황공한 말씀을 하고 가신다고 하면서 울다가 잠을 깬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허호빈 씨는 감옥에 들어갔다. 허호빈 씨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은 신앙심이 얕은 교인 중 하나가 공산당에게 고해바쳤기 때문이다. 감옥에 들어간 허호빈 씨는 재림주님이 아무 날, 아무 시에 감옥에서 나오신다는 것이었다.

 

* 이날에 와서 우리 교회에 입교해서 들으니 그 무렵 선생님도 감옥에 계신 것을 알았다. 그래서 허호빈 씨는 그 사람들에게 재림주님이 언제 옥중에서 나오신다고 자꾸 얘기하신 것이다.

 

우리 복중교 교인들은 매일 감옥의 문밖에 서 있었다. 흰옷을 입고서 2, 30명은 언제나 서 있었다. 재림주님이 감옥에서 나오신다고 하니, 재림주님이 나오시면 맞으려고···.

 

내무서원들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옷을 몽땅 싣고 갔다. "너희들은 邪敎를 믿고 있다. 남을 속여서 물질을 착취했으니 이것은 우리가 전부 싣고 간다"고 하면서 재림주님 내외분 옷과 예수님 옷까지 한 트럭 가득 싣고 갔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참을 분하고 원통했다.

 

* 그렇게 원통해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다시 만들라"는 지시가 내렸다. 비록 사탄이 다 가져가긴 했지만 너희들이 들인 정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은 식구들이 한 1년간 정성을 들여서 다시 그만큼 만들어 놓았다. 그때까지도 허호빈 씨는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공산당은 점점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이남으로 가자고 하셨다. "아니, 허호빈 씨가 아직 옥중에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냥 가겠느냐?" 했더니, "여기 그냥 있다가는 우리가 죽는다"고 하시면서 이남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남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냥 가기가 뭐했다.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이남으로 가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6.25 직전에 어머니와 아기를 데리고 이남으로 왔다.

 

허호빈 씨는 옥에서 나오지 못했고 재림주님은 거기에 나타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평양을 등지고 나오려니 기가 막히고 아픈 가슴은 다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와야 될 것만 같아서 이남으로 왔다.

 

남한은 나에게는 생소한 곳이었다. 나는 이전에 서울에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다. 정석천 장로님(성주교 교인이었던 분)이 먼저 이남으로 왔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정장로님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서울에 온 후 6.25 동란이 나고 1.4 후퇴가 있었다. 1.4 후퇴 때 나는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에서 정 장로님을 만났다.

 

* "우리가 이북에 있을 적에 새 주님과 허호빈 씨를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고 큰 역사가 있었다. 재림주님은 한국에 오실 것이니 이 길을 찾기 위해 우리가 모여 함께 기도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그래서 제주도에 가 있다가 부산에 나와 있던 남편을 부르고 정석온 권사님도 부산에서 올라오시라고 했다. 그래서 여러 식구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에덴동산을 이룬다고 남편과도 성별하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그러면 이혼하자 하고는 떠나 버렸다.

 

우리 식구끼리 기도하니 "이제는 열심히 기도만 해서는 안 되고 생식을 해야 된다"는 계시가 내렸다. 그래서 우리는 솔잎을 먹기 시작했다. ··· 김칫국도 소금만 쳐서 먹었다.

 

나는 어머니를 소학교까지는 내가 공부시켜야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껴서 대구에서 조그만 장사를 시작했다. 김칫국과 솔잎과 왜 콩만 먹고 그것도 하루에 두 끼니씩만 하면서 장사를 했는데 기운만 조금 없다 뿐이지 정신은 더 말짱했다.

 

* 그렇게 석 달가량 장사를 했다. 성주교와 복중교를 통해서 신앙했던 나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지혜라는 것을 몰랐다.

 

친정어머니께서 이렇게 믿고 나가다가는 안 되겠다고 하셔서 제주도로 들어갔다. 어머니도 전학을 시켰다. 어머니도 소학교만 졸업한 다음에는 도인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제주도에 가서도 삼시 세 끼니를 납작 보리쌀을 불려 가지고 무김치와 같이 먹었다.

 

* 화식하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좁쌀을 받아다가 밥을 해 드렸다.

 

* 그렇게 생식을 하면서 9개월을 지냈다.

 

* 그렇게 9개월을 보내니 동생에게서 "어머니를 모시고 빨리 육지로 나오라"는 편지가 왔다. 할 수 없이 육지로 나가야 할 뜻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 제주도를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제주도에서 잘 나왔다. 그때 나오지 않았으면 제주도에서 그냥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춘천으로 나왔다. 당시 내 동생은 춘천에서 보급창장으로 있었다. 나는 춘천에 가서도 장사를 시작했다. 1년쯤 지나 어머니가 국민학교 상급생일 즈음에 정 장로님한테서 편지가 왔다. 성주교회와 똑같은 교회가 서울에 있는데 선생님이 지금 대구에 내려와서 말씀을 하시니 빨리 와서 들으라는 것이었다. 그때가 동짓달이었는데 그때는 못 가고 12월 말경, 즉 크리스마스 직전에 대구로 내려갔다.

 

그때 하늘에선 훌륭한 몽시를 하나 보였 주셨다. 꿈에 아주 큰 강이 하나 나타나더니 거기에 하얀 차돌이 죽 깔려 있는데 희고 찬란한 배 한 척, 거북선이 나타났다. 눈부신 광채가 나는 훌륭한 배였다. 하얀 용이 꼬리를 치면서 배 뚜껑을 열고 나와서 헤엄쳐 내 앞에 와서는 나를 환영하였다."

 

거, 이상도 하다. 정 장로님이 훌륭한 교회가 있다고 해서 가려고 하는데 나같이 부족한 것한테 와서 나를 환영한다" 하고 서 있는데 새 주님이 나타나서는 "아이고, 우리 석진이(제주도에 가 있던 남편)는 약혼은 했는데 결혼은 못 했으니 어떻게 하나?" 하시며 발을 동동 구르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나는 "새 주님은 이상도 하시다. 나는 지금 훌륭한 교회를 찾아 내려 하고 있는데 나를 위해서는 걱정도 안 하시고 석진이만 걱정하신다"고 생각했다.

 

대구로 내려가니 정 장로님이 "이제야 우리가 주님을 찾았수다래. 복중교에서 옷을 준비하고 맞으려던 그분을 이제야 우리가 찾았습니다. 그분이 대구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늦으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서울로 올라가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면 그리운 분을 뵈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부족함만이 느껴졌다.

 

* 이렇게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날 저녁 몽시에 황금용 한 쌍이 서울 쪽을 향하여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대구로 올 때는 하얀 용이 보이더니, 대구를 떠나려 하니 黃金龍 한 쌍이 보인다. 그것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서울에 올라와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인사를 드리니 이북에서 두 번 몽시에 뵈었던 바로 그분이었다. 너무나 황공한 마음이 들어서 몸 둘 곳을 몰랐다. 선생님은 나에게 "너, 너" 하셨다. 선생님은 "네까짓 것이 뭐 아느냐"는 식으로 본 체도 안 하셨다.

 

마음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다. 북한에서 몽시로 뵌 분이요, 이제 죽으나 사나 따라가야 할 분이요, 목이 끊어져도 모셔야 할 분인데 저렇게 노하셨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앞이 캄캄했다. 죄송스럽기도 하고 죽어야 할지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기가 막혔다. 그래도 자꾸 기도했다.

 

"아버님,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저렇게 노하셨으니 어떻게 합니까? 제가 무슨 죄를 자복해야 되겠습니까?"라고 자꾸 기도했다. 한참 기도를 하니 "어떻게 하든지 이 고비를 넘겨라. 이 고비를 넘기지 않으면 너는 가롯 유다가 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얼마를 지냈다.

 

크리스마스가 되어 강냉이를 나누어 주셔도 다른 식구들은 살살 나누어 주시는데 내 앞에 오셔서는 "콱!" 하고 던져 주셨다. 다른 사람이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한 사람을 놓고도 밤을 새워 말씀을 해 주시고 얼마나 반가워하시고 사랑해 주시는지 모르는데, 나한테만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가라는 말씀은 안 하셨다. 그때 가라고까지 하셨으면 목을 매 죽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모든 것을 꾹 참고 고비를 넘으라고 하셨기에 그냥 참고 있었다. 기도를 하면 여러 가지를 몽시로 보여 주시기는 했다. 기도를 하면 몽시로는 잘 보여 주시지만 실제로는 노하시니 죽을 노릇이었다.

 

* 그래도 나가라고는 하지 않으셔서 식구들이 있으면 또 들어가서 마주 앉아 있곤 했다. 한 주일을 그렇게 보냈다. 학대를 하셔도 그냥 있었다. 그러니 가슴은 타고 입술은 터지고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한 주일 만에 선생님께서 주일에 설교를 하시는데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참아버지로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죄가 얼마나 크냐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심정에 대해 설교를 하셨다.

 

좌우간 새 예수교, 성주교, 복중교를 다니며 많이 울어 보았지만 그때처럼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울어도 시원치가 않았다. 어떻게나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프고 원통한지 말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설교를 하시는데 나만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이 급했다. 설교가 끝나고 식구들이 다 나가기 전에 정석온 권사님이 선생님에게 내 이름을 대지 않고 "선생님, 선생님이 설교하시기 시작해서 끝까지 통곡하신 분이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니 선생님께서 그때서야 "응, 거 이름이 무어래?"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일이 어디 있는가. 그 말씀을 들으니 이제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방에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니 "응, 거기 앉으라우" 그러셨다. 그 慰勞의 말씀이 얼마나 감사하고 황공한 지 감개무량했다.

 

어머니에게는 세 살 때부터 복중교에서부터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던 분이 서울에 나타나셨으니 경배드리러 가자고 해서 같이 서울에 왔다. 어머니는 좌우간 신앙에 대해서는 절대순종이었다.

 

어머니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선생님께 경배를 드리니 "거 누구냐고 물으셨다. "제 딸입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눈을 척 감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한학자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고 세 번 반복하셨다. 이상하다, 어째서 어머니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말씀하시나 하고 있으니 또 "한학자, 앞으로 희생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1943년 정월 초 엿새날 새벽 4시 30분에 탄생하셨다. 다른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응아!" 하고 우는데 어머니는 우시지 않고 "랄라랄라" 그러셨다. 그래서 할머니가 "이 처녀는 커서 음악가가 되려나 보다"고 말씀하셨다.

 

첫 미역국을 먹고 어머니를 안고 잠이 들었는데 시커먼 뿔난 사탄이 다가와서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였다. 나는 "사탄아! 물러가라. 이 딸이 내게 얼마나 중한 딸인데 네가 무어길래 죽이려고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어머니께서 "야, 네가 속이 허한가 보다"라고 하셨다. "그런 것이 아니고 뿔이 난 사탄이 와서 아기를 죽이려고 하길래 제가 소리를 쳤습니다"라고 하니 "거, 이상하다"고 하셨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사탄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니 이상했다. 그리고 "이 아기는 정성을 들여서 키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앞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게 깨끗하고 아름답게 길러서 주님께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쯤 되니 몽시에 주님이 하얀 구름을 타고 흰옷을 입고 나타나시더니 "순애야, 그 아기를 위해서 걱정했지? 걱정하지 마라. 이 아기는 주님의 딸이고 너는 유모와 같다. 젖만 잘 먹여서 양육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명령을 나는 지금까지 마음에 단단히 새기고 살았다. 어머니는 자라실 때 보통 아기들과는 달랐다. 돌 전에 걸으시고 말까지 하셨다. 말 한마디도 아주 똑똑히 하셨다. 얼마나 똑똑한지 몰랐다.

 

* 북한에서 6살 나실 때까지 계셨다. 그런데 6년 동안 몽시에 보면 늘 사탄이 어머니를 죽이려고 따라다녔다. 그래서 나는 꼬박 6년을 사탄과 싸웠다. 나는 깊은 뜻은 모르고 왜 사탄이 이렇게 쫓아다니며 죽이려고 하는가 하고 이상하게만 생각했다.

 

38선을 넘어 이남에 내려와 친구 집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는데 낯선 남자 한 사람이 어머님을 보더니 "이분은 천지간에 신성한 분이십니다. 두 가지의 큰 일을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도로 크게 성공해야 크게 되시지 그렇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실 것 같으면 반대로 역적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했다. 그러니 그 사람은 벌써 세상에 나실 때 그렇게 타고나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잘 택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떻게 하든지 道로 成功을 시켜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 오늘날 어머니가 되신 후에도 나에게는 조금도 다른 생각은 없다. 지금도 선생님이나 어머니를 대하면 똑같이 어렵기만 하다. 선생님 앞에서나 어머니 앞에서나 마음 놓고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언제나 부족한 생각뿐이고 몸 둘 곳을 모르겠다.

 

나는 그분이 어머니가 되신 후로는 육신의 생각으로 내 딸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 되실 적에 하늘에서 나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신 말씀이 계시고 지금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절대로 세상적인 생각은 안 가지고 나간다. 절대적으로 참아버지 참어머니로 믿으면서 다만 하나의 식구 입장에서 나갈 뿐이다.

 

* 하늘은 예진 아기님이 태어나서 완전히 하늘의 사위기대를 이루었다고 기뻐하며 분명히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춤을 추었다.

 

 

◑ 忠心奉天 大母님

 

* 1914년 2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탄생

* 부친 홍유일 선생과 모친 조원모 여사의 1남 1녀 중 맏딸로 출생

* 성함은 洪順愛

* 정주 출생이지만 안주에서 주로 많이 사셨다. 

* 1934년 3월 5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한승운 선생과 결혼

* 1943년 1월 6일 새벽 4시 30분 한학자 참어머님 출산

* 출산 후 첫 미역국을 먹고 참어머님을 안고 잠이 들려는 순간, 사탄이 나타나 참어머님을 죽이려 하자 대모님이 호통을 치면서 사탄을 쫓아냈고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셨다.

* 한 달 정도 지난 후 몽시에 이런 말씀이 내렸다.

"순애야, 아이를 위해서 걱정했지? 걱정하지 마라. 이 아기는 주님의 딸이고 너는 유모와 같다. 젖만 잘 먹여서 양육하라."

* 그 후로도 6년간 참어머님을 죽이려는 사탄과 싸워야 했다.

 

* 3대 외동딸 가계

- 사탄의 혈통을 성별한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다.

- 조원모 할머니- 홍순애 대모님-  한학자 참어머님

 

* 조원모 할머니가 교회에 다닌 후, 대모님을 잉태하여 출산했는데 이름을 홍순애로 지어 주었다.

* 대모님은 19세까지 장로교 신앙 가운데 성장하였다.

* 감리교와 장로교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던 이용도 목사와 그 후 황국주 씨의 영적 역사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새 예수교회를 만들었다. 

* 새 주님이라고 불리는 할머니를 모시는 성주교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라는 주님의 뜻을 받아 철산으로 갔다. 

* 해방될 즈음부터는 허호빈 씨를 중심한 복중교의 신앙에 몰두하였다. 

 

* 1973년 12월 23일 미국 이스트 가든

* 1976년 10월 4일 천승일 선포

* 1976년 12월 21일 종족 축복을 받으셨다.

* 1979년 9월 17일 귀국

 

* 10년 기도한 끝에 하나님께서는 축복가정이 못 사는 이유는 바로 식구들의 몸속에 개미알처럼 붙어 있는 영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영들을 분립하려면 육신을 가진 자는 안 되고, 영인체를 가진 자가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대모님은 "하나님,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저를 당신 품으로 데려가셔서 방법만 가르쳐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며 매달렸다. 대모님의 간절한 기도와 식구 중에서 누군가 영 분립의 역사를 하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참아버님의 기도가 하나를 이루었고, 마침내 참아버님께서는 "당신이 빨리 영계로 가서 이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소"라고 말씀하셨다.

 

* 1989년 11월 3일 75세로 승화

* 1989년 11월 6일 오전 9시 40분 귀환식 참아버님 기도 내용 중

"지상과 천상세계의 중간적 매개의 자리에서 인류를 하늘 앞에 연결시키는 중보적인 책임자로서 참부모님이 임명하오니···. 지상 천상지옥을 사탄이 넘나드는 곳과 천상세계의 지옥의 맨 밑으로부터 천상세계의 길을 닦아놓는 데 있어서 중보적인 책임을 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 1992년 김효남 훈모님에게 재림

"저는 영계를 아는 여자가 되는 것이 싫었고 또 너무 부족해서 못 하겠다고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이 자리를 빌려 대모님에게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제가 대모님에게 못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 흥진님이 영계로 부르셔서 대모님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영계에 가면서 저는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영계로 가는 데는 그냥 무아지경에 빠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육신과 완전히 분리되어 영인체 자체만이 영계로 가는 것이다. 영계에 가서 흥진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축복가정이 머물 수 있는 천국으로부터 수많은 영계의 계층과 지옥까지 전체적으로 둘러보게 되었다. 만약 제가 천국에서부터 지옥까지 영계 전체를 다 돌아보지 못했더라면 대모님 역사에 100% 충실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가 지상에 있을 때는 대모님께 못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영계에 가서 지옥 전체를 둘러보니까 흥진님과 대모님의 역사는 꼭 있어야만 하는 중요한 섭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으로 계시면서 "내가 축복해 놓은 가정들의 몸속에 저렇게 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은 어떠한지 알겠느냐? 내가 저 자식들을 만지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그 가정에 가서 머무르고 싶고 그 자식들이 달라고 하는 대로 주면서 축복해 주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나의 심정을 알겠느냐? 육신을 쓰고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겠느냐?" 하시면서 한이 맺혀 우시는데, 그 모습을 뵙고 못하겠다고 한 저는 대단히 죄송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하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때 대모님을 대단히 기뻐하시면서 저를 끌어안고 볼을 비비며 우시면서 뒹구셨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래, 둘이 한 몸이 되어서 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 노아 할아버지를 만났다. 노아 할아버지는 "앞으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당신이 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오. 오늘 이 시간부터 김효남은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모든 일은 하나님과 참부모님, 그리고 흥진님 대모님이 하셨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이름은 없다고 생각하시오"라고 말했다. (1998.11.27 제300차 수련회 간증)    

 

*1994년 11월 7일 승화 5주기 대모님 기념관 건립 지시, 忠心奉天 휘호 하사.

* 1995년 1월 19일 청평수련원에서 대모님의 성신역사가 시작되었다.

* 1995년 8월 24일 기념관에서 충모님 가정, 대모님 가정, 대모님과 한승운 할아버지 영인 축복. 충의애관으로 명명

 

* 1996년 1월 4일 애승일 기념식에서 하신 말씀

참아버님께서는 대모님에 대하여 어머님의 역사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공을 세우신 분이다. 어머니가 낳은 아기들을 중심 삼고 누구보다도 정성을 들이며 승화할 때까지 부모님의 가정을 일심일념으로 받들어 나온 대표적인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대모라는 이름을 하사한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