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7.6.11(일) 성신. 전본부교회. 세계순회 환송 집회.
018-242 내가 지방에 있는 여러분들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차비 없애면서 왔군요. 나는 본래 전송 같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에서 공부하던 학창시절에도 절대로 전보를 안 쳤습니다. 역에서 집까지 한 20리 됩니다. 그런데 될 수 있으며 바람 불고, 추운 날 또는 비오는 날에 걸어가면서 가만히 기도해 보면 "참 휼륭한 분이 세상을 지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에 부모나 형제들이 와 가지고 쑥덕쑥덕하게 되면 고향의 맛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렇지만 해가 기울어 밤이 되었을 때와 또는 힌눈이 내리던 그런 밤의 추억들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조그만 선물이나마 양손에 번갈아 가면서 들고 갈 때 "부모가 어떤 얼굴로 대할까?" 생각하면, 아주 감상적인 시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기간이 얼마나 복된 기간이었는지 모릅니다.
▣ 1964.3.23(월) 하나의 세계를 이루자. 대구교회.
- 안토니 부르크의 간증 후에 말씀.
154-068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저 사람이 통일교회 문 아무개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나 이번에 차 타고 가면서는 절대 그런 패들 보고 싶지 않아요. 차 타고 가는데 뭐 통일교회 패들이 수십 명 나와 가지고 선생님 오신다고 …. 여러분은 이제 선생님이 여기 올 때 대구역에도 나오지 말라구요. 알겠어요?
내가 옛날에 학창시절에 일본에 있다가 집에 올 때는 집에 전보도 한 장 안 띄우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온다고 하면 집에서 역까지 한 20리가 되는데 버선발로 혼자 나온다구요.
그게 멋진 거예요? 고향 집을 찾아오는데 가족과 더불어? 그게 아니에요. 그게 참 귀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마중 안 나와도 괜찮아요. 그런다고 나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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