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1.19(일) 하늘이 임재할 수 있는 내적 자아. 전본부교회.
- 밤예배 후의 말씀.
022-035 뜻이 아무리 여러분 앞에 가까이 다가왔더라도 여러분 자신이 그 뜻을 환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뜻과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 그러므로 어느 때나 문제가 되는 것은 뜻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동화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 뜻이 아무리 세계적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이 그 뜻을 도외시한다면 이 뜻과 여러분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뜻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적 조건 혹은 내적인 조건을 갖추어 어떻게 그 뜻에 결부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대개 가정을 중심 삼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도 역시 지금까지 가정을 중심하고 사회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신앙자들과 불신앙자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불신앙자들은 가정을 중심 삼고 사회생활만 하면 되지만 신앙자들은 가정을 중심하고 사회생활뿐만 아니라 교회생활도 아울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입신양명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자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입신양명 하는 것보다도 교회생활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그것들이 가인 아벨과 마찬가지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외적인 사회생활은 가인적이며 내적인 교회생활은 아벨적입니다.
그렇기에 외적인 사회생활은 내적 생활의 상징체가 되어야 합니다.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외적인 사회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은 내적인 교회생활인 것입니다. 내적인 교회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한 사람은 외적인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신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내적인 교회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인을 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통일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 보게 될 때 교회에 모여 집회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공적 집회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기 때문에 뜻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희박해지는 거예요.
자기가 내적으로 설 수 있는 그 자리가 어떻다는 것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외적 기준도 확실치 않다는 거예요.
022-036 내적인 모든 핵심을 결정짓는 자리가 바로 교회의 공적으로 집회하는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의 공적 집회를 통해서 전통적 기준을 세워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아침 경배 시간이라든가 혹은 우리 교회에서 개최하는 공식적인 집회 시간에 대한 관념이 희박합니다.
도리어 사회생활에 대한 관념과 교회생활에 대한 관념을 비교해 보게 될 때 흘러가 버리고 말 사회생활에 대한 관념이 영원히 남아져야 할 교회생활에 대한 관념보다도 앞설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여기에는 문제가 일어나고 병폐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팎에 대한 문제를 여러분들이 확실히 가려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022-040 선생님은 감옥이면 감옥생활에서나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서도 이 한 기점만을 중심 삼아 가지고 나왔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은 어려분이 알아야 합니다.
밥을 먹으나 자나 깨나, 기도할 때도 다른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통일되면 뭘합니까? 그 기점을 잃어버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주관을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를 어떻게 완성시키느냐?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임재점, 그 기점과 언제나 일치화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감옥이나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반드시 이것을 거쳐 나가야 됩니다. 즉 복귀의 관문인 것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022-048 하나님을 닮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원리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확실히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것이 희박하게 될 때는 반드시 딴 결과가 맺어지게 됩니다. 딴 결과를 맺은 뒤에는 아이쿠 해서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길을 가더라도 만사를 하나님이 임재하는 그 기점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활 전체가 그 기점과 일치될 수 있는 생활화 즉 동화될 수 있는 생활화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긋나게 될 때에는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 잘 되고 자기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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