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2.22 평양 내무서에 구속 (이북 입감일)
* 1948.4.7 공판, 5년형. 平壤刑務所에 收監.
* 1948.5.20 함경남도 興南 本宮 特別勞務者 收容所 移送.
* 1948.6.21 興南 德里 特別勞務者 收容所 移監.
▣ 1967.6.4 (일)전본부교회. 탕감이 가는 길.
018-165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머리를 깎이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내가 원해서 머리를 깎이는 것이 아니라, 원수의 손에 끌려와 강제로 머리를 깍이는 것이라고….
그때 선생님의 눈빛이 얼마나 빛났는지 모릅니다.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내가 원하던 행복을 버리면서, 더우기 원수 앞에서 머리를 깎이는 것이 서러웠습니다.
복귀의 사연을 엮어가는 노정에서는, 그 모든 역경이 한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낼 때는 한스러웠지만 지내고 보니 그것이 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며칠 동안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고 쓰러지는 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매를 맞는 것은 나를 위해 맞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해 맞는 것이요, 내가 눈물은 이 민족의 아픔을 대신한 탕감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모든 행로에 있어서 하나님을 붙잡고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때까지 이 탕감노정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나홀로 이 길을 넘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탕감복귀의 길을 나선 그 발걸음 앞에 떨어지는 눈물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길을 염려하여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죽음길을 염려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배반하여 천상에서 받아야 할 최후의 심판을 염려한 눈물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보니까,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까지 올라가던 도중에 쓰러졌다는 곳에 팻말이 박아져 있었습니다. 12번이나 넘어졌다는 그곳을 바라보며, "이런 탕감길을 거쳐 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1966.4.3(일) 전본부교회 선생님과 같은 입장에서 고생하라.
016-201 一九四八年 4月 3日은 내가 잊을 수 없는 공판날이었다. 기성교단의 질시와 공산당국의 종교말살 정책에 따라 1948년 2월 22일 선생님이 내무서에 구금되었고, 2월 25일에는 머리를 깍였다.
* 공산치하에서의 종교 공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날(4월 3일)은 그들의 役員 중에 缺員이 생겨서 4월 7일로 공판일이 연기되었다. 이날은 구금된 후 만 40일이 되는 날이었다.
*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동지들이 고문받던 일이다. 선생님이 자백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게 되어 있었다. 동지들이 고문받던 장면이 제일 고롭고,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고생했던 그 사람들이 하늘 앞에 남아지지 않은 것이 서럽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보다도 그 동지들이 당하는 고통이 더 서러우셨을 것이다.
* 선생님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염려하고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눈물을 흘리고, 같이 죽음길을 가는 전통을 세우려는 것이다.
* 선생님이 감사하는 것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남아 하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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