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8.10(일) 추억과 회상. 전본부교회.
024-187 당시 교계에서는 이 민족 앞에 찾아진 해방의 기쁨과 더불어 왜정시대에 압정을 받으면서 슬픈 신앙생활을 해왔던 모든 한을 걷어 치우고 새로운 소망과 희망에 벅차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새로운 혁신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환경 즉 새로운 재건의 불길이 번지는 마당에서 우리 통일교회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선생님이 일을 하다 보니 기성교회의 중심되는 신도 혹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소속된 교회에 나가지 않고 선생님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평양에서 문제시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서문과 가까운 경창리에서 전도를 하며 통일교회의 출발의 터전을 세우던 때였습니다.
동기가 어떻게 되어서 이런 문제가 벌어지게 되었느냐? 여러분들 중에서도 복중교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허호빈씨를 중심한 복중교는 그때의 복귀 노정에서 하늘이 이 땅 위에 필히 준비해야 할 重大한 責任을 대신 짊어지고 출발했던 것입니다.
허호빈씨를 중심한 복중교가 출발하게 될 때까지 3대를 거쳐 나왔습니다. 여기의 1대가 정석온씨의 어머니 되시는 김성도씨입니다. 이분을 중심 삼은 하늘의 역사를 거쳐 복중교의 허호빈씨에게 하늘이 직접적인 역사를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 집단에서 무엇을 준비했느냐 하면 이 땅 위에 주님이 오시면 맞이할 수 있는 전반적인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데는 우리가 기쁜 자리에서 그를 맞을 수 있는 준비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복귀섭리는 현재의 입장만 가지고 준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기에 과거의 승리의 터전 위에 설 수 있는 현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현재가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현재가 현재로서 그 위치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과정에서 하늘이 침범받았던 모든 조건들을 전부 다 제거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 실패했던 기준을 현재의 승리의 조건으로 세우지 않고는 현재의 승리의 터전 위에 준비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이 그러한 사명을 되풀이해서 준비시키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중교는 오시는 주님을 위하여 내적으로 준비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슬픔 가운데 돌아가신 주님이셨기 때문에 그 가신 주님의 모든 슬픈 사정을 이 땅 위에서 해결짓지 않고는 소망과 기쁨을 가져오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이 역사적인 사연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연이 있기에 하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연을 책임분담시켜 복귀섭리의 판도를 넓혀 나오는 것입니다.
024-199 허호빈씨가 계시를 받게 될 때는 언제나 몸에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외적인 자극을 통한 움직임이 있는 후, 반드시 영계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계시가 허호빈씨의 배를 통하여 전달됐기 때문에 그 집단을 腹中敎라고 한 것입니다. 복중교라는 이름은 자기 집단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그때에 소문으로 만들어진 명사입니다.
그들이 계시를 받고 그동안 무엇을 준비해 나왔느냐? 그들은 새로운 역사시대에 하나의 중심존재가 나타나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때는 기쁜 때이기 때문에 기쁜 역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엮어 나온 슬픈 역사를 어느 한때에 완전히 청산 짓고, 자기들이 승리했다는 날을 맞기 전에는 기쁜 출발을 못 보는 것입니다.
024-191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면서부터 30여 년의 생애를 지내기까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슬픈 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홀로 느끼신 고독함과 억울함과 비참함은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도 모르고, 역사과정의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러한 비참한 사연을 품고 가셨던 예수님의 생애를 재현시켜 그 당대에 하지 못했던 것을 전부 탕감복귀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섭리의 入場을 중심삼고 준비시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요셉 가정의 모든 슬픈 사연을 중심삼고 복중교인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시는 주님이 한 살부터 30세까지 사흘에 한 번씩 갈아 입을 수 있는 옷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심을 받아야 했고, 하나님 앞에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사명을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복중교를 중심삼고 이스라엘의 승리적 입장을 재생하여 그 일을 다시 추진시켰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정성들였던 그 정성의 정도를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정성들이는 데는 洋式으로부터 韓式까지 전반적인 의식을 중심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30여 년 동안 뜻을 품고 하지 못하였던 모든 한 맺힌 내용을 그들이 전부 다 해원성사해야 할 입장에서 탕감역사를 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감옥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영계로부터 일본이 망할 날짜까지 받고서 "일본 천황은 망한다. 일본은 꼭 망한다" 라고 외치며, 감옥의 쇠사슬에 매여 있으면서도 생명을 내걸고 싸우는 모습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시대의 주권 앞에서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철창에 갇힌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할지라도 시대의 모든 환경을 초월하고, 일심으로 하나님이 남기신 복귀의 뜻만을 위하여 정성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들은 왜정 때부터 그런 싸움을 거듭하면서 준비해 나온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이 땅 위에 자기들이 소망하던 주님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고 김일성이 새로운 공산당 정권을 세우게 되자, 그때부터 그들은 공산당 앞에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종교라는 미명을 내세워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수많은 대중을 착취했다는 죄목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웠던 것입니다.
1946년 6월, 공산당은 북한 전역에 있어서 새로운 종교단체에 대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에 유사한 단체가 있으면 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에 선생님은 경창리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왜 남한에 있다가 이북으로 갔느냐? 그 당시 한국의 신앙의 중심지가 평양이었고, 또 거기에서 그때까지 역사적인 신앙의 모든 투쟁이 엮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늘이 준비해 놓은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이북에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8월 11일에 공산당에 의해 대동보안서에 잡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종교인을 원수와 같이 취급하는 공산당의 압제하에서 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기들의 신앙심을 지텨 나갔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 고문받은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 기절을 수십 번이나 하고, 그의 동생은 고문에 못 견디어 죽어 갔습니다. 그 전체의 책임자들 40여 명도 투옥되어 가지고 비참한 가운데서 고문을 받았습니다.
▣ 1969.6.8(일) 전본부교회. 불쌍한 복귀의 역군들.
023-280 해방을 맞이한 후에 북한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공산당이 들어와서 공산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1946년도에 선생님이 평양에 갔는데, 이 허호빈 집단을 만난 것이 1947년도입니다. 그런데 이 집단이 종교를 빙자해 가지고 사기를 했다고 해서 공산당의 보안서, 지금으로 말하면 치안 경찰서에 적발이 되었습니다.
그 사기 내용이 무엇이냐? 예수님을 요섭 가정에서 받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맺혀 있기 때문에 이 한을 풀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세계에 있어서는 비통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자가 태어났는데 말구유에 누이다니 이게 웬말이냐는 것입니다. 갖추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예비해 가지고 보내는 메시아,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수 있는 메시아, 만왕의 왕의 권한을 갖고 오신 메시아가 실제 말구유에서 났고, 비참한 목수 일을 하다가 마쳤으니, 예수님 일생에 있어서 이것을 풀 수 없는 원한으로 사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부 탕감하지 않고는 다시 오시는 주님의 길을 닦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이 태어나는 그날부터 33세가 될 때까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3번씩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집단에서 그 준비를 전부 다 했습니다.
▣ 1967.5.13(토) 허호빈파의 정성. 전본부교회.
- 엔도 노리꼬씨와 홍순애씨 간증 후 말씀.
017-350 주님을 맞이하는데 두 번째 여성으로 나온 이가 허호빈씨이다.
남편은 아담의 입장이라 하여 하늘의 姦夫로 취급당하고,. 부인에게는 절대 복종해야 했다. 또 주님과 같이 섬겨야 했다. 예를 들면 부인에게 3천 배의 경배를 드리는 일도 있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평생 동안, 3일마다 새옷을 갈아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옷을 만들었다.
1946년 8월 11일에 선생님은 그들 때문에 그들과 같이 옥중에 들어가 3개월 만에 나왔다. 선생님은 그들을 만났으나, 그들은 선생님을 몰라봤다.
공산당은 선생님과 함께 있는 허씨의 제자들에게, "주님이 복중으로 온다는 것을 부정하면 옥중에서 놓아준다"고 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쓰러졌다.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황원신)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부정하고 나왔었다.
* 허씨가 있을 때, 1200명이 정성을 들였다. 이들 중 5%가 희생이 되었다.
재림주님은 그들을 살려야 한다. 그들이 한 일을 앞으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에 모범을 보여준 것으로서 우리들도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 그들이 하였던 일을 선생님은 세계에 자랑해야 한다.
앞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할 사람은 7천 번이라도 경배해야 한다. 그러한 정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들이 통일성도를 참소하게 된다.
그들이 재림주님을 위해 들였던 정성의 기준에 비교하면 통일식구들은 너무나 정성이 부족하다.
그때 그들이 사명을 다했더라면, 선생님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그녀의 남편과 제자들을 만나 말해 주었다.
▣ 1987.5.19(화) 북한해방과 남북통일. 국제승공연합 방문.
165-021 그때는 나라가 없었는데, 독립이 되어 나라를 합하는 데는 뭐냐 하면, 3파예요. 소련파, 중공파, 미국파, 이렇게 3파가 벌어진 거예요. 3파전이 벌어졌다구요.
김구 선생이라든가 이승만 박사라든가 그 외의 김일성파가 나와 싸움을 벌어 가지고 주권을 세우는 거거든요.
그때부터 전부 선생님을 중심으로 했으면 김구 선생을 설득시키고, 소화했을 것입니다. 묶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랬으면 김일성이 같은 거 문제가 안 됐다 이거예요. 완전히 뭐 문제가 간단했을 거예요.
*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저부 다 깁론을박甲論乙駁하고 있으니 선생님을 모두 반대하게 되어 기독교와 외부의 정치 바람 타는 모든 사람이 반대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사탄을 중심삼은 김일성이가 주권을 세운 거지요.
그때 김일성의 나이가 세른네 살이었어요. 예수가 서른네 살 때부터 유대교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자리를 잡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리를 잡기 위한 놀음을 서른세 살부터 해야 했어요.
* 본래 평양시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한국의 예루살렘, 한국의 기독교는 평양에 다 있는 거예요.
* 허호빈 집단이 적발되면서…. 순수한 국민들에게 종교라는 미명하에 사기를 친다고 할만하거든요. 재산 팔아 옷 만들고 한 것이 몇 톤 트럭이 되니까. 그러니까 그 신령집단의 허호빈이 때문에 내가 끌려 들어간 거라구요.
▣ 1969.6.8(일) 불쌍한 복귀의 역군돌. 전본부교회.
- 1946년 8월 11일~11월 21일
023-299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허호빈씨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락을 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연락을 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1946년 9월 18일이었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감방에서 한 청년으로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노니,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하라"는 내용으로 썼습니다. 그렇게 하여 선생님은 책임을 다 했지만, 공산당의 감시에 그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에게 책상다리로 맞았는데 이빨에 금이 갔습니다. 이러한 투쟁역사를 해 나온 것입니다.
또 내게, 이남에서 왔다고 해서 이승만의 앞잡이라나요? 그러나 아무리 조사 해봐도 근거를 못 잡아요. 그러니까 박수무당이나 사회를 문란케 한다느니 하고 잡아 가두었다.
* 허부인이 주님이 계신 곳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더라면, 하나님이 그녀에게 그곳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생님은 그 집단에 사람을 보내서 허부인에게 선생님의 집단이 무엇인지 기도해서 알아보라고 했다.
* 1946.8.11~11.21까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선생님이 그들 집단의 간부들, 그 부인의 남편, 그 집단의 협회장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갈 곳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 그냥 있으면 너희들은 전부 학살당하니까 어떻게든 감옥을 나가라고 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황원신이라는 사람은 선생님의 말을 듣고 전부 부인하고 감옥을 나왔다. 그런데 고문을 많이 당해 가지고 나온지 3개월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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