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옥세현 할머님

true2020 2015. 7. 9. 09:49

▣ 옥세현 (옥경신; 옛 이름)

* 1898년 10월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생 (부친 옥윤형, 모친 민성덕)

* 1946년 11월 평양에서 문선명 선생을 만남

 

* 12세 때 학교에 입학했다. 머리가 길고 예쁘장하게 생겨서인지 남학생들이 너무 따라다녀서 졸업도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다.

 

*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교회는 아버지의 반대로 틈틈이 나가다가 19살 때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서울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졸업 후 군청에 취직, 23세 때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군청 주지사가 되었다. 지방의 군수로 발령 나자 사직하고 고무조합 조합장, 회사 사장하면서 평양 신창리 장로교회의 장로가 되고 나는 집사가 되었다.

 

* 큰아들이 22살 때 일본 유학을 갔다가 대동아 전쟁이 나서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내 아들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을 것으로 믿었다. 아들을 돌봐달라고 밤낮으로 정성 들여 기도하였다.

 

* 어느 날 특별히 은혜받은 사람이 집회를 한다기에 참석하여 그 사람을 우리 집에 초청하여 아들의 무사를 비는 기도회를 사흘 동안 보았다. 기도회를 마치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드러누웠는데 새빨간 불덩어리가 방안에 가득 찼다. 이상해서 밖을 내다보니 뜰 안에도 태양 같은 빨간 불덩어리가 사방에서 왔다 갔다 했다. 방안에 가득 차 있던 불덩어리는 어느 사이에 내 몸을 감싸고돌고 있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기도하고는 그냥 자버렸다.

 

그다음 날 잠자리에 들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있는데 무엇인가가 와서 내 머리를 툭 치며 "일어나라"고 했다.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아 무슨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으나 성신의 불만 충만할 뿐 아무 소리가 없었다. 사흘째 밤에는 삼태기에 불덩이를 가득 담아서 내 몸에 덮어 씌웠다. 나는 너무 뜨거워서 몸부림쳤지만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방을 전후하여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어느 날 새벽에 나에게 계시가 내렸다. "이남에서 올라온 선생님이 만수대 건너편에 계시니 찾아가라. 그 선생님은 지금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고 하시면서 "산 기도를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살림살이 때문에 산 기도를 가지 않고 차일피일하다가 하늘로부터 징계를 받고 열병을 얻어 많은 고생을 했다. 

 

1946년 11월 6일 친언니가 찾아와서 여 선생이 좋은 말씀을 하고 있는데 같이 가 보자고 했다. 그분은 50세 된 아주머니로 이남에서 온 선생님한테 은혜를 받고 기도회를 본다고 했다. 다음날 그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선생님은 삭발하셨고 새파란 저고리를 입고 계셨다. 그 당시 선생님은 27세였고 나는 48세였는데 선생님을 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선생님을 중심 삼고 여러 교회에서 잘 믿는 집사들 수명이 모여서 예배를 보게 되었다. 예배 분위기가 너무나 은혜스러웠고 하늘 앞에 감사의 눈물, 하늘의 사정을 알고 회개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렇게 되니까 기성교회에서 참소를 하고 가족들이 반대하여 종내는 보안서에서 구금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나도 그곳에서 2천 년 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내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이다. 내 가정에서는 내가 선생님에게 다니니까 "이남에서 온 젊은 사람한테 다닌다"고 야단을 쳤고 목사와 교인들도 매일 우리 집에 찾아와서 못 살게 굴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선생님을 따라다녔다. 집회소는 장대현 교회 집사였던 김중화 씨 집이었다.      

 

그 당시 평양에는 허호빈이라는 여자 교주가 만든 복중교라는 교단이 있었다. 그들은 재림주님이 오시면, 입을 옷을 장만하여 큰 방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그 소문에 퍼지자 대동 보안서에서 교주를 구금하고 물품을 모두 압수해 갔다.

 

선생님께서도 그와 같은 단체라고 하여 구금되어 3개월간 복역하셨다. 옥중에서 허 씨를 위해서 그 복중에 있는 예수를 믿지 말고 재림해 올 예수를 믿어야 된다.(어떻게든 감옥을 나가라)고 쪽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것이 간수에게 발각되어 치아가 부러지고 피를 많이 흘리는 고통을 당하시고 나오신 후에 내가 찾아가게 된 것이다.

 

3주일쯤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 5일간 특별금식을 하도록 명령하셨다. 선생님과 여자 식구 3명이 금식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손수 쓰시던 손수건을 주시며 이걸 가지고 기도해 보시오." 했다. 기도하는데 하늘에서 "너의 선생님은 어린 목자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친정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예수님 재림에 관해 "재림주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신다. 거지 모양으로 오실지도 모르니 너는 어떤 거지든지 정성으로 대하라. 사람을 외형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 그 말씀이 생각나서 선생님의 외형은 초라했지만 선생님이야말로 오시리라고 하신 어린 목자라고 믿게 되었다. 

 

5일간 금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반대가 시작되었다. 

 

1947년도에는 식구가 30명가량 되었다. 하루는 나의 몽시에 선생님께서 십자가 형틀에서 고난을 받고 풀리신 것을 보고 달려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매를 맞고 힘 없이 앉아 계셨다.

 

선생님 탄신 28주년을 맞이하는 날에는 식구 5, 6명이 모여서 이날을 기념했고 철야를 하였다.

 

내가 기도하는데 양치는 목자 3사람이 와서 선생님께 경배드리고 나가자 별 3개가 선생님 앞에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선생님의 이모댁 근처에는 "나는 하나님의 부인이다"고 스스로 말하는 박을룡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이 선생님과 연결되어 무슨 하늘의 잔치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선생님께서 식구들에게 준비하라고 하셨다. 

 

내가 여름옷 한 벌을 하고 다른 식구들은 돈을 모아 음식을 장만했다. 그 할머니는 큰 상 하나와 작은 상 하나를 차렸다. 

 

큰 상은 하나님 상이고 작은 상은 선생님 상이니 선생님은 작은 상 앞에 앉으시라고 했다. 잔치를 끝마치고 음식을 나눠 먹는데 "큰 상에 있는 음식은 자기의 12자녀에게 갖다 주라"고 해서 작은 상의 음식을 나눠먹고 헤어졌다

 

그 후에 할머니가 반대 역사를 하고 다니면서 선생님에게 행패를 부려 선생님은 한동안 피해 계셨는데 얼마 후에 미쳐 버렸다. 그가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말었던 것이다. 

 

지승도 씨가 교회에 들어와서 1948년 음력 3월 초하룻날에 하늘 잔치를 하지고 해서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의 몽시에 선생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가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은 어제까지 하얀 명주 저고리를 입고 계셨는데 옷이 다 찢어졌고 얼굴을 보니 심한 매를 맞은 것 같았다. 인주네 가족들이 와서 행패를 부리고 갔다고 한다. 그런 핍박이 있었어도 잔치 준비를 계속했다. 예복을 만들기 위하여 몇 명이 모여 일을 하고 있는데 스므살쯤 되는 처녀가 찾아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처녀는 보안서의 앞장이였다.    

 

이튿날 주일이었는데 아침부터 마음이 허전하고 어수선하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예감이 이상하여 일찍 집회소에 가 있는데 형사들이 찾아왔다. 선생님의 방을 수색하고는 선생님과 원필 씨 그리고 여자 식구 20명을 (大同) 보안서로 끌고 갔다.

형사들은 유치장에까지 들어와서 잠자지 못하게 들볶았다.

 

"선생님은 이승만의 스파이다."

"돈 많은 여자들의 돈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북한은 공산주의자들의 천하였으니 누구든지 간첩 죄목에 걸리면 꼼짝없이 총살당하는 것이 실상이었다.

 

아흐레째 되는 날 호출해서 다시 갔다. 어젯밤의 그 형사가 나의 조카를 잘 안다면서 다시는 그런 예수 믿지 말고 집에 가 있으라며 보내주었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변호사를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다. 선생님에 대한 재판이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어 재판받으시는 날은 법정 가득히 기성교인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선생님께서 삭발을 하고 수의를 입고 나오시니까  "하늘에서 내려왔다면서 왜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지 않느냐?" "저런 것은 돌멩이로 때려죽여야 한다"고 고함을 쳤다.   

 

선생님은 결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30여 명의 식구들을 다 떨어졌다. "하늘에서 보낸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사탄 편 사람이다"라며 자신들이 선생님에게 속았다는 듯 원망했다. 결국 나와 원필 씨만 남게 되었다.

 

원필 씨는 그때 교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사흘 동안 감옥에 끌려가서 문초를 받고 나오자 학교에서 퇴직을 시켜 버렸다. 그러니까 집에서 난리가 나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 선생님은 보안서에서 평양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다시 한 달 후에 흥남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나는 선생님이 평양 형무소에 계실 때 한 번 면회를 가고 흥남으로 가신 직후에 한 번 면회를 갔다. 그 후 한 달 만엔가 선생님으로부터 면회 오라는 편지가 왔다.

 

그다음에 면회를 자주 오라고 또 편지가 왔다. 여관에 들러서 주인에게 죄수들에 관해서 물었더니 흥남감옥에 있는 죄수들은 모두 아오지로 보냈다고 말했다. 형무소에 가서 간수에게 물어본 끝에 본궁이라는 분소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흥남감옥에서 20리 떨어져 있는 분소였다.

 

한 달 후에는 다시 흥남으로 가신다고 하시고 들어가셨다.

 

선생님께서 흥남 형무소에서 본궁으로 이감하신 후, 발이 시러우니 덧버선을 기워 보내 달라고 편지가 왔다. 덧버선 두 개를 만들어 면회를 갔으나 간수가 받아 주지 않아서 그냥 가지고 왔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머리칼로 신을 삼아서 은혜를 갚아도 다 못 갚는다"는 말이 생각나서 내 머리카락 자른 것으로 두 켤레의 양말을 떠서 다음번에 갖다 드렸다. 

 

선생님께서 출감하시고 평양으로 오시면서 그 양말을 신고 오셨다. 그런데 선생님이 우리 집에 계실 때 그 양말을 빨아 두고 피난 올 때 잊어버리고 그냥 왔다. 

 

그 후에 선생님께서 "그 양말을 가지고 왔느냐?" 물으셔서 "잊어버렸다"고 말씀드리니 "아니 그걸 왜 버리고 왔는가?" 하시며 책망하셨다. 그래서 다시 머리칼을 모아 양말을 만들어 드렸는데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950년 10월 14일에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했다. 선생님은 그 길로 열흘 동안 걸어서 평양에 도착하셨다. 우리 집에 계시면서도 선생님은 줄곧 옛 식구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다.

 

자신이 식구댁을 방문하지 않으면 원필 씨를 시켜서 식구들을 모으려 했지만 복중교인 2명이 오고 아무도 안 왔다. 20일 정도 지나니까 이남에 있던 남편이 돌아왔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괴롭다고 원필 씨와 같이 방을 얻어가지고 나가셨다.

 

1950년 12월 4일 후퇴 명령이 내리자 맏아들이 밤중에 차를 가져와서 살림을 모두 싣고 대동강을 건너 그날 밤을 아들의 부대에서 자고 그 이튿날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부산으로 피난 가서 초량교회에 다녔다.

 

현실 씨가 전도 다니는 동안에 나는 선생님 뒷바라지를 마치고, 우리 집에 와서 생활하고 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책망이 내렸다. "선생님이 고생하고 계시는데 홀로 두고 너는 여기와 있느냐?"

 

그때부터 선생님을 모시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왔다. 아이들이 때때로 찾아와서 "자기들을 다 죽이고 왜 여기 있느냐?" "엄마만 여기 와서 있느냐?" 하면서 집에 가자고 애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할 나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엄마를 부르실 때 너희들 뒤치다꺼리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달래서 보냈다. 그 후로 선생님과 함께 생활을 했다.   

 

1946년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을 모시고 나오면서 선생님의 노정을 생각건대 선생님의 생애는 숱한 반대와 고난을 참고 참으시면서 용서와 사랑과 피 땀 눈물로 승리해 오셨다.

 

1. 영계에서 전도한 사람들. 

 

▣ 1994.5.19(목) 중앙수련원. 구원섭리의 완성은 가정에서부터. 

260-260 이러다 보니 전부 다 따르는 식구들은 영계를 통해 가지고 찾아오는 식구예요. 옥세현 할머니, 지승도 할머니도 전부 다 영계에서 명령받아서 온 거라구요. 내가 전도 안 했다구요. 여기 와 가지고는 전부 가르쳐 줘요. 전도는 영계에서 한 거라구요. 통일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1999.4.26(월) 한남동. 모심의 생활.  

301-205 옥세현 할머니도 유명한 부잣집 아줌마입니다. 그때 39살?(49)되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 역사가 많습니다. 통일교회가 무서운 곳인 줄 알라구요. 진짜 무서운 곳입니다. 선생님이 노하게 되면 영원히 못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원수들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기도 가운데 찾아 나왔어요. 원수들의 이름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안 잊어버리면 그 사람을 위해 가지고 자기가 위해 주는 것입니다. 

 

2. 부산 범내골 시절 최선길 부인의 반대.

3. 흥남 감옥 참아버님 면회. 

 

  1997.1.2(목) 상파울루 교회. 교육 전통 실천. 

- 애승일

 

281-022 강현실도 당한 예가 있어? 성진이 어머니한테 "이 간나, 왜 이렇게 드나드느냐?" 하는 말 안 들었어? 그리고 옥세현 할머니 끄덩이를 쥐고 똥바가지를 갖다 씌우는 놀음을 하고. 생각만 해도 무서워서 못 할 기준의 행동을 한 거예요. 빨리 막아 치워야 되겠다 해 가지고 말이에요. 오로지 선생님을 위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 그래서 경찰서에 고소를 한 거예요. 거기가 어디인가? 부산 북부경찰서에 고소한 것입니다. 그게 안 되니까 치안국에 투서를 한 거예요. 그때는 치안국이었어요. 투서를 해 가지고 이런 남편을 둬 두면 가정의 여자들 다 버리고 그러니까 총살해야 된다고, 안 들으니까 총살감이라고 해 가지고 별의별 악선전을 다 한 거예요. 

 

281-081 옥세현 할머니가 없었으면 선생님이 감옥에서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곽정환, 그런 생각해? (예) 한 달이 되게 되면 어머니가 못 오게 되면 옥세현 할머니가 꼭 왔다구요. 어머니는 이북 땅에서 허가를 받으려면 말이에요, 18곳의 허가를 받아야 됩니다. 남한은 그렇지 않잖아요? 옥세현 할머니는 그걸 아니까 이북에 있는 어머니가 오시지 말라고 하고 자기들이 갈 테니까 필요한 모든 것을 부탁하게 되면 자기들이 하겠다고 해서 가져왔다구요.

 

미숫가루 한 번 만들려면 말이에요, 쌀 한 줌이라는 것이 금덩이보다 낫다구요. 그러니 면회 가는데 어머니가 맨손 들고 갈 수 없으니 동네방네 거지 모양으로 그저 한 줌씩 얻으러 다닌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어머니인데 내가 효를 못 했어요. 함흥이 말이에요, 바람이 불면 자갈돌이 굴러간다는 곳입니다. 이름난 곳이라구요.

 

4. 언제나 문 씨가 반대했다구요. 참 신기해요. 

 

1) 옥세현 할머니라고 그 남편이 문 씨입니다.  

 

▣ 1995.7.16(일) 코디악. 4대 심정권과 3대 왕권. 

- 주일 경배식. 

 

270-297 언제나 문 씨가 반대했다구요. 참 신기해요. 그 옥세현 할머니라고 내가 키운 할머니가 있거든. 영계에서 뭘 받는 할머니인데 그 남편이 문 씨입니다. 그 아들이 옥세현 할머니를 받들고 그러다가 형제가 들어와 가지고 좋다고 하다가 나가 가지고 반대한 것입니다. 교단적인 반대의 출발이 여기에서 나온 거예요. 연세대학의 문상희, 반대 대학의 출발, 문교부 장관(문희석)도 그렇고. 참 대표적으로 결사적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입니다. 가인 아벨. 

 

2) 옥세현 할머니는 이북에서 연결 짓는 사명을 했다. 원래는 옥세현 할머니 가정이 중심이 되어야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되지 못했다. 

 

 1968.2.8(목) 전본부교회. 평양 노정. 

019-262 옥세현 할머니는 이북에서 연결 짓는 사명을 했다. 원래는 옥세현 할머니 가정이 중심이 되어야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득삼 씨가 그 사명을 이어받았다.

 

5. 이북에서부터 그때 몇 사람을 데리고 왔느냐? 김원필 그다음에 옥세현 할머니 그리고 승도 노친네. 이 세 사람인가? 

 

▣ 1990.12.30(일) 선생님의 70년대를 보내면서 80년대를 맞는 경계선에 있어서. 본부교회. 

211-174 30대에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와 가지고는 이북에서부터 그때 몇 사람을 데리고 왔느냐 하면 말이에요, 김원필 그다음에 옥세현 할머니, 여기 살아남았네, 그리고 승도 노친네. 이 세 사람인가? 세 사람밖에 안 남았어요. 이것이 아들 앞에 두 어머니와 같이 된 거예요. 

 

* 옥세현 할머니! 경산골 우 장로 집? 우 장로인가? 우 장로 사모님이 되어 가지고 잘살았는데···. 그때 선생님 만난 것이 몇 살이야? 사십 넘었었나? 아, 이쁘장해 가지고 뭐 이래 가지고···. 그게 다 영계에서 가르쳐 줘서 온 거예요. 그래 가지고 죽을 뻔했지, 반대받느라고. 그것도 문가가 언제나 반대했어요, 문가가. 그거 그런 거예요. 

 

▣ 1968.3.7(목) 가정. 수원.

- 430가정 탕감봉 행사 후 말씀. 

 

019-271 선생님은 이북에서 여자 세 사람(지승도 옥세현 정달옥)과 남자 한 사람(김원필)을 복귀했다. 이러한 기대가 없으면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6. 평양에서 유명한 부인인데 젊은 청년한테 미쳐 가지고 자기 아들딸을 버리고 갔다고 소문이 났다구요. 

 

  1990.12.1(토) 본부교회. 참사랑의 실천자. 

210-094 아까 옥세현 할머니에 대한 얘기했지만 그때 서른 몇 살 때 나를 만났나? (저는 사십이 넘었고 아버님은 스물일곱 되셨을 때입니다.) 하긴 그랬을 거라. 평양의 유명한 장로 부인을 만났는데 이름난 집안이라구요. 그 장오 부인이 집을 버리고 아들딸을 버리고 젊은 놈을 따라나서니 얼마나···. 

 

장대현 교회라고 평양에서 유명한 교회인데 그 교회 장로 부인이 이렇게 되니 그 집안 망했다고 평양이 벌컥 뒤집어졌다구요.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평양에서 유명한 부인인데 젊은 청년한테 미쳐 가지고 자기 아들딸을 버리고 갔다고 소문이 났다구요. 영계에서 가르쳐 줘서 나를 만났거든. 그렇게 하늘이 가르쳐 줬는데 영감 말을 듣겠어요? 아들딸 말을 듣겠어요? 이렇게 만났어요. 

 

그때 내가 가르친 것이 뭐냐? 옥세현 노친네 자기 아들딸을 중심 삼고 사랑하지 말라고 했어요. 자기 아들딸이 찾아오게 될 때 교회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거기에 걸렸어요. 어머니의 정을 중심 삼고 그걸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딸이···.  

 

210-103 그래, 끝날에는 여자들이 전부 다 두 남자를 섬긴다는 거예요. 통일교회 사람들도 그랬던 사람이 많을 거라구요. 그러나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그것이 시정됐습니다. 옥세현 노친네 같은 사람도 남편을 버리고 나를 따라온 것이 그거예요. 사실 뭐 바람난 여자지요. 그렇잖아요? 남편을 버리고 왔으니까.

 

그건 왜 그러냐? 그런 운세에 들어오지 않고는 하늘 길을 못 가요. 본남편을 붙들고는 주님을 못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기를 밴 여인이 화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가정을 가진 여인이 화가 있다는 거예요. 핍박을 얼마나 많이 받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