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4.10- 1945. 2 경기도 경찰부 수난
1. 왜놈들한테 그렇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습니다.
1) 말 안 한다면 안 한다는 것입니다.
▣ 1969.5.18(일) 수원교회. 행복과 사랑.
- 2차 세계순회 귀국 후 지구본부 순회.
023-135 선생님은 일제말 왜놈 형사들한테 무수히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에서 지하운동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을 협조하기 위해 상해에도 연락하고 별의별 일을 다 했습니다.
* 그런 투쟁을 하고 고향에 오게 되면 아무개가 돌아왔다고 귀신같이 알고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 선생님도 피를 토하며 사경을 몇 번이나 넘나들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는 함께 일하던 동지들에 대한 책임과 의리를 위해 생명을 걸고, "나 혼자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죽인다고 위협해도 말을 안 했던 거예요. 말 안 한다면 안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시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해방되자마자 모가지를 잘라낼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망하여 눈물을 흘리고 가는 그들이기에 그냥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세가 불리한 것을 안 그들은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문서를 전부 다 불살라 버리고 갔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것을 아는 선생님은 언제 한번 일본 황제의 궁성을 폭발시켜 버리겠다고도 생각했던 사나이입니다. 일본인들에게 우리 민족이 얼마만큼 학살당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나이입니다.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립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일본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시아에서 삼국 노선을 펴기 위해서는 일본이 망했지만 일본은 필시 필요한 나라입니다. 민족성으로 보더라도 틀림없이 독일 민족 이상의 단결된 힘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복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복수로 시작하면 또 복수로 끝나고 그래서 결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통일이념을 중심 삼고 먼저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새로운 규합운동을 하였습니다.
2) 그들의 고문은 아주 지독했습니다.
- 지금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그때처럼 지져대고 하면서 고문을 하면 옷에 똥을 싸면서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할 것입니다.
▣ 1969.10.3(금) 새 문화 창조의 역군. 경기도 구리 동구릉.
- 제1회 전국 성화 대학생 총회. 야외예배.
025-162 학생 때에도 감옥 출입을 보통으로 한 사람입니다. 또 왜놈들의 고문대에서 뱃심도 많이 부려 본 사람입니다. 그런 역사가 많은 사람이에요. 맷집 좋게 생겼지요? 선생님은 일본 녀석들한테 고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의 고문은 아주 지독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그때처럼 지져대고 하면서 고문을 하면 옷에 똥을 싸면서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할 것입니다.
3) "패라, 쳐라, 모든 정치의 조직을 통해 쳐라, 나는 죽음의 한계선을 넘겠다"
▣ 1969.10.12(일) 전본부교회. 복귀의 전선
025-332 나는 왜정시대에 별의별 고문을 받았지만 "패라, 쳐라, 모든 정치의 조직을 통해 쳐라, 나는 죽음의 한계선을 넘겠다" 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의 고개를 여러 번 넘어선 사람입니다. 7, 8시간까지 고문을 당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족이 피를 흘릴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말 한마디만 하면 내 혐의는 풀릴 수 있었지만 안 했던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민족이 피를 흘리고 동지들이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갖은 시련을 극복하고 남아진 이 고빗길에 와서 내가 양보할 수 있느냐"며 버틴 것입니다. "쳐라, 또 쳐라" 하며 버텼어요. 나는 그러한 싸움을 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 천황에게도 원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복수한다고 해 가지고 일본 천황의 궁전에 들어가서 천황을 한 칼로 쳐서 과거의 전부를 다 갚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패자인 것입니다. 하늘은 망한 자를 또 치지는 않습니다. 망한 자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사죄하는 자에 대해서는 긍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이 있기 때문에 패자에게 또 칼을 들어치게 되면 친 자의 후손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 친구 이상 가까운 자리에서 정성을 들이고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공산당을 대해서도 그래야 합니다.
4) 7시간 8시간 심지어 12시간 이상까지 고문을 받아 보았습니다.
▣ 1969.10.18(토) 체휼적인 신앙인. 대구교회..
026-064 내가 왜놈들한테 그렇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 한마디에 수십 명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내 형제들을 위해서, 동지들을 위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극복하고 나왔습니다.
7시간 8시간 심지어 12시간 이상까지 고문을 받아 보았습니다. 생사의 교차로를 몇십 번 왕래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머리를 저으며 "쳐라, 이 자식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배운 교훈을 너희들 앞에 한번 실험해 볼 것이다. 너희들이 지금 나에게 고문하는 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칼을 뽑아 가지고 세계의 3분의 1을 베어 버리더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몸으로는 영광의 감투를 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의까지 하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가 울 때는 어머니를 외면해 버렸고 형제가 울 때는 형제를 쫓아 버렸으며 처자가 울 때는 처자까지도 쫓아 버렸습니다.
5) 자더라도 눈을 뜨고 자요. 그런 훈련을 했다구요.
6) 제일 고생한 것이 감옥에서 취조받을 때입니다.
- 좀 해 가지고는 불지 않거든. 그러면 새빨간 방에 집어넣는 거예요.
▣ 1994.8.16(화) 극복과 승리. 코디악.
- 축복 2세.
263-033 선생님은 나가서도 안 자요. 자더라도 눈을 뜨고 자요. 그런 훈련을 했다구요. 안 자는 것 같지만 자는 것입니다.
제일 고생한 것이 감옥에서 취조받을 때입니다. 좀 해 가지고는 불지 않거든. 그러면 새빨간 방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사흘도 못 가서 정신이 돌아요. 그런 거 모르지요? 재우지 않고 내버려 두면 혼자 웅얼웅얼하는 거예요. 그걸 녹음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뭐냐 하면 "자기 마음속의 제일 중요한 것을 말 안 해야겠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안 하려고 하는데 전부 다 불어대는 것입니다. 그런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간단하지를 않아요. 그런 환경에서 비밀을 지켜야 됩니다. 입을 열게 되면 수십 명의 동지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 하나를 중심 삼고 수백 명의 생명을 방어하겠다 할 때는 자기 생명을 초개와 같이 끊을 수 있는 그런 훈련들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동지들을 규합해서 혁명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다 訓練, 산 훈련을 전부 거쳐야 됩니다. 그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자기가 자기를 훈련해야 됩니다. 눈을 훈련해야 되고 코를 훈련해야 되고 입을 훈련해야 되고 귀를 훈련해야 되고 손발을 훈련해야 되고 마음 몸을 훈련해야 됩니다.
2.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강하지 감정하라.
▣ 1969.11.23(일) 배반자와 하늘. 전본부교회.
027-073 세상이 아무리 반대해도 나는 망하지 않습니다. 나를 감옥에 가두어도 내 마음과 내 이념은 가두지 못합니다. 나를 치라는 것입니다. 치면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걸어 나온 길과 하나님이 닦아 나오신 길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강하지 감정하라는 것입니다. 칠 테면 치라! 내가 너를 미워하는가, 안 미워하는가. 매를 맞고 피를 토하면서도 "아, 잘 맞았다. 역사적인 모든 원한의 인류를 대신해 맞았다. 내가 맞고 잊어버리고 내가 이것을 기억하지 않겠다" 하면서 "하나님이시여, 이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다면 얼마나 멋집니까? 그 자리를 지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는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왜정 때 내가 12시간 가까이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한 적도 있었고 15분 동안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평생 잊지 못할 그런 고문도 받았습니다. 이것을 12시간 받으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맞으면서도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고 죽은 피가 주르륵 쏟아지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쳐 봐라! 그 몽둥이가 부러지나 내 뼈가 부러지나" 하며 견뎌냈습니다. 그것은 하나이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원수같이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가야 할 책임이 내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무엇을 보고 복을 빌어 줄 것인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감방에서 고민하고 연구한 것입니다.
3. "치고 싶은 대로 다 쳐 봐라. 더 이상 칠 수 없는 날에는 뒤집어질 것이다"
▣ 1970.8.9(일) 심정과 절대적인 신앙. 부산 동명장 여관.
- 전국 지구장 수양회.
033-115 선생님은 왜정 때부터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많이 당해 봤습니다. 머리가 터지고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별이별 고문을 다 당해 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견뎌낼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알겠어요?
한 번은 14시간 동안 취조를 당하고 고문을 당해 가지고 기어서 20미터도 가지 못할 만큼 되고 몇 번씩 죽었다 깨어나는 그러한 과정이 反復되었어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세계를 점령하고 하늘의 비밀을 캐내려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말 한마디에 달려 있기에 죽더라도 절대로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각목으로 소름 끼치는 고문을 당할 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의리를 지킬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한 번 약속했으면 자기가 망하더라도 지켜야 됩니다.
이렇게 고문을 당한 후에 하룻밤만 지나면 그날은 슬픈 날인 동시에 잊을 수 없는 날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납니다.
* 나는 20대 시절에 하나님 앞에 이 민족을 구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일본 국민이 천황을 위하는 마음보다도 내가 삼천만을 대신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망한다고 믿었습니다. 일본이 선을 먼저 쳤으니까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참을 치면 남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속으로 "치고 싶은 대로 다 쳐 봐라. 더 이상 칠 수 없는 날에는 뒤집어질 것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을 내 손아귀에 집어넣겠다는 철석같은 신념을 가졌습니다.
4. 입술을 깨물던가 혓바닥을 깨물던가 해서 피를 흘리고 구멍을 뚫어 놓고 가야 됩니다.
▣ 1990.10.14(일) 3대 왕권과 탕감복귀. 코디악.
- 주일 경배식 후 미국 연수 한국 목회자.
206-310 고문할 때는 반드시 피를 흘리고 가야 돼요. 물 먹이고 그런다구요. 물 먹이는 거 알아요? 그리고 배나 어디나 꽉꽉 밟아요. 밟는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견디기 위해서는 관장을 하고 나가야 돼요. 오줌 대신 뒤로 전부 다 뽑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숨통을 뚫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내고 가야 됩니다. 피를 내면 破壞가 안 벌어진다구요. 爆發되지 않아요. 째지지 않아요. 그러니 피를 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의 왕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너무 피곤하게 되면 코피가 나지요? 코피가 안 터지면 뇌출혈이 되는 거예요. 코피 나는 것은 그 방지책이에요. 고단하게 될 때 혈압이 높아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문당할 때는 반드시 숨통을 만들기 위해 피를 흘리고 가야 돼요. 그러니 입술을 깨물던가 혓바닥을 깨물던가 해서 피를 흘리고 구멍을 뚫어 놓고 가야 됩니다. 그런 것을 내가 가르쳐 줘 가지고 많은 사람을 구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의 생애노정이 편안한 길이 아니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길이 굽이쳐 왔지만 그 고개를 다 넘었어요.
5. 일본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한국민족의 비참함을 내가 알았습니다.
6. 일본이 얼마나 나쁘다는 걸 감옥에 들어가서 알았어요.
7. 감옥이 선생님에게는 위대한 선생이 되었어요.
▣1990.12.30(일) 선생님의 70년대를 보내면서 80년대를 맞는 경계선에 있어서. 본부교회.
211-148 일본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한국민족의 비참함을 내가 알았습니다. 아시겠어요? 다 교육이에요. 일본이 얼마나 나쁘다는 걸 감옥에 들어가서 알았어요. 아무리 애국자의 말이나 책자를 통해서 읽었더라도 실감이 안 났어요. 그거 믿을 수 없었어요. 책은 마음대로 생각해서 쓸 수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고문을 받고 피를 흘리는 과정에서 그 동지들과 더불어 있으면서 비로소 한국의 비참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을 누가 해방해야 된다는 이런 의무를 느끼게 한 것도 감옥에 들어가서예요. 감옥이 선생님에게는 위대한 선생이 되었어요. 아시겠어요? 복귀섭리 노정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초석을 놓을 수 있는 한 때였다 이거예요.
또 이북에 들어가 가지고 3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함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공산주의가 인류 앞에 어떤 죄악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 손으로 공산당을 제거시켜야 되겠다는 것을 깨닫고 승공연합을 만들어 공산주의 반대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8. 김경계 어머니
1) "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잘못한 게 없소. 문 아무개의 집안에 태어나 그 가문을 더럽힌 일이 없소."
2) " 良心에 呵責되는 것이 없소. 내가 비록 獄苦를 치르는 몸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아들이 불쌍하다고 눈물 흘리는 그런 어머니는 원치 않소. "
3) "여기에 '忠告해 주고 激勵해 주며 내일의 希望을 위해, 어떤 모험이라도 당당하게 하라"고 권고할 수 있는 어머니가 내게는 필요하지만 그 외에는 필요치 않소."
4) 하나님 앞에 장담코 부끄러운 놀음은 안 했어요.
▣ 1982.10.24(일) 천의를 따르자.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 원리연구회 창립 16주년 기념식.
121-167 내가 20대 젊은이로서 꿈에 부풀어 가지고 욕을 먹으며 날뛰고 다닐 때 우리 어머니는 말이에요, "아이고, 저 녀석이 공부시켜 놓으니 저런다" 그러는 거예요. 내가 똑똑하다는 소리 들었습니다. 동네방네 군에서 씨름을 해도 1등이고 뛰기 내기를 해도 1등이고 모든 것에 챔피언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내가 못생긴 아들이었지만 희망이 컸다구요. 어려운 문중에 하나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기대가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모든 정성을 나 때문에 들였어요. 없는 돈을 모아 가지고 외국까지 보내서 공부하라고 했는데 감옥으로 끌려다니는 거예요, 감옥. 그 감옥이 좋아요? 좋아요, 나빠요? 나쁘지요.
왜정 때부터 어머니가 감옥에 찾아와 눈물을 흘릴 때면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놀음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머니가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말을 못 했어요.
"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잘못한 게 없소. 문 아무개의 집안에 태어나 그 가문을 더럽힌 일이 없소. 대한민국 고유의 전통적 사상을 중심 삼고 비판해 보게 될 때 良心에 呵責되는 것이 없소. 내가 비록 獄苦를 치르는 몸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아들이 불쌍하다고 눈물 흘리는 그런 어머니는 원치 않소. 여기에 '忠告해 주고 激勵해 주며 내일의 希望을 위해, 한민족이 해방을 하고 남북통일을 해 가지고 온 아시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험이라도 당당하게 하라"고 권고할 수 있는 어머니가 내게는 필요하지만 그 외에는 필요치 않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요" 하고 쏴 갈겼다구요.
* 역사를 두고 대한민국에 부끄러운 일을 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장담코 부끄러운 놀음은 안 했어요. 아시겠어요? 그거 무엇 때문에 하느냐? 무엇 때문이라구요? 천의에 의해서. 천의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5) 세계와 하나님의 슬픔을 풀기 위해서요
▣ 1982.10.29(금) 참된 길. 한국.
- 문선명 선생 귀국 환영회.
121-289 왜정 때에 그저 감옥살이···. 일본서 오게 되면 경찰서에서 벌써 나를 호출하는 거예요. 무섭거든요. 그렇다고 주먹질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부모가 와서 눈물을 흘리게 되면 난 청천벽력같이 호령하는 거예요. "당신 아들인 문 아무개라는 사람은 졸장부가 아니요. 내 눈에 서린 것은 어머니보다도 세계와 하나님의 슬픔을 풀기 위해서요. 그래서 이 길에 와 있다' 고 했어요.
9. 일본의 헌병에게 맞는 경우는 테이블 4개의 기둥이 부러질 때까지 때리라고 합니다.
▣ 1993.4.21(수) 나의 생애. 벨베디아.
247-036 자기란 것을 생각했다면 여섯 번이나 감옥에 끌려가서 살아 나올 수 없었을 거라구요. 감옥이 휴양소가 아닙니다. 비참한 곳이에요. 선생님처럼 특별히 사상이나 종교나 도덕적인 관점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로서 박해를 받고 감옥에 끌려간 경우에는 감방의 수인들에게조차 손가락질을 받고 여러 가지 이중 삼중의 박해를 받는다구요.
* 여기에 만민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계산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얻어 맞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한 방 맞으면 몇 백만 명을 해방한다든가 하는 그런 계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때려라, 이놈들"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일본의 헌병에게 맞는 경우는 테이블 4개의 기둥이 부러질 때까지 때리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선생님이 때려 버린다구요. 당당히 싸우는 거예요. 미국에서도 그렇게 당당히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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