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노정

댄버리 정신 -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댄버리 정신입니다.

true2020 2020. 6. 14. 10:30

* 1971.12.5.~ 제3차 세계 순회 노정.  15개국.

* 1971.12.18. 워싱턴 도착.

* 1972.1.8. 뉴욕 도착.

* 1972.2.3.~3.11. 미국 7개 도시 강연.

* 1972.3.20. 영국 런던 강연.

* 1972.3.28. 서독 엣센 강연.  

* 1973.10.1. ~ 1974.1.29 미국 21개 도시 강연.

* 1973.11.30. 워터 게이트 선언문 발표.

* 1974.2.1. 닉슨 대통령 회담.

* 1974.2.15.~4.21. 미국 32개 도시 강연.

* 1974.9.18. 매디슨 스퀘어 가든 대회.

* 1974.9.18. 미국 8개 도시 강연 출발.

* 1974.10.8. 미국 국회의사당 초청 강연.

* 1975.12.18. 미국 상하의원 합동 초대 기념강연.

* 1976.6.1. 양키 스타디움 대회.

* 1976.9.18. 워싱턴 대회.

* 1981.10 탈세 협의로 뉴욕 연방 지방법원.

* 1982.5.18. 유죄 판결.

헌금 160만 달러의 이자 11만 2천 달러에 대한 소득세와 5만 달러에 상당하는 주식 배당금 세금으로 1973년부터 3년간 7300달러를 내지 않았다는 죄목.

"징역 18개월과 벌금 25000달러를 선고한다. "

* 1982.6.14.(천 윤달 4.23.) 文情進 님 탄생

* 1984.5.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

* 1984.7.20. 미국 코네티컷 주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입감.

* 1985.8.13. 제네바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공산주의 몰락 선포.

* 1985.8.20. 출감

 

◑ 1984.7.22 벨베디아. 참어머님.

여러분도 다 같은 심정이겠지만 특히 저에게 있어서는, 깊이 지난날을 생각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있고 싶은 심정인데 피치 못하여 오늘 아침에 얘기를 좀 하게 되니 너무 거북하기···,  불려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서양 세계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될, 동양 세계에서는 맹목적인 순종과 복종이라는 것보다는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저는 생각되는데요, 한 가정의 가정이 어려움을 당할 때 전 가족이 같이 아픔을 당하는 것이 그것이 도리이고 사회와 또 나라도 같은 입장입니다.

 

한 나라의 군왕이 어려움이 처하게 될 때는 그 각료들로부터 시작해서 전 백성이 같은 그런 심정으로 하는 것이 동양의 아름다운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동안에 참 전 세계의 통일교회 식구들에 비한다면은 참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모인 사람은 다 책임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모신, 모신 자리가 이제부터의 전통이라고 했지만은 모시지 못한 자리에서 뭘하러 모였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동안에 너무도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가치와 비중을 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보세요.

 

지시한 명령 하나만 놓고도 여러분 다 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회의도 좋고 말씀 듣는 것도 좋고 재결심하는 것도 좋지만은, 이젠 여러분들이 뭔가 부모님 앞에 보여 드려야 할 실적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전할 말씀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입장에서 회개하는, 진정으로 하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설 수 있는 길을 구하는 자리에 서 주기를 먼저 부탁하고 말씀하겠습니다.

 

1984년 7월 20일은 정말로 빼서 없애 버리고 싶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떠나기 순간까지 여러분들을 격려하시고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가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들어서 잘 아시지만 한국이나 공산 치하나 그런데 비교할, 이 미국의 감옥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만은 20일 날 10시(저녁)에 이스트 가든 출발해서 모시고 캠프 오피스까지 모셔 드렸습니다.

 

몇 번이고 강하게 다짐했지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차에서 내리시기 전까지도 당신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시고 저를 위로하시기에 온갖 신경을 쓰시는 걸 볼 때 나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그쪽에 경비원 아버님 들어가시고 나자 He is in the Trap? 그래요.

 

당신은 떠나기 전에 "우리가 그곳까지 해방하러 가신다고, 자꾸 당신을 위해서 울지 말고 뜻이 성사되는 걸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누누이 하셨지만 왠지 그런 말을 듣게 될 때에 나도 어떻게 억제할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쳤습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는가 하면 "여러분들 정말로 책임 있게 일해 주십시오." 하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창부모와 동시대에 같이 호흡하면서 같이 일하는 여러분들의 역사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된 사실을 놓고 볼 때에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후손에게 무슨 말을 할 면목이 있습니까?

 

대부분 축복가정인 줄 알고 있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는 자리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늘에 접해 주길 바라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크신 소망 가운데서 창조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슬픈 역사는 시작되었고 복귀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원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슬러 내려와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유대교를 세우심은 유대교가 약속하신, 오시는 메시아를 맞아서 받들어 메시아와 더불어 세계적인 하늘의 섭리의 뜻을 이루기를 바라셨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유대교가 책임을 못하게 될 때 발판을 잃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마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십자가의 부활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새로운 역사는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세워서 역사해 나오신 하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세계를 품자는 하늘의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2차 대전 이후에 미국이 그러한 중심 기독교 국가로서의 사명을 하는 자리에 섰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물론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아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그러한 기간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또 기독교가 책임 못하게 될 때 주님의 걸어오신 노정은 어땠습니까? 내가 얘기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밑창에서부터 출발한, 감옥에서 출발한 통일의 역사는 국가의 기준을 넘어서서 세계의 기반 위에 미국에서 10여 년간

역사하셨습니다.

 

오늘 저에게 전화를 주시고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다른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하늘의 대신 책임을 진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봉화불을 기독교에 켜라 하는 말씀입니다.

 

꼭 들어가야 만 이 일이 성사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어가신 입장에서 여러분들이 불을 댕기면 댕기는 곳곳마다 불이 붙을 것은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 처한 여러분들로서 또 참부모의 입장에서도 볼 때 여러분들은 이제 마지막 찬스입니다. 여러분들의 하기에 따라서 아버님의 자유가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최후의 기회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하여 왔고 지금 지시하고 해 나가고 있는 것은 적극 정성과 있는 정력을 다해서 성취시켜 주십시오. 여러분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하고 사탄도 손을 들고 역사는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40일 이내에 하늘이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기간으로 만들라."고 그러셨습니다.

 

저는 굉장히 조급합니다. 제 마음은 지금 굉장히 조급합니다. 한순간 한 시간이 정말 아까운 시간인데 이렇게 모임을 갖는다는 것이 어느 한 면으로는 필요하기도 하지만은 이제부터는 이 모임이 끝난 후에 여러분들 열심히 뛰십시오.

 

여러분들은 가질 것 다 가졌습니다. 그리고 무장할 것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젠 거두십시오.

 

한 가지 또 부탁하시는 말씀 중에 하나는 지금 미국에도 많은 일본의 식구들이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간부는 물론이지만 특히 미국 식구들이 일본 식구와 하나되십시오.

 

부모님은 영어의 몸이 되셔서 고통을 당하시고 계시지만 일본은 해와 국가의 사명을 이 시대에 있어서 세계적인 경제적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국의 식구 여러분들은 조금 책임이 적다고 보게 될 때에 이번의 찬스를 놓치게 되면 역사를 두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첫날 면회한 상황을 잠깐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예진 효진 이하 여섯을 큰아이들을 데리고 아침 8시에 면회를 갔습니다. 서류를 작성하고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뵙나 하고 굉장히 참···.  

 

이렇게 구석에 자리를 하고 앉아 있는데 나오셨어요. 나오셔서 먼저 보신 것이 우리 식구 데이비드였어요. 데이비드한테 악수를 하시고 아이들과 앉아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제 마음하고 제 표정을 제가 볼 수 없었지만 달리 참아버님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말씀을 한마디하셨는데 당신도 참 상상하지 못했던 전체 감방이라는 말을 하기가 많이 언짢아서,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아버님께 호의적이고 잘해 주고 뭔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분위기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거듭하셨습니다.

 

물론 환경도 그런 것이 사실이겠지만 전체적인 하늘의 뜻을 놓고 볼 때 충분히 발휘하실 수 없는 어떤 제한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 안 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물론 알고 있겠지만,

 

(아버님으로부터 전화)  

* 아버님, 우편을 하나 보내 드려요.

 

* 운동하실 때 입을 옷. 가미야마 것까지.

 

* 부탁 없으세요?

 

 

여러분들이 아버님이 어떤 모습으로서 나타나셨나 제일 궁금하죠?

 

* 제가 볼 때는 베이지 계통의 예비군 복장 같아요. 신도 물론 다 거기서 내 준 것을 신으시는데 커튼으로 만들 천으로 짜서 만든 거, 운동화가 아닌 슬리퍼 같은 신이었어요.

 

한국에서도 감옥수들은 대개 명찰이, 넘버가 붙는데요 그게 없어요. 안도감이랄까 마음이 편했어요. 나중에 복역하는 사람들 자세히 보니까 바지 뒤에 벨트 있는 데에 번호가 있는 게 보여요. 아버님은 팬츠 위에 재킷을 내놓고 입으셨는데 다른 사람들은 집어넣었으니까 보이는 거죠. 

 

그 전날 늦게 들어가셨고 그날은 8시 반부터 면회가 시작됐는데 그날만은 아침식사가 10시 반에 시작이 된데요. 그래서 식사를 드시지 못하고 나왔고 식당은 케프 테리아라고 해요.

 

"뭘 좀 잡수셔야죠." 그러니까 "아, 나 먹고 나왔어." "아니 아침 저기 아직 시작이 안 됐다는데 뭘 잡수셨어요?" 그러니까 "쿠키도 먹고 티도 먹고 나왔어."그래서 어떻게 잡수셨느냐?" 그러니까 옆에 있는 분들이 서로 와 가지고 이것도 잡숴 보라고 그러고 저것도 잡숴 보라고 그러고 티 백도 요만한 것 갖다 드리고 그렇게 주고 싶어하고 도와드리고 싶어하는 분위기라고 그렇게 말씀하셔요.

 

그런데 거기는 좋은 음식을 대접해 드릴 수는 없고 그냥 샌드위치를 좀 사 드렸습니다. 아이들하고 계속 말씀하는데

하나둘 면회 오는 사람들 수가 늘어서 보이데요.

첫날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미스터 김은 허락이 되지 않았지만 법적 서류 문제가 있었어요.

 

아버지하고 아이들하고 얘기하는 동안에 앞에 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는데 그 사람 하는 말이 "오늘 아침에 아버님하고 악수했다."라고.

 

그분 하는 말이 자기가 있는 동안은 아주 레버런 문을 잘 모시겠다고 그러면서 가끔 운동도 하자고 자기가 모시겠다고 그러면서 여기 있는 거(뱃살) 빼 드리겠다고 자기가. 그리고 영어도 도움드리겠다고.

 

거기에 있는 동안에 많은 방문객들이 들어왔어요. 검은 사람도 한두 사람 있었지만 전체가 백인이고 또 유독 까만 머리만 동그랗게 모여 있는 데는 우리 쪽밖에 없었어요.

 

분위기가 사람들이 다 선량하게 생겼다 하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그쪽 동네의 임원들이 말하자면 감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좀 분석하는 사람들도 안에 있는 거 같아요.

 

하룻밤을 지냈는데 그 사람의 보고가 굉장히 거기에 같이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이고 협조적이라고 보고하는 것 같아요.

 

한 방에 4, 50명이 있다 보니까 그중 모두가 다 좋다고 볼 수 없겠죠. 하지만 우리가 정성을 많이 들여서 영적으로라도 최선을 다해야 되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요, 본래 여죄수를 위해 지은 집이었는데 여자 수가 적기 때문에 남자 수용소로 정했다고 해요. 그래서 나와서 하는 말씀이 남자를 위한 변소는 없다 다 여자를 위한 변소만 있다고 그러시고.

 

거기 들어가시는 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을 좀 해야 되나 봐요. 그런데 제일 처음에는 우리 측에서도 아버님도 생각하시기를 이렇게 나와 다니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일이 있는데요, 거기에 공장이 있나 봐요.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 하실까도 생각을 하셨는데 그러면 면회 시간에 제한을 받게 되고 책임량을 해야 되는 그런 면이 있고요.

 

거기는 조금 수당을 주나 봐요. 그래서 그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싶어서 조금도 연구를 하겠다고 그랬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협조적이고 되도록이면 편리한 그런 자리에 놓아 드리려고 노력을, 애를 썼나 봐요.

 

조금 전 말씀하시는데 내가 식당에서 일하게 됐어. 그러셔요.

 

마지막으로 내가 첫날 면회한 얘기를 듣고서 어느 정도 안심은 되겠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그분의 천적인 사명과 전체적으로 해 오신 업적과 여러 가지를 보게 될 때에 그 위치에 오래 계실 수가 없어요. 하루라도 더 계실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에 노력이, 하늘이 살아서 레버런 문과 직접 역사하심을 만천하에 보여 주게 되는 역사적인, 역사 이래에 두 번  다시없을 일이 됨으로 여러분들이 정말 명심하고 각성해 주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참어머님  자서전

170 1983년 7월 20일은 나의 역사 가운데서 영원히 지우고 싶은 하루였습니다. 문 총재가 집을 떠나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순간에도 식구들을 격려하며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밤 열 시에 이스트 가든을 출발해 댄버리 교도소까지 여러 식구가 함께 갔습니다. 나는 이미 강하게 마음을 먹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71 분노와 슬픔을 쏟아 내는 식구들에게 문 총재는 당부했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세요."

 

* 남편이 이국땅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건만 나는 저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 그리고 위하여 살라." 우리 통일운동의 가장 근본은 위하는 삶입니다. 사지의 경지에서 자신을 희생함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댄버리 정신입니다.

 

댄버리 정신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잃어버린 처지에서도 하늘의 뜻에 따라 희생하고 용서하며 더 큰 가치를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때 남편은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였고 미국이란 나라에서 혼자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유색인종에다가 소수 종교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박해였기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나는 막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몸과 마음이 몹시 힘드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없는 공백 또한 내가 메워야 했습니다.

 

172 문 총재는 다음날 새벽 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기독교에 봉홧불을 붙여라. 이 말을 식구들에게 전해 주어요."

 

174 마찬가지로 남편의 댄버리 옥고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그 일을 승리로 바꿨습니다.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가장 설레고 사랑과 연민의 정이 깊어지는 나날이었습니다.

 

남편 역시 애틋한 마음을 나누는 다정다감한 하루하루였습니다. 남편은 새벽 5시 기도를 마치면 교도소 공중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하고 부르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면회 시간이 다가오면 남편은 언덕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어떤 때는 남편이 교도소 안에서 바닥 청소나 식당 설거지를 하다가 초췌한 모습으로 면회실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느 아내가 마음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서러움을 억누르고 항상 환한 미소로 맞이했습니다.

 

나는 면회를 갈 때 막내 정진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막 두 살 난 아기를 받아 안으며 남편은 즐거워했습니다.

 

잠시의 면회가 끝나면 남편은 밖으로 나와 우리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전송해 주었습니다.

 

나는 오픈카를 타고 다녔는데 면회를 가서 언덕길을 오를 때면 남편은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보일 만한 장소에 미리 마중나와 있곤 했습니다.

 

그때는 그리운 마음에 환한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지만 언덕길을 내려올 때는 눈물이 쏟아질까 봐 바라보지 못하고 손만 흔들어 보이곤 했습니다. 남편도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