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노정

피난 - 용매도 龍媒島

true2020 2021. 2. 28. 21:45

▣ 1961.10.14(토) 전본부교회. 부모의 심정으로 끝까지 주라.

- 흥남 감옥 출옥 기념일 (이북 출감일)

 

011-234 龍媒島 용매도를 가기 위해 갯물 길을 건널 때 이 길을 못 가면 하늘이 망한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아버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 보라.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어차피 간다. 여러분이 지쳐도 간다.

 

사탄 앞에 잃어버린 것은 사탄 앞에 가야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 1969.5.11(일) 짐을 지우는 자가 되지 말자. 전본부교회.

- 새벽 경배 후 말씀.

 

022-330 선생님이 이북에서 피난 나올 때 삼팔선 근처에서 접경선을 넘어야 하는데 당시의 때가 아주 긴박하다는 것을 예감했습니다. 접경지대가 위태하는 걸 알아 가지고 접경선을 넘으려 하는데 경비대원들이 쫓지 않아요. 쫓으면 쫓는 만큼 밀려나갔다가는 경비대원들이 앞으로 가면 또 그들 꽁무니를 따라서 그만큼 나가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이 불리하다는 것을 벌써 확실히 알거든요.

 

그래 가지고 경비대원들이 전부 다 꽁무니 빼는 것을 현장에서 봤어요. 그날 밤에는 졸리기는 한데 잠은 안 오고 예감이 이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경비대원들이 보따리를 싸서 내빼는 겁니다. 그럴 때는 다르게 가는 길이 없어요. 그 사람들을 따라가는 수밖에요. 일선 경비대니까. 

 

그래서 가만가만 따라가니까 배를 타고 용매도로 가요. 해주에서 청단까지가 80리 길인데 그때가 새벽 2시였어요. 경비대와 같이 퇴각 안 하면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긴박한 와중에서 선생님은 걱정이 되어 숨이 막힐 지경인데 이 녀석들은 걸으면서 졸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서 갔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걸으면서 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 1969.10.14(화) 여지없이 투신하는 여러분이 돼라. 종묘.

- 흥남 감옥 출감 19주년과 서대문 형무소 출감 14주년 기념예배.

 

026-016 내가 일전에 용매도 사건을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피난길을 가면서도 이 삼천만 민족 가운데서 최고로 어려운 피난길을 가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까지 이 길을 가리라! 내 맥박이 멈출 때까지 가리라! 아직까지 호흡이 끊기지 않았으니 가야 된다는 결심을 하고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철석같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붙들고 눈물 흘리면서 이 삼천만 민족이 피난민으로서 고생하는 것을 동정하는 입장에서 이 삼천만을 내 등에 업고 간다는 신념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가 아무리 휘청거려도 쓰러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식구들 가운데에는 돼먹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적당히 출세하려는 사람은 적당히 망하는 것입니다.

 

▣ 1970.12.27(일) 뜻과 나. 전본부교회.

037-228 선생님이 삼팔선을 넘어올 때 그랬습니다. 선생님이 그때 틀림없이 사태가 불리할 것을 예감했는데 넘어가야 할 때가 언제가 될지 몰랐습니다. 그때가 새벽이 될는지 낮이 될는지 밤이 될는지 혹은 안개 낀 아침이 될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북한 땅에서 고생한 것도 원통한데 더 남아 있으면 큰일난다는 생각이 들어 삼팔선 접경까지 갔습니다. 거기에 집 한 채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발짝만 가면 이남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별의별 냄새가 났지만 그곳이 복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위급한 때 한 걸음만 옮겨 놓으면 선생님은 이남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이남에 가게 되느냐 하면 선생님이 제일 먼저 간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따리 싸는데 거들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민군들이 몰려오게 되면 모가지가 잘릴 것이니 삼팔선에서 도망가야 빨리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별수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거기서 머물다가 용매도로 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선생님에게 있었습니다.

 

▣ 1972.6.4(일) 뜻과 우리의 생애. 전본부교회.

057-274 내가 언제나 얘기하지만 이북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삼팔선을 넘게 될 때 틀림없이 삼팔선 쪽에 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세를 볼 때 말이에요, 가만히 영적으로 생각해 보니까 사태가 불리하다는 거예요. 마음이 자꾸 이남으로 넘어가려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것을 여러분은 모르지만 선생님에게는 뭐 있다고요. 뭐가 있을 게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큰일을 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딱 접경지대에 왔는데 파수대, 경비대들이 아랫방에는 경비대원들이 있고 우리는 윗방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이남으로 가려고 한다. 우리는 공산당이 아니다 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하루저녁 넘어가려다 못 넘어가고 이틀 저녁 못 넘어가고 사흘 만에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때는 재치가 있어야 되고 눈치가 빨라야 된다구요. 그렇지요? 그런 때는 보따리를 싸더라도 먼저 싸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주인들보다 앞서야지 주인들보다 뒤떨어져서는 안 되는 거라고요. 그럴 때는 날쌔어야 되는 거라구요.

 

아, 이래 가지고 제일 먼저 배를 탔는데 떼거리들이 몰려와서 아우성이 벌어지게 되니까 어떻게 됐느냐 하면 순경, 경사, 그리고 경사보다도 계급이 높은 사람하고 일반 사람들을 체인지하는 거라구요. 바꿔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군경의 가족이 아니면 끌어내는 거라구요. 이런 판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난데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쫓겨나야지 별수 있어요?

 

용매도에 갈 때의 제일 기수가 결국은 다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일화가 많다구요. 그럴 때는 날쌔어야 됩니다. 날쌔어야 돼. 환경에 몰려서 그렇게 되었지 틀림없이 선두로 이남에 나올 뻔했습니다. 조수가 한 시간만 빨리 들어왔더라도 나올 뻔했는데 딱 걸렸다고요.

 

이래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구요. 갈 때는 소망을 삼고 가니 힘든 줄 몰랐다구요. 사흘 동안 밤잠을 못 자고 갔던 것입니다.

 

여기 원필이가 있지만 원필이는 그때 열아홉 살, 철모르는 때이니 뭘 알아요? 그저 먹고 배불러야 좋아하고 고단하면 잠자야 좋아할 때라고요. 그런데 새벽 2시에 깨워 가지고 가게 한 것입니다.

 

삼팔선에서 청단까지 80리 길입니다. 그 길을 달밤에 가는데···. 그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단한지 이 사람은 보따리를 메고 가면서도 조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은 그렇다구요. 그러나 선생님은 한 발자국이 바쁜 거예요.

 

오늘 저녁 중으로 임진강 턱까지 가지 않으며 안 된다 하는 그런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선생님이 비상 작전, 비상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안테나를 최고로 뽑아 보는 거라고요. 보통 때에는 그런 놀음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은 저녁이 되었다고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전부 다 부락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우리들만 12시를 지나 한 시에 임진강 접경 밑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거기는 뭐 사람들이 전부 이남으로 갔기 때문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빈집에 들어갔는데 자긴 뭘 자요.

 

그런데 그날 임진강이 얼지 않았다고요. "이 강이 얼지 않으면 안 될 텐데···" 하고 걱정을 했는데 하나님이 보호하사 그날 저녁에 딱 얼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벽같이 첫 번에 넘어왔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제일 빨리 온 줄 알았는데 그 동네에 미리 먼저 왔 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래 가지고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우리 일행을 마지막으로 막아 버렸습니다. 그 뒤 사람들은 전부 뒤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럴 때 한 1분만 서성댔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나? 사람 팔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구요. 아예 망쳐 버리는 거라고요. 그런 일들이 우리 인생살이에도 많이 벌어지는데 천도를 가려 가는 길 앞에 없겠느냐 이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하냐 이거야. 그걸 여러분은 모른다구요.

 

▣ 1967.2.14(화) 전통과 세계 복귀. 전본부교회.

- 제48회 참부모님 탄신일 기념예배 두 번째 말씀.

 

158-054 내가 이남 땅에 내려감으로 말미암아 북한이 어떻게 될 것이다. 앞으로 전망을 어느 정도까지 했기 때문에 삼팔선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상당히 고심했던 것입니다.

 

그런 내가 고향을 떠나게 될 때 부모 형제 친척들을 생각 안 했겠어요? 그래 가지고 이남에 나올 때까지 하늘이 역사를 많이 한 거예요.

 

임진강을 넘으면서 그때 삼팔선 분기점이 임진강이었거든요. 임진강을 어떻게 넘느냐 이거예요. 만일에 그때 전부 내 말대로 안 했으면 못 나오는 거예요. 쉼없이 앞길을 재촉하는데 나는 ···.

 

그때에 원필이지 이 사람은 세상을 모르니까 그럴 거에요. 삼팔선에서 경비 경찰관들이 전부 다 후퇴니 사태가 불리한 것이거든요. 그럴 때는 재빨리 아주 먼저 뛰어야 된다 이거예요.

 

이래 가지고 여기 몽매도를 통해서 이남 나갈 배를 탔다가 그때도 경찰관들이 전부 다 후퇴하는 바람에 뭐뭐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타겠어요? 그래 가지고 용매도 갔다가 배가 없어서 다시 나온 거예요. 다시 나와 가지고 삼팔선을 넘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문제를 겪으면서 나왔는데 오늘 저녁 같이 저녁때가 되었는데 그 피난 나온 사람들이 걸어가다가 지친 거예요. 거기다가 독 같은 사람을 자전거에 다 태우고 밀고 나오려니 말이에요, 얼마나 힘들어요. 남들은 전부 자기가 업은 애기도 버리고 가는 판국인데, 이 사람은 나보다 큰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다리가 부러져 자전거에 태워 가지고 끌고 나갔으니 얼마나 피곤했겠어요? 이렇게 되니까 피곤하기 한이 없거든요. 이렇게 해 가지고 남한까지 내려오는데 그거 오죽하겠어요? 이렇게 되면 피곤하거든요.

 

그런데 저녁이 되니까 전부 다 동네 방네 들어가 가지고 자려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선생님은 밤을 새워서라도 임진강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예요. 이건 뭐 가자니까 얼마나···. 

 

남들은 다 들어가 자는데 선생님이 가자니까 "선생님 고집이 뭐 저래!" 이럴 거 아니에요? 사무룩해 가지고···. 밤에 남들은 전부 다 자는데 우리 셋이서만 자전거를 끌고 임진강까지 왔다구요. 임진강 강가에 와서 잤습니다. 한 시 반인가 두 시쯤. 새로 두 시 그때에 도착했거든요.

 

그다음에 걱정이 뭐냐 하면 임진강을 건너가려면 물이 얼어야 할 텐데 ···.  그때 날이 추워져서 임진강이 얼어 버렸어요. 얼음이 얼어 가지고 가 보니까 강을 못 건너가 기다린 사람이 많더라 이거예요.

 

이래서 새벽같이 일어나 가지고 나섰던 거예요. 임진강이 얼어붙어서 결국 강을 건너갔는데 내가 맨 마지막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후부터는 커트예요. 커트해 가지고 전부 다 돌려보내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남한 땅에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