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7.3(일) 답답하고 민망하신 예수. 전본부교회.
▶ 인류역사는 불행으로 시작했다.
010-050 인류 역사가 행복으로 시작하였느냐 불행으로 시작하였느냐 할 때에 행복으로 시작하였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더욱기나 우리들 개체에 육체적인 고충과 정신적인 고충이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인간 조상이 행복의 길을 출발한 것이 아니라 불행의 길을 출발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이 기쁜 모습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어 있느냐 할 때에 누구도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지으신 만물이 인간의 주관을 받게 될 때 그들의 소원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 것인가? 즉 만물은 어떠한 주인공을 맞고 싶어할 것인가?
무한히 행복스럽고 무한히 자유스럽고 무한히 영광스런 모습을 갖춘 주인공을 맞고 싶을 것입니다.
만물은 인간이 자기들을 품어 줄 수 있는 그러한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애당초부터 행복이라는 명사나 자유나 평화라는 명사가 아닌 불행이라는 명사를 중심 삼고 출발한 인간들입니다.
그런 연고로 제아무리 호언장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물 앞에 나타날 때에는 부끄러운 모습인 것을 자증해야 할 한스러운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불행한 인간을 행복한 곳으로 이끄셔야 할 하나님은 행복할 리가 만무하다.
010-052 불행으로 출발한 인간이기에 불행으로 종결되어야 할 인간이지만 이러한 인간을 붙들고 행복의 곳으로 이끄셔야 할 하나님은 행복할 리가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이와 같은 불행한 자리에서 이끌어 내지 못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무한한 고통을 느끼시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인간을 고통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지 않는 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책임을 지신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불행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시는 분이고 어느 누구보다도 더 고통과 슬픔을 뼈저리게 당하시는 분이며 그 사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 메시아도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것이다.
010-061 복음의 깃발을 들고 나선 예수님께도 우리처럼 먹고 싶은 마음 입고 싶은 마음 평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40일 금식쯤이야 문제없었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메시아도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고픈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래야 했느냐? 여러분은 타락한 후손이니 금식을 아무렇게나 해도 섭리에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위신이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할 수 없었습니다.
4천 년 인류 역사를 대신한 만왕의 왕 하늘의 황태자 하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위신이 있었다는 거예요.
자신이 아무리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도 "아버지 참으시옵소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러한 길을 가셨거늘 내 어찌 안 걸으리오?" 하셨다는 거예요. 배가 고플 적마다 "아버님, 당신이 이와 같은 길을 걸으시면서 선조들을 지도하신 것을 아옵니다. 아들 된 제가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이 길을 가오니 참으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저주받을 것을 모면하였던 것입니다.
▶ 하늘의 뜻을 염려하고 하늘 앞에 민망해하신 예수님.
*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낼 때는 영광의 한날을 바라보고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 4천년 동안이나 수고해 나오신 목적도 메시아를 보내서 영광의 한날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의 환경을 개척하여 만민으로 하여금 당신께 자유의 노래 해방의 노래를 불러 드리게 해 주기를 바라고 예수님을 보내셨음에 틀림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입장은 떨어지고 자기의 형편은 떨어졌을망정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시고 하늘 앞에 민망해하셨습니다.
"아버지, 면목없습니다. 아버지, 면목없습니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외로운 자리에서도 자신을 놓고는 슬퍼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010-064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이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이냐? 그것이 하늘 대한 민망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을 대한 민망한 마음이 자기들의 모든 감정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땅을 대할 때는 답답해 해야 됩니다.
▶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 하면서 가야 되겠다.
010-078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을 알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알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이 몸은 쓰러지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싸우다 쓰러지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더라도 이 몸속의 산 피가 고동치고 이 생명의 맥박이 뛰는 한 아버지의 생명의 깃발을 세울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쓰러져야겠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고 부모나 처자도 없고 국가나 세상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일편단심으로 가졌던 주의와 사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심정뿐이었고 아버지의 마음뿐이었고 아버지가 소원하시는 하나의 참사랑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볼 때마다 그가 품은 것은 답답함뿐이요 그가 가진 것은 민망함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악된 세계에서 그렇게 살다 가셨거늘 그 답답함을 풀어 드릴 수 있고 그 민망함을 풀어 드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결심합시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삼천리 반도를 향하여 최후의 정열까지 다 쏟아야 되겠습니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 하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후손이 지녀야 할 승리적인 조건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답답한 예수님의 심정, 민망한 예수님의 심정이 제 일신에서 풀어지이다."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민족적으로 배반을 받고 갔습니다. 12사도 앞에서 배척을 받고 갔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배척을 받고 나갔습니다.
그러기에 오시는 주님은 12제자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고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인들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고 27억 인류 앞에 환영을 받아야 되겠는데, 환영받을 수 있는 사정이 못 되어 있거든 우리는 싸우다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개척하여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피와 살을 뿌리고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정열을 쏟을 수 있는 각오와 신념에 찬 무리를 우리는 이 삼천리 반도에서 찾아 모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무리를 찾기 위해 잠들어 있는 27억 인류와 잠자고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한 끼의 밥도 자신만을 위하여 먹지 말고 한 벌의 옷도 자신만을 위하여 입지 말고 하루의 생활도 자신만을 위하여 하지 맙시다. 그런 무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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