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노정

평양 내무서 구속- 1948.2.22.이북 입감일, 세 번째 투옥

true2020 2016. 9. 12. 17:58

* 1948.2.22(일) 오전10시 평양 내무서 구속 (이북 입감일). 세 번째 투옥


▣ 1966.1.9(일) 전본부교회.  

1948년 2월 22일 선생님이 평양 감옥으로 갈 때는 천리의 원칙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리어 소망 가운데 갔었다.


▣ 1971.12.27(월) 통일교회사1. 워싱턴 D.C.

052-155 그 집단의 실패 때문에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을 찾아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조건적인 수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거기서 일을 했습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로 선생님은 다른 집단들과 관계를 맺었고, 또한 그 집단의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선생님이 교회 운동을 하자 식구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북한 정부의 정책은 모든 종교를 말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성교회의 목사들은 그들 교회의 많은 신도들이 선생님에게로 왔기 때문에 선생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세 번째로 투옥되었습니다. 그날이 1948년 2월 22일이었습니다.  



▶1948년 2월25일 삭발.


- 내 머리를 깍아 치우던 이 아무개라는 사람과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 기른 머리가 깎여 떨어지던 그 감옥에서의 일을 잊지 못한다.

- 내가 원해서 깎이는 것이 아니라, 원수들의 손에 끌려와 강제로 머리를 깎이는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때 선생님의 눈빛이 얼마나 빛났는지 모른다. 

-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내가 원했던 행복을 버리면서, 더욱이 원수 앞에서 머리를 깎이는 것이 서러웠다. 


▶1948년 4월 7일 재판, 평양 형무소.


- 재판받을 날이 4월 3일이었는데, 공산당이 교회 탄압할 구실을 만들다 보니 기일이 늦어져, 4월 7일에야 받았다. 이날이 구금된 후 40일이 되는 날이었다.

- 내가 공판장에 서게 되었을 때, 이북에 있는 아무개 아무개 목사들이 와 가지고 별의별 욕을 했다. 그러한 남이 알지 못하고, 남이 느끼지 못하는 충격을 아직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 법정에 서는 그 기분, 나는 일생 동안 그 기분을 간직하고 있다. 

- 공판장에 가 가지고, 자기의 한 마디가 운명을 결정한다 할 때는 비장하다. 

- 공산주의에 대한 요만한 미련도 못 갖게 하기 위한 하늘의 작전이었고, 공산권 내에 있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못 두게 하는 하나님의 작전이었다. 일체를 부정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1948.4.7~5.20 평양 형무소 수감

- 선생님이 4월 7일에 쇠고랑을 차고 형무소에 갔는데, 소망 가운데 찾아갔다.

- 형을 받고 감옥으로 갈 때는 오히려 희망에 찬 발걸음이었다. 왜냐하면 형무소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선생님은 '또 내 한 고비를 메우기 위한 것이, 올 것이 왔구만. 이후엔 무엇이 올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 사건보다도 그후에 무엇이 올 것인가를 생각한다.  


▣ 1999.8. 파라과이 아미리카노 호텔.

내가 평양에서 형무소에 들어가니까 열심히 따르던 녀석이 "하나님의 아들이 왜 형무소에 가느냐?" 이러더라구요. 그들은 기성교회의 열성분자였는데,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르쳐 줘 가지고 들어와서, "선생님이 어디 가든지 선생님을 모시고, 돌산을 밭으로 만들어서라도, 농사를 지어서 대접하겠다"고 하고 별의별 말을 지껄이던 그 간나들이 내가 형무소에 쇠고랑 차고 들어가니까 "잘 됐구만! 통일교회는 이제 없어졌다. 하나님의 아들 꼴이 저게 뭐냐?" 그랬다구요. 내가 그게 잊혀지질  않아요. 그들은 다 망했어요. 내가 감옥 갔다 오니까 다 사라졌어요. 선생님에 대해 그런 사람은 잘 된 것이 없어요.


- 이승만의 첩자다. 복중교, 기성교단 투서 80여 통

- 세계적 광야로 쫓겨난 것이다.

- 4300년의 역사를 43년에 재탕감해야 하는 이 억울하고 고달픈 사실.


▣  1991.10.19(토) 국제연수원. 대학순전단 수료자 총회.

나라와 세계의 판도를, 하나님이 6000년간 수고해서 남긴 공적을 다 잃고, 흥남 수용소를 찾아간 선생님의 비통한 사연을 여러분은 몰라요. 고향을 떠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처자가 문제가 아니에요.


하늘땅의 미래의 소망으로서, 해방의 민족이 나를 환영하려 했던 그 무리가 구름 속 지옥으로 꺼져 가서, 암흑세계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통곡하면서, 다시 만나자고 소리를 지르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너희들은 꺼져갔지만, 나는 다시 내 갈 길을 가서, 광명한 아침 해를 안고, 너희들을 찾아가서 다시 해방해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 엊그제 같아요. 쇠고랑을 차고 소리를 지르던 그 소리를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알겠어요?



▶가혹한 고문취조


- 나는 피를 토하는 고문의 자리에서 몇 번씩 쓰러지고, 모든 의식을 잃어버리는 자리에서도, '아버지 나 좀 구해주소' 하고 기도 안 했다. '아버지, 걱정마소.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아직까지 안 죽었습니다. 당신에게 약속한 절개를, 책임져야 할 사명이 아직까지 저에게 있습니다. 동정받을 때가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했다.


- 고문을 받아 쓰러지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요, 숨이 끊어질락 말락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 '레버런 문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이럴 수 있는 자리였다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 내가 매를 맞는 것은 나를 위해 맞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맞는 것이요, 내가 흘리는 눈물은 이 민족의 아픔을 대신한 탕감의 눈물이었다.  


- 이 길을 나서 가지고 생긴 흉터가 여러군데 있다. 이 흉터는 '인류와 하늘이 나에게 준 훈장" 이라고 생각한다. 

- 그때 결의하던 것을, "너, 죽을 때까지 생명을 걸고 가겠다고 하던 그 맹세를 잊어버렸느냐?"


- 아침 점심 저녁 그걸 바라보면서 맹세를 하는 놀음을 한다. '이 흠집을 가진 너는 승리해야 돼!' 하고, 승리하라고 격려한다.  

- 쇠고랑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식구들의 전송


- 그때 평양에 남은 식구들이 손을 흔들면서 전송하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안 흘리는데, 그들은 전부…, 자식이 죽어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남편이 떠나는 것도 아닌데, 그저 훌쩍훌쩍 눈물을 떨구는 것을 볼 때, 그 얼마나 비장한가. 선생님은 그걸 보면서, '하늘을 찾아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 판결을 받아 가지고, 형무소로 가는 길에서 식구들 앞에 이걸 소리를 내면서 흔들었는데, 그 소리가 쟁쟁하다.


- 수갑을 차 가지고, 짤랑짤랑하면서 '굿바이' 하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짤랑짤랑하던 소리가, 거기서 역사적인 後代의 榮華가 생겨나고, 後代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決意를 다짐할 수 있는 盟誓의 터전으로 폭발된다는 것이다.


- 아무리 포악한 원수가 내 손에 쇠고랑을 채우더라도, 그 쇠고랑을 차고 사랑하는 교회와 사랑하는 식구들을 대하여 '잘있거라' 하던 그 말씀 가운데는, 역사를 대하여 심판할 수 있는 팻말이 박혀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