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김영운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증언 2 -204)

true2020 2020. 9. 2. 12:03

* 1915년 황해도 해주 출생.

* 1938년 일본 관서학원대학 신학부 입학.

* 1942년 일본 관서학원대학 신학부 졸업.

* 1948년~51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 임마누엘 칼리지 수료.

* 1952년 2월 이화여대 교수

* 1954년 12월 통일교회 입교.

* 1965년 4월 영국 선교사. 곧 미국 선교사로 복귀.

 

나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이다. 1915년 1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나는 유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16세 때 가정적인 전통을 깨고 감리교회에 입교, 크리스천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내가 크리스천이 될 무렵 이용도 목사의 순회 부흥회가 燎原(불타고 있는 벌판.)의 불길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었는데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설교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 이때 나는 "네가 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찾았다."는 계시를 받았다. 나는 이때 무엇보다도 순수성을 생명같이 여기고 있었다. 18세가 되었을 떼 스웨덴 보르그, 선다싱에 대한 서적에 심취하기도 했다.

 

* 해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교원 양성소에서 9개월간 교육을 받게 되었는 그 이후부터 남을 가르치는 교사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나는 소학교에서 1년 반 동안 시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사랑주의를 신조로 학생을 대했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호평을 받게 됐고 그것을 계기로 숙망이던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됐다.

 

당시 내가 다니게 된 일본 관서학원대학의 신학부에서는 여학생을 받아주지 않았는데 책임자의 호의로 1937년 가을학기부터 공부를 하게 됐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난 뒤 나의 성적이 학과에서 가장 우수하자 학교에서는 5년간 장학금을 줄 테니 첫 학기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했다.

 

졸업 후에는 여자고등 성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다가 금강산 내금강에 들어가서 약 1년간 기도생활을 했다. 이 장로라는 분의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며 보내던 중 하루는 형사가 조사를 하러 왔었다. 그런데 조사를 하러 왔던 그 형사가 도리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쌀과 고기를 보내 주었고, 그 후에는 그의 소개로 금융조합에 취직까지 하게 되어 얼마간 근무를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에는 계성여고 영어 교사로 1년간 시무하다가 개종 문제로 그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 무렵 영락교회가 창립되어 그 교회에 다니면서 새로 생긴 중앙신학교에 나가 한 학기 동안 강의했다.    

 

그러다가 현영학 씨 추천으로 이화대학 사회사업과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1년 후에는 다시 캐나다 선교부의 스칼라쉽으로 토론토대학교에서 또다시 신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 그 대학을 수료하자 선교부에서는 내가 그냥 한국에 가는 것보다는 이화대학에서 사회사업과 담당교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사회사업, 국가재건, 이 3가지 연구에 목표를 두고 영국을 중심으로 연구 여행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40일간, 독일에서 2개월간 체류하면서 유명 대학의 권위 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우연치 않게 한국에서 떠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배로만 다니게 됐다. 한국에서 캐나다까지 12일이나 걸렸고 구라파에서 한국에 오기까지는 화물선을 탔는데 무려 두 달이나 걸렸다. 화란에서 떠난 화물선은 여러 곳에서 기착하게 됐는데 머무르는 곳마다 승객 5명과 함께 여러 유명한 곳을 둘러보게 됐다.

 

나는 이런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감을 하나도 갖지 않았는데 그것은 배 안에서 강의 준비 등 책과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산 항구에 내리자 곧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부산에 도착할 때는 1952년 2월이었는데 당시 전쟁 중이라서 이화여대가 서대신동 천막집으로 옮겨와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첫 강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의 강의를 듣고 김활란 박사는 물론 모든 학생들이 감동을 받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206 1954년 11월 말 나는 신병으로 인하여 수일 동안 자유롭게 거동도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고 한충화 선생과 안창성 선생이 찾아와서 전도하면서 계시받은 내용을 발표하는 곳이 있으니 가 보자고 하기에 그 초청에 쾌히 응하기로 했다.

 

그런데 탕감 역사였는지 모르겠으니 갑자기 심한 위경련이 일어나 병원으로 실려 가서 3주일 만에 퇴원을 하고 나서야 장충동 양 선생 댁으로 찾아갔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을 뵙게 되었고 유 협회장님 외에 다수의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날이 12월 27일이었다.   

 

그 무렵 이대에서는 어디서 들은 보도인지는 몰라도 달갑지 못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에 총장을 지낸 김옥길 씨는 그 집회에 가 볼 필요도 없다고 잘라 설명해 주었고 그 당시 총장 김활란 씨는 어떤 사석에서 나더라 한번 가 보고 오라는 가벼운 비공식 지시를 했었다. 전자는 나를 아껴서 즈 말을 해 주었고 후자는 나를 신뢰해서 그 말을 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통일교회에 간 것은 김 총장의 지시도 지시겠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계시받은 말씀도 듣고 싶었고 또 문제의 주인공을 직접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어온 후에 최원복 선생이 김 선생이 믿는 것이라면 그것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적극성을 띄게 되었고 그다음부터 학생 전도에도 박차를 가하여 한 달 안으로 2,30명씩 몰려와서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대다수가 기숙사생들로 기억된다.

 

그런데 물의가 되었던 것은 학생들이 새 진리에 취한 나머지 학교 공부를 등한히 했고 기숙사 규칙도 가끔 어기면서 원리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며 장시간 교회서 보냈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야 은혜에 취해서 다른 일을 잊어버렸던 것으로, 선의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학교 측에서야 엄연히 교칙이 있고 사칙이 있는 데에, 또 학생들을 책임지고 있으니만큼 언제까지나 학생들을 방임해 둘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 207 내가 원리를 들은 후 7일이 되던 날 맨 처음으로 찾아간 분이 김활란 총장이었다. 평소에 나를 총애해 주셨고 나도 존경하는 분이었으므로 찾아가서 내가 이해한 대로 좋은 점을 들어서 원리와 선생님이 관한 것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때 총장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잘 들어주셨고 앞으로 더 얘기해 달라는 말까지 남기면서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자 날이 갈수록 전도가 더욱 적극성을 띄어감으로 통일교회에 나오는 일부 선생과 학생들이 학교 문제로 골치를 앓기 시작했다.

 

하루는 김 총장이 나를 불러 애원하는 어조로 그 교회의 원리는 우리 학교의 전통적인 신앙과는 맞지 않는데 꼭 그 교회의 교리를 밀어야만 하겠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제게 있어서 종교는 생활수단이 아니고 생명에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라고 인정될 때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저는 부인할 수 없다고 하였더니, 그러면 김 선생 개인의 신앙 문제로서 그 교회 가는 것은 막지 않을 터이니 우리 학교 안에서만은 그 교리를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세계가 다 나의 교구인데 소원이시라면 이대만은 거기서 빼 드리겠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총장은 더욱 침울한 표정으로 "김 선생은 우리 학교의 정수 분자야, 나는 김 선생을 내놓고 싶지 않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아 달라."고 애끓는 호소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총장님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오래도록 이대를 위해 일하면서 총장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분은 다시 좀 생각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 208 그런데 그것이 그분과의 마지막 면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동안 배후에서 우리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이 논의되고 나를 캐나다에 유학시키고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캐나다 선교부에서도 신중한 토의들이 있었던 것 같다.

 

얼마 후에 학년말 시험이 끝나고 봄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한 장의 간단한 공문 편지가 총장실로부터 보내져 왔다. 그 내용은 학교 일을 계속할 테면 그 교회에 나가지 말고 그 교회를 나가겠거든 학교 일을 그만두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간단한 편지로 내 결의를 표명해서 답해 보냈다. 그랬더니 총장 말이 "그래도 다시 한번 나를 보러 올 줄 알았더니 어쩌면 서면으로 답을 해 버리고 말았소." 하며 못내 섭섭한 정을 표시하였다.

 

나는 사실상 반칙 행위를 한 일도 없고 그들이 이단이라고 본 원리를 그 학교 안에서 가르친 일도 없으니 나는 애매한 처분을 당한 것이다.

 

* 내가 이대에서 최후의 통고문을 받고 나서 교회에 오니 어떤 영통인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필요해서 김 선생을 이대에서 빼낸 것이지 그 총장이 내쫓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주는 이가 있었다.

 

* 다만 한 가지 이대 사건을 계기로 교훈 삼자는 것은 우리의 전도 방법이 편협하고 근시안적이었다든가 하는 것은 우리가 반성해 볼 일이다.

 

209 원리 말씀이 진리라 해서 덮어놓고 내던지면 상대방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원리를 상대방이 맛있게 소화할 수 있도록 요리를 해서 먹여야 한다. 더구나 우리 교회와 같이 적을 많이 두고 있는 입장에서 오만한 마음으로 섣불리 칼을 휘두른다고 해서 싸움에 이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 한번 실패하면 그것을 만회하기에 그 몇 배가 넘는 노력을 들여도 완전히 만회되기 어려울 것이며 좀 시일이 걸리더라도 귀한 것을 한없이 주어서 살려 주교 행복하게 해 주어서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하여야 그들은 자연 굴복할 것이다.     

 

* 서구에 원리 말씀을 선포하려는 일념으로 오레곤 주립대학 학생의 신분을 택하여 미대륙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59년 1월 4일이다. 그리고 말씀의 씨가 처음으로 뿌려진 곳이 오레곤주 유전 시였다.

 

나는 어린 4남매와 살아가고 있는 과부의 댁에서 아이를 돌봐 주는 조건으로 기숙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1주일에서 5일은 공부와 아이를 돌보는 데 시간을 빼앗기고 토요일과 일요일만 전도를 할 수 있었다.

 

210 1969년 4월 14일 유진시에서 오크힐로 이사했다.

 

* 1961년 11월 식구들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고서 본격적인 전도에 나섰다.

 

* 이 최초의 센터는 샌프란시스코 콜 스트리트 410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다.

 

* 1961년 9월 18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법인단체로 인가를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신청하여 법의 보호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위에 올려놓았다.

 

1962년 1월 처음으로 3층 건물을 식구들이 번 돈으로 사서 센터로 쓰게 되었는데 그곳은 샌프란시스코 머서닉 에비뉴 1309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211 1963년 10월 19일 나의 영주권을 받았다.

 

▣ 1986.3.17(월) 천국을 찾아서. 대구교회.

143-130 이 박사가 배짱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 장군이고 누구고 전부 다 주무를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있었다구요. 그때 이대와 연대가 우리 통일교회를 지지했더라면 문제없었습니다.

 

김활란 박사가 종교사회과 과장이었던 김영운 선생, 신학교를 나온 똑똑한 여선생을 통일교회 내용을 알아보라고 보냈는데 이분이 일주일 만에 원리 말씀을 듣고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래 놓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그 이외의 여려 교수들이 연결이 되고 순식간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들이 몽땅 들리게 되었습니다. 한 300명 이상 되는, 한 300명 정도 되는 기숙사 학생들이 이 원리 말씀을 듣고 몽땅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화여대는 선교사를 배경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입장이니 그때에 이름도 없는 통일교회가 중심이 된 운동 앞에 완전히 흡수될까봐 위험천만함을 느낀 것입니다. 이리하여 긴급조치를 한 것이 퇴학 사건입니다.

 

이자 택일을 하라고 한 거예요. 학교를 택할 것이냐 통일교회 문 선생을 택할 것이냐? 이때는 통일교회 간판도 안 붙였어요. 통일교회를 택할 것이냐 학교를 택할 것이냐? 이래 가지고 그때 퇴학 사건이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은 감옥에 가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는 일대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7년 이내에 세계적인 기반을 닦고 오늘날 자유세계는 새로운 각도로 도약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오늘날 공산주의라는 것은 지구성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문 선생으로 말미암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와 교회가 합하고 미국과 미국 기독교, 한국과 한국의 기독교가 서로 합해 가지고 완전히 선생님을 추방하는 자리로 내몰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