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이요한 목사-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하니까 통일교회라고 하면 좋겠다"

true2020 2019. 1. 28. 09:36

▣ 천애로 인도받은 삶 168 / 이요한

1953년 8월, 동인동에서 3사람으로 시작했던 대구교회는 100명 가까이 늘어나는 등 크게 부흥했습니다. 주일에는 낮과 밤 두 차례 예배를 드렸고, 수요일에도 밤 예배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면서 한을 갖게 된 사연이나 하나님이 구상하셨던 창조본연의 세계, 인간조상의 타락 등을 중심으로 원리말씀을 소개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동, 감화를 받았습니다.


* 당시 집회에는 보통 5, 60명은 모였습니다. 개척전도를 시작한지 1년 만에 일구어낸 것으로는 적지 않은 숫자였습니다.


* 임춘자 집사의 집에서 시작한 대구교회는 박해가 심해지면서 남산동에서 삼덕동, 동인동으로 돎겼다가 다시 남산동으로 이사하는 등 이곳저곳을 수차례 전전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 간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요한이라는 사람이 전도사이면서 목사 흉내를 내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등 부정적인 소문이 퍼졌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나에게 "어디 소속이냐? 무슨 교회냐? 목사 자격은 갖고 있느냐?" 면서 박해를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명칭이나 소속 단체가 없다는 것 때문에 "이요한패"로 비하했습니다.  


대구교회가 외부의 핍박 속에서도 반석 위에 서게 되면서 참아버님께서 1952년 12월 2일 봉산파출서 근처에 있는 22번지 봉산동 교회를 찾아오시어 며칠간 머무르셨습니다. 


* 대구에서 며칠 머무르신 참아버님은 12월 24일에 부산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당시 부산에서 유효원 선생이 입교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직접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 내가 전도활동에 나서자 교회 내부에서도 교단 명칭과 나에 대한 호칭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봉산동 교회에 오신 참아버님께 식구 한 분이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요한을 중심으로 모인 패들이라고 하면서 이요한패라고 부릅니다. 우리 교회 이름을 하나 붙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는 곰곰이 생각하시다가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하니까 통일교회라고 하면 좋겠다" 라고 답변하셨습니다.


1954년 5월 1일 협회가 창립되어 정식 명칭을 발표하기 전에 이미 대구에서는 비공식적으로 통일교회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동안 식구들이 전도를 나가서 말씀을 전하게 될 경우, 말씀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은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을 자주 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이 제대로 답변을 못하게 되자 그들은 말씀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우리를 아주 무시하고 있다는 말씀을 참아버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참아버님께서 "왜 없어! 여기 이선생이 있잖아. 여기 이선생을 목사라고 해라"라고 하시면서 "이요한 목사"라는 말씀을 처음으로 하셨습니다. 참아버님의 그 말씀에 따라 나는 통일교 역사상 최초의 목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