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6.8.11 11시쯤 대동보안서 구속
* 1946.11.21 무죄 석방.
- 허호빈 집단이 적발되면서 "종교라는 美名下에 詐欺를 친다"고 종교단체에 대한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허호빈 때문에 내가 끌려 들어간 것이다.
- 박수무당이나 사회를 문란케 한다느니 하고 잡아 가두었다.
- 기독교의 방해와 자진 월북한 종교인, 공민증 없다.
- 이승만의 스파이.
- 희망을 가지고 찾아갔다.
▶ 복중교인 석방을 위한 옥중 조치
- 8월 11일 11시쯤 감옥에 들어가니, 복중교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던 황원신이라는 사람이 그 방에 있었다. 그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이 나에게 와서 경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왜 이러냐고 하니까 "저는 압니다. 저는 말씀드려야 됩니다." 이러면서 자기 집단에 대한 모든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내가 이것은 당신의 책임이니 요렇게 처리하고 요렇게 해 가지고 허호빈한테 빨리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안 나가면 전부 다 이 감옥에서 쓰러진다 이거예요. 그래서 황원신이 혼자 나왔다구요. 나와 가지고는 내가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찾아 왔더라구요. 와서 하는 말이 "자기들 일당에게 암만 권고해도 듣지 않더라"는 거예요.
- 황원신이 석방된 뒤에 허 부인의 남편이 선생님 방으로 왔다. 선생님은 그녀의 남편에게 선생님이 그 젊은이에게 말했던 것을 얘기했다. 그녀의 남편은 자기 아내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 9월 18일 아침 마지막으로 선생님 자신이 편지 한 통을 썼다. 선생님은 식사 때에 밥을 배달하는 사람한테 그 편지를 허 부인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가 그 편지를 읽고 나서 찢어 버리려고 하였으나 공산당 감시원한테 들켰다. 그것은 종이를 갖다 준 그 사람이 간수에게 알렸기 때문이었다. 1946년 9월 18일 오후 2시의 일이었다.
▶ 혹독하고 모진 고문
- 그때 어금니에 금이 간 거예요. 책상다리에 거꾸로 처박혔다구요. 무슨 스파이냐 이거예요. 그때 거꾸로 넘어져 가지고 이가 빠진 거예요. 절반쯤 깨져 나갔다.
- 옛날 공산당들에게 잡혀 매를 맞을 때 그 채찍이 결코 드세었지만 뻗대면서 아무리 맞아도 안 넘어지겠다고 결의했다.
- 소좆 몽둥이라는 게 있다. 이걸로 들이치면 살을 파 버린다. 대번에 거기에 핏줄이 잡힌다.
- 감옥에서 피를 흘리고 고문을 받아 죽게 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안심하시오. 나는 약자가 아니라 사탄이의 어떤 위압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사나이입니다." 하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린 것이다.
- 소련 공산당한테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는 고문도 받아 봤다. "이 녀석, 네가 견디나 내가 견디나" 하며 재미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은 1주일만 가게 되면 전부 다 이래 가지고 자면서 얘기 다 해 버린다. 선생님은 눈을 뜨고서도 잘 잔다. 그것을 연구했다.
- 새빨간 방에 앉혀 놓고 밥도 안 주고 1주일 동안 가둬 놓는다. 빨간 방에 앉아 있다 보면 미친다. 모든 게 안 보인다. 그러니 우리 같은 사람은 눈 뜨고 잔다.
: 문 총재는 박수무당이라는 소문이 났다. 저 사람은 가두어 놓으면 열쇠를 열고 나온다고 해서 7사람이 퍼져 가지고 24시간 지키는 것이다.
▶ 위로와 동정의 손길
- 선생님이 잊을 수 없는 것은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혼자 몸을 가눌 수 없는 경지에서 신음을 할 때에 참 많은 체험을 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같이 해 주고 스스로 품어서 같이 밤을 지새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얼마나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다. 나를 그렇게 보호하시던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 석방
- 그때 선생님은 남한에 있는 미군의 스파이로 고발되었고 선생님이 소련 조사관에 의해서 심문을 받았으나 선생님이 무죄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선생님은 1946년 11월 21일에 석방되었다.
- 그때 선생님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거의 죽어 있었다. 선생님이 다시 살아난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 복중교의 결말
- 허호빈 집단의 실패 때문에,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허호빈 씨 이하 모든 감옥에 있던 사람들을 순천인가에서 공산당이 후퇴할 때 데려다가 모두 학살했다.
- 그때 복중교는 옥중에서 이도령을 만나 해원성사, 해방의 한 날을 그리면서 자기 낭군 오기를 기다리는 춘향이의 심정처럼 딱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
- 내가 그렇게 전도를 했지만 듣지 않아서 다 죽었던 것이다.
▶ 1947년초 대동 보안서에 출감 후 "승리자의 새 노래" 作詞
1) 호산나의 새 영광을 우리는 받들어 영광의 새 생명주 기쁨의 시위로 약속함의 큰 영광을
2) 흑암의 운무를 헤치고 나서니 광명한 새 세계는 완연히 빛나네 새 희락과 새 화평을
3) 새 생명의 새 노래를 부를 자 없으나 택하심의 큰 은사로 부름을 받들어 소망의 새 영광을
4) 지으심의 선하심을 우리는 본받아 하늘의 미와 사랑 찬란히 빛내어 화동의 꽃동산을
후렴) 우리는 찾아서 행복의 자유 동산 새 노래를 부르세 행복의 자유동산 새 노래를 부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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