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선생님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했다. "이 입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있을까,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라고 熟考한 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서른 살까지는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 언제든지 밥을 가져오면 사발로 서너 그릇을 단번에 먹어 버린다. 그 정도로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고 하게 되었다. 전쟁 시대인 그때에는 식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식권이 있어서 "몇 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먹어 보자"고 친구들을 데리고 갔다.
젊은이들이 모이면 참 재미있어요. 모두들 "야, 10그릇은 문제없다." "오늘은 자네 생일ㄹ이니까 마음껏 먹어라, 내가 한턱낼게"하며 큰소리를 친다. 다카다노바바를 죽 내려가면 절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식당이 쭉 늘어서 있어요.
거기에서 선생님은 닭고기 계란덮밥을 일곱 그릇이나 먹었다. 일곱 그릇 먹고 나서는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배가 고픈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 일도 하곤 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항상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선생님은 항상 배가 고팠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 결코 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배만을 채우고 있으면 자신으로부터 민족이 멀리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자기에게서 멀리 달아나 버린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지만 그 이상으로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리이며 선생님의 신조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서른 살까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던 것이다.
형무소로부터 나왔을 때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계속 먹을 수 있었다. 웬일인지 무엇을 먹고 또 먹어도 배가 불러도 거기에서 過食하여 죽을 정도로 먹고 싶었다. 아무리 채워도 포화상태가 되지 않았다. 그렇듯 언제나 모자랐다. 이렇게 하면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다.
▣ 1990.2.15(목) 고생의 철학과 3권 복귀. 한남동.
- 향토학교 간사 및 간부.
199-019 그리고 돈이 떨어졌다 하면···, 왜정 때는 식권이 있었는데 한 끼에 하나씩 써요. 그것도 등급이 셋입니다. A, B, C가 있어요. 이 표를 한 장씩 줘야 식당에서 밥을 주는 거예요.
그때는 쌀이 모자라던 판인데 젊은 놈들이 가서 먹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요. 내가 몇 그릇까지 먹어 봤느냐 하면 열한 그릇까지 먹어 봤어요. 아, 그렇게 먹는다구요. 茶碗 ちゃわん밥공기 같은 것으로 먹기 시작하면 열한 그릇도 금방이에요.
그거 냄비로 하면 한 냄비도 못 될 거라구요. 그렇게 11그릇을 먹었으니까 며칠 분을 먹었어요? 4일분, 3일 반 분 이상을 먹어 버렸거든요. 그렇게 먹다 보면 식권이 떨어져요. 그러면 전화를 하는 거예요. "너 식권 얼마 남았니?" 하고.
그리고 세상에는 다 사는 수가 있다구요. 내가 식당 아주머니와 친하거든요. 친해 놓고는 쌀을 사 달라고 하는 거예요. 쌀을 돈 가지고 사는 거예요. 돈을 더 주고 말이에요.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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