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8.29(토) 개척시대. 한남동. 한국 지도자.
235-176 강현실의 간증을 들어보라구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대구 한복판으로 저녁에 갔는데 누가 환영하는 사람이 있었겠어요? 잘 곳이 있었겠어요? 거리를 방황하고 있자니 얼마나 기가 막혀요. "하나님, 어디로 가야 됩니까? 이 딸의 신세를···." 하고 신세 타령을 하니까, "너는 지금 하루 가지고 그 모양이냐? 그렇게 천년만년을 계속한 아버지의 심정에 도달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이러더라는 거예요. 고생을 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르치는 것은 선생님의 뜻이지, 여러분의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알고 있는 그 뜻을 자기의 뜻으로 이어받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이라도 고생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찾겠다는 것은 도적놈과 같다는 거예요.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처럼 말씀과 더불어 대상을 이루어 주어야 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발표하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반드시 한 사람이라도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이 내 뒤에 따라온다 이거예요. 그렇게 생명선을 넘어 가지고 결의한 사람들이 열 명만 모이게 되면 10만을 움직이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 동지를 규합하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차 타고 다니고 중국 요리 먹고 다니면서 전도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땡볕에서 쉬지 않고 전도하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동정하는 자리에 서야만 하늘이 전체적인 역사를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전도를 내보낼 때 전부 빼앗지 않았느냐구요. 선생님도 여러분을 전도 내보낼 때 전부 다 빼았았다구요. 40일 전도를 보낼 때도 가진 여비를 전부 내놓으라고 한 거예요. 그거 나누어 줘 가지고 보내지 않았다구요. 거기에 하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게 통일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 강현실 전도사의 대구 개척 간증 중에.
나는 선생님의 뜻을 따라 1953년 7월 20일 대구로 전도를 나갔다. 남한에서 제일 교세가 큰 곳이 대구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 곳이다. 한국에서 공식적인 하계 전도 실시는 1957년 7월 20일이지만 4년 전에 출발한 것이다.
나가기 전에 어느 식구가 옷 두 벌을 사다가 주었다. 그것을 선생님께서 보시고 옷 한 벌을 뒤로 감추셨다. "여자도 아닌 남자가 옷 한 벌을 가져다가 뭣하려 하시는가" 하고 불만이 생겼다. 여비를 주시는 데도 차비와 쌀 한 대 값만 주셨다. 섭섭했다.
"내가 진정 어려움과 고통의 길로 보내고 싶지 않다. 행여 이리떼들에게 다치거나 상할까 두렵지만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심정을 이해해 달라."
"외로울 때에 아버지 부르면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고 길을 인도해 주시는 살아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편이시다. 또 그 배후에서 선생님 이상 염려하시며 협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촌지도 잊지 말라"
나는 성경과 옷가지를 흰 인조견(인조 견사로 짠 비단) 보자기에 싸가지고 내려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와 담장 위에 손을 올려놓으시고,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는 모습은···, 속마음은 통곡하시고 계시는 것 같았다.
*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이렇게 큰 기대와 소망을 두셔야만 하는 선생님의 처절하고 불쌍한 입장을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고 "꼭,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하고 손을 흔들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대구역에 내렸으나 갈 곳이 없었다. 교회도 많고 사람도 많은데 하나님의 참심정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 너무도 외로웠다. 혼자서 시내를 거닐며 기도를 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현실아! 현실아! 현실아! 나는 6천 년 간 지상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써 왔는데 너는 1년 남짓 걷고도 어렵다고 하느냐! 내가 네게 용기를 줄 터이니 강하고 담대하여 힘을 내라".
그때 나는 "하나님, 내 힘으로는 일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동행해 주시옵소서". 날은 저물어 밤이 되었다. 잠잘 곳이 없다. 잠이 아니라 우선 기도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구에서 큰 서문교회를 찾아갔다.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서이다.
* 1953년 7월 20일 대구 교회를 개척하면서 헤일 수 없이 이사한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1982.10 강현실 전도사 간증. 나는 진실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 1927년 10월 경북 영주에서 출생
* 1951년 1월 부산 범천교회 전도사
* 1952년 5월 10일 문 선생을 처음으로 만남.
* 1952년 8월 고려신학교 중퇴
(현실 씨는 고려신학교 학생이었는데 선생님께서 학교 그만두고 전도하라고 하시니까 순종하여 전도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옥세현 간증 328)
* 나는 진실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 육신의 아버지께서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너무도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중병을 얻어 출옥하셨으나, 해방의 기쁨도 맛보지 못하고 타계하셨다.
* 나는 아버지께서 가셨던 길을 대신 가야 하며 또 못다 하시고 남긴 일을 해야겠다는 뜻으로 고려신학에 입학했다.
* 고려신학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투옥된 성도들이 출옥 후 세운 학교였다. 그래서 성경 말씀대로 살기를 퍽이나 애썼고 또 실천했다. 주일이면 십리 길 이상 걷지도 않았다. 남이 대접해 주는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성경 말씀 때문이었다.
* 또한 하루에 성경을 60페이지 이상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고 3시간 이상 기도를 해야 했다. 3집 이상 심방하며 전도를 해야 했다. 더군다나 내가 범천교회이 전도사직을 맡았기 때문에 더 열심이었다.
* 5월 어느 날 이연규 여자 대학생이 찾아와 저 범내골 골짜기에 전도하러 갔더니 어떠 청년이 이상한 얘길 하더군요. "무엇이 이상하더냐?" 물었더니 "우리 타락한 인간들이 타락하기 전의 세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데 대단합니다" 한 것이다.
"너, 아무래도 뭐가 잘못되었구나.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는데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가지도 말고 쫒지도 말라 했으니 절대 가지 말라. 내가 알아본 다음에 가야지 그전에는 다시 가면 안돼" 나는 강경히 그 학생을 나무랐다.
* 범내골 청년! 나는 매일 이 문제를 놓고 3시간 이상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상한 청년이 범내골에서 이상한 말씀을 한다는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게 해 주시고 아니라면 갈 길을 막아 주십시오" 하고 1주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
* 1952년 5월 10일이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심방 전도는 가지 못하고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문득 기도 가운데 범내골 청년을 만나 봐야 한다는 결심이 서서 찾아 올라갔다. 그 청년의 姓도 몰랐고 이름도 몰랐다. 거기다 얼굴도 집도 몰랐다. 얼마쯤 헤매다가 한 부인에게 물었더니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우물이 하나 있는데 우물 옆에 허술한 집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 청년들이 사는데···."
* 우물에 다다르니 곱게 생긴 한 아주머니 있었다. 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일어나서 방안을 살펴보고 나는 놀랬다. 그 방이 너무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흙과 돌을 이겨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집이었다. 방바닥은 다다미 두 장도 안 되는 방이었다. 벽은 흙벽 그대로였다. 천정은 비가 새었는지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고 방바닥은 헌 갑바 조각을 깔아 놓았다. 마치 어느 촌 마구간 같았다.
* 나는 그 집을 보고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집에서 살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한이 남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옷차람이 너무도 초라한 노동자 타입의 한 청년이 들어왔다. 퇴색한 국방색 한복 바지, 웃옷은 고동색 낡은 잠바, 미군이 신다 남은 국방색 툭툭한 양말, 대님도 매지 않은 채 걷어 올린 바지의 모습이었다.
* 문선명 선생 "어디서 오셨습니까?"
강현실 전도사 "이 아래 범천교회에서 일하는 전도사입니다"
* 큰 포단을 깔아 주면서 앉으라고 권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7년 전부터 전도사님을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7년 전의 일을 생각해 보니 그 해가 복음사업을 위해 내 일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난 해였다. 그래서 속으로, "이 청년이 무엇을 좀 알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 "오늘 참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1952년) 5월 10일인데 뜻이 있는 날이지요. 내가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그 글을 끝낸 날입니다. (그날 오전에 원리원본의 원고를 쓰시는 것을 마무리하심.) 이제는 다 완성되었으니 오늘 오후부터는 전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님, 성도가 미칠 듯이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아버님 약속 가운데는 세계의 인류가 하나의 형제가 되고 하나의 세계를 원리를 중심해서 이룰 수 있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남에 내려와서 아직 한 사람의 성도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성도를 보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내려왔는데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며 그 청년은 너무도 기뻐하였다.
"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부러워한다"
"한국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할 때가 온다"
"오시는 주님은 육신을 쓰고 오신다"
강현실 전도사 "예수님이 오실 데가 없어서 한국에 오시겠느냐?"
문선명 선생 "1950년도 저 북한 상공에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난 것을 무심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 나 한 사람 놓고 말씀을 하시는 데도 오늘날 수천 군중을 앞에 두고 하시는 것처럼 얼마나 크게 말씀을 하시는지,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오늘 내가 잘못 왔구나. 고막이 터지든지 무슨 변을 당하든지···, 조용하게는 집에 못 들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때에 청년의 눈동자를 보니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이었다. "야, 이상하다. 내 눈이 잘못되었든지 청년의 눈이 잘못되었든지, 아무튼 두 눈 중에 하나는 잘못되었다"고 느껴졌다.
* 그 자리에 앉아서 3시간 이상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은 이만 합시다"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저녁을 먹고 가라"고 너무 권하므로 뿌리치지 못하고 식사를 함께 했다. 그런데 저녁상을 보니 너무 어렵게 살고 있었다. 초라한 나무 밥상 위에 밥그릇은 다 우그러진 알루미늄 양재기였다. 밥은 우들우들한 보리의 시커먼 꽁지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반찬은 쉰 무김치에 두부 구운 것뿐이었다.
* 밥상을 앞에 두고 나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였다. 나는 거절하였다. 작은 방에서 자신 있는 말을 듣고는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26년간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그처럼 신념이 넘치는 말씀은 듣지 못했다. 많은 날 동안 기도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어디에 가나 자신이 넘치게 기도 인도를 했는데 그날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 결국 청년이 인도를 하였는데 나는 그 기도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나도 하루 3시간 이상을 기도해 왔지만 나의 기도와는 차원이 전혀 달랐다. 그 청년의 기도는 세상 사람 어느 누구에게든 다 통하는 기도였다. 하나님의 서럽고도 애달픈 사정을 말하는 기도였다.
나는 기도드릴 때마다 "병난 자는 병이 낫고 시험에 빠진 자는 시험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지친 자에게는 용기를 주십시오" 하는 한결같이 무엇인가 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아버지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 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버님의 뜻을 제가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와 세계를 제가 찾아 드리겠습니다." 기도하면서 서글프게 우는 우셨다.
* 눈물에는 假飾가식도 없고 거짓이 포함될 수 없는 것이기에 목메게 흐느끼는 기도에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기도를 마치고 나는 내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곧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뒤를 돌아다볼수록 "헛 믿어 왔구나. 뭔가 잘못되었구나". 나는 가책으로 가슴이 아파 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청년을 더 사랑하리라"는 마음이 들었다. 내 기도보다는 청년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저녁 식사를 끝내고 "오늘 3시간을 말씀하셨는데 다 끝났습니까?"
"아니오. 며칠 밤을 새우며 할 수 있고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이 청년이 굉장히 큰 이야기보따리를 가지고 있구나. 성경에 대한 새 말씀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니 굉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그렇게 할 말씀이 많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또 오겠습니다"
"이 집은 보기에 초라하지만 언제든지 문을 열어 놓고 생명의 말씀을 찾아오는 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근본문제와 우주의 근본문제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고 있으니 꼭 와야 됩니다"
* 나는 그 토굴과 같은 오막살이 집을 나왔다. 돌아올 때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신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신학의 내용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럴까?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 내 인생이 無로 돌아가는 것 같았고 기도드려도 응답해 주실 것 같지 않았다.
* 그다음 주 월요일에 찾아갈 마음이었지만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무도 확실한 내용이어서 목요일에 다시 찾아갔다. 그 청년은 나를 쳐다보더니 너무 반가워했다.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는데 속으로 의심을 했다. "저 청년이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할까? 젊은 남자인데 내가 젊은 여자여서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앉아서 또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그날도 3시간 말씀을 들었다. 창조원리에 대한 것이었다.
* 3번째 찾아간 날은 5월 16일이었다. 저녁을 일찍 먹고 찾아 올라갔더니 그날은 나를 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셋째 날은 더욱 취해서 들었다. 나는 새로운 말씀에 취해 몸 안에 있는지 몸밖에 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강현실 전도사 "저,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요?"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은데요.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되지요?"
* 남루한 옷을 입은 청년을 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시다. 내 옆에서 열심히 초상화를 그리고 있던 청년과 아주머니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 청년이 김원필 선생, 옥세현 모친이었다. 말씀이 거의 끝날 무렵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약간 넘어 있었다.
* 4시 반에는 새벽기도를 인도해야 하는데 준비를 전혀 못했다. 그런데 기도하는 도중에 교인들이 회개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가슴을 치며 예배당 마룻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하는 이도 있었다. 평소 기도 인도 때는 준비를 많이 했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 바로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심방을 하는데 선생님 생각이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꼭 뵙고만 싶어졌다. 그래서 같이 심방하던 집사와 얘기를 했다.
"집사님, 범냇골에 어떤 청년이 한 사람 있는데 예수를 믿지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권면해서 교회에 나오도록 해야겠습니다"
"어떤 청년인데요?"
"생기기도 잘 생긴 분인데 병이 있다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녀와요."
그 집사는 장로 댁에서 기다리게 하고 찾아 올라갔다.
* 그때 청년은 밖에 계시다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셨다.
강현실 전도사 "지금 심방을 하다 왔으니 가야 합니다."
"20분 이야기를 듣고 가면 좋겠는데요. 이제까지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인간의 머리로 짜낸 것인지, 그 출처를 캐고 싶지 않습니까?"
강현실 전도사 "예, 알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럼, 기도를 해 보시죠. 하나님께서는 꼭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 그때 내 마음은 기뻤다. 만약 그때까지 해 주신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니 이 말씀을 안 믿으면 망하고 지옥 간다고 했다면 아마 그냥 내려갔을 것이다. 기도해 보라는 말씀이 왠지 좋았다.
강현실 전도사 "예, 기도해 보겠습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열심으로 자녀가 간절히 기도하면 꼭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힘이 있었다.
* 다음날이 주일이었다. 그래서 월요일 새벽부터 이 말씀에 대한 출처를 알아보기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다. 엎드려 기도를 하는 도중에 신학교에서 배웠던 이론이 쭉- 스쳐갔다. 훌륭한 이론은 많은데 이론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 적은 것이 안타까웠다.
문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도 하나의 이론으로 그치겠지. 정말 말씀한 대로 실천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함께 골치가 아파 오고 가슴이 답답하여졌다.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도 혀가 돌아가지 않았다. 입이 벌려지지 않아 기도문이 막힌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이런 담벼락이 생겼습니까? 이 장벽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것 같으니 하나님이 이 장벽을 헐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렸다.
* 나는 깨달았다. 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가 지옥임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말도 못 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속만 타들어 갔다.
"아버지, 내게 있는 전부를 빼앗아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통할 수 있는 기도의 길만은 거두어 가지 마옵소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심정적인, 내적인 길만은 끊지 마옵소서" 말 문이 막히고 보니 너무 괴로웠다. 말 못 하는 벙어리가 되어 3일이 지나갔다.
* 4일째도 교회에 나갔다. "사람의 말도 못 믿고 못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얼마나 믿고 받아들이면 얼마나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한 1서 4;20) 회개의 기도를 시작했다.
"저는 사람의 말도 못 믿고 못 받아들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 불신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회개의 기도를 드린 후 몸 마음이 시원해졌다. 벙어리 된 입이 벌려져 "아버지, 하나님, 주님" 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아침 식사하기 전에 선생님에게로 뛰어갔다.
문선명 선생 "왜 3일 동안이나 못 나왔소?"
강현실 전도사 "저는 3일 동안 지옥에 갔다 왔습니다"
"기도를 하려 할 때 의심은 하지 않았소?"
"저도 모르게 의심이 생겼어요"
"벙어리가 된 것은 의심을 했기 때문이죠".
* 그때 옥세현 어머니가 나에게 말을 건네 왔다.
옥세현 어머니 "저분은 훌륭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강현실 전도사 "저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실 줄 알았는데 왜 선생님의 자랑만 합니까? 아주머니께서는 선생님을 언제 또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나는 계시를 받고 들어왔지요"
"계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죠"
"정말로 들었습니까? 저는 26년 간이나 예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은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나도 꼭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요?"
독실한 장로교회 장로 부인으로서 은혜를 많이 받아온 분이었다.
* 어느 날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어요. "만수대 건너편에 젊은 스승이 계시는데 찾아가서 만나 보라"고 해서 찾아가니 바로 선생님이 계셔서 만나 뵙고서 전도가 되었죠. 그러면서 평양에서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평양 시내의 잘 믿는 권사, 집사, 평신도들이 많이 몰려 들어왔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음성과 계시를 받은 자들이지요. 그러자 평양시내의 목사들이 장로들과 회의를 열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결의를 했지요.
"사회 질서를 유린하고 교인들을 빼앗아 간다"고 경찰에 투서를 해서 결국 선생님께서 평양 옥중에 수감당하셨어요. 그때 나는 미숫가루와 옷을 만들어서 자주 면회를 갔어요.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지으셨다.
남편이 장로교회의 장로여서 면회 가기가 어려웠어요. 한 달에 한 번 평양에서 흥남에 다녀와야 하니 여간해서 갈 수 없었어요. 하루는 기차 안에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내가 문 선생님 면회 가는 것 다음 달부터는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더니 흰 옷 입은 노인이 나타났어요. "너 왜 안 가려 하느냐? 지금은 그늘 속에 파묻혀 냄새나는 옥중에 있지만 그 선생님께로 무수한 사람이 모여들 때가 온다. 그러니 힘들지만 계속하라"는 말을 했어요
강현실 전도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옥세현 어머니 "사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나 음성은 들려오지 아니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진심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거듭 3번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빌립보서 3장 20절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We, however, are citizens of heaven, and we eagerly wate for our Saviour, the Load Jesus Christ, to come from heaven.
강현실 전도사 "선생님, 기도 중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문선명 선생 "무슨 음성인데···.?"
들은 내용을 말씀드렸다.
문선명 선생 "전도사님, 그러다간 미치겠네요" 하며 웃으셨다. "미쳐도 하나님을 위해, 선을 위해 미친다면 옳은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 음성을 들은 후가 문제였다. 이 길을 가야 되느냐 안 가야 되느냐. 그때의 환경을 보아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비가 새는 토굴 같은 데서 2, 3명이 예배를 보니 믿기가 힘들었다. 타 교회는 예배를 마친 다음에 신자들이 인산인해로 쏟아져 나오는데 이곳은 2, 3사람뿐이니 도저히 자신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내가 왜 별스럽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가? 장로교회를 다녀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은 생각에 고민을 하게 되었다.
* 그래서 어느 날은 선생님께 올라가다가 소나무가 서 있는 길 모퉁이에서 "오늘부터는 이 길을 다니지 않겠다. 하직 인사를 하고 와야지" 하고 맘을 먹었다. 언제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선생님께 가면 다섯 시간 이상 강의를 듣고 오는 것이었다.
* 그날은 마음을 굳게 먹고 올라가서 선생님이 계시는 방문을 두드렸다. 다른 때 같으면 인기척만 있어도 반갑게 마중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그날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시고 앉아 계셨다.
문선명 선생 "거기 좀 앉으시죠. 오늘은 올라오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강현실 전도사 "저는 별로 기억이 안 납니다"
문선명 선생 "그러면 내가 알려 주겠습니다. 바로 모퉁이 소나무 있는 데서 다시는 안 나오겠다고 결심을 하고 하직 인사를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안 납니까?"
* 나는 나의 비밀을 알고 지적하시는 선생님께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혼자의 생각을 알아맞히는 것을 볼 때 사람이 아닌 신과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말씀을 해 주셨다.
"보따리를 가지고 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돌아올 것인데 왜 헛수고를 하려고 합니까?" 나는 다시 그 자리에서 많은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의심이 또 생겨났다.
* 어느 날은 내가 배운 신학교의 이론과 선생님이 지금까지 말씀해 주신 원리와 대비해 토론을 하기 위해 찾아갔다.
강현실 전도사 "선생님, 예수 믿는데 무슨 숫자가 필요합니까? 40일, 30년, 400년, 4천 년···, 이처럼 4수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시는데 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되었다고 믿지 않습니다"고 했더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입에서는 피까지 쏟아져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턱에 손을 대는데 거짓말처럼 피가 멎고 머리가 환해졌다. 이렇게 아픈 곳을 고쳐 주시니 "내가 이 길을 가고 또 가야 할 것인데···."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또 몇 시간 말씀을 들었다.
* 또 어느 날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날따라 선생님의 옷차림이 너무도 누추해 보였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데 누추한 모습을 보자 또 이론이지 실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을 살피시던 선생님께서 "성경을 아무 데나 펼쳐 보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펼쳤더니 "31절을 읽어 보라"고 하셨다. 그곳은 마태복음 14장 31절인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쓰여 있었다.
* 마 14:31 물 위로 걸으시다(막 6:45-52; 요 6:15-21)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어떤 사본에, 바다 가운데 있어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어떤 사본에, 예수께 가려고 물 위로 걸어가다가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그때 선생님께서 성경을 들고는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이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여도 의심하겠느냐"고 꾸짖었다.
"앞으로 이 원리로써 기독교가 통일될 날이 올 것입니다" 강현실 전도사 "기독교가 통일되려면 거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야지 이 범냇골에서 겨우 세 사람이 통일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문선명 선생 (웃으시며) "지금은 힘들어 보이나 얼마 안 가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도 통일되고 세계도 통일되고 천주도 통일될 것입니다"
* 어느 날 광복동 국제시장 앞을 지나가다가 싸우는 남자와 여자를 보았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언제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까? 천국이 온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 어렵다". 그러자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했다. 발이 저린 듯 아파 오더니 한 발자국을 옮길 수가 없었다. "하나님, 어쩌자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대로 걷지도 못하게 하십니까?"
나는 길거리에서 음성을 들었다. "너에게 몇 번이고 나타나서 가르쳐 주었는데 너는 그래도 불신하고 의심하느냐? 너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야. 저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저들의 생명을 아버지의 사랑 속으로 인도해야 할 전도사란 말이다".
분명 하나님은 나에게 선명하게 들려주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말씀대로 하겠노라고 다짐하고 회개했더니 아픈 발이 땅에서 떨어져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거짓말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진실이었다.
* 의문과 계시가 반복되어 온 어느 날 나는 담판기도를 했다. 내용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느 길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어떠한 길이냐?" 하는 것이었다. 기도하던 어느 날 기도의 응답을 주셨다. "내가 6천 년 간 섭리하고 역사해 온 길이 바로 이 길이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 응답의 은사를 끝으로 나는 나의 갈 길을 확실히 정했다. 그리고서는 모든 생활의 중심을 선생님께로 정했다. 그리고 이 길을 가다 죽기로 결심했다.
* 새벽 기도를 마치고 권사님 한 분을 우리 집에 가자고 권해서 집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권사님, 예수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 만나서 주님한테 구원을 얻는 것 아닙니까? 그 주님이 언제 어느 땅에 오시는지 우리 기도 한번 해 봅시다" 하고 그 이후로 새벽마다 냉수 목욕을 하고, 권사님과 기도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는 그분은 환상을 보았다. "처음에는 불이 켜진 전구 3개가 보이고 그다음 무궁화꽃 세 송이가 보이고 예수님의 얼굴이 그 위에 나타났다"고 말해 주었다.
* "환상으로 보여 주신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기도를 하니까 "전구는 밝은 빛을 가리키고 무궁화는 한국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얼굴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뜻한다"고 가르쳐 주시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 번 기도해서 다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으니 또 한 번 기도해 보시오". 역시 같은 제목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이번에는 "이상한 산이 하나 보이고 그다음에는 키가 훤칠한 청년 한 사람이 보였다"고 했다. "전도사님, 이번 기도는 실패했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보여 주시는군요."
* 그 후에 그 권사님을 모시고 선생님이 계시는 집에 가보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권사님께서 "전도사님!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저기 보이는 저 산이 오늘 새벽에 기도할 때 본 산입니다"
선생님이 계시는 문 앞에 다다랐다. "참 이상합니다. 이 집이 내가 기도할 때 본 집하고 같군요".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문을 열고 나오셨다. 선생님을 뵙더니 "환상으로 보여 주신 분하고 똑같다"고 하면서 너무너무 좋아서 선생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셨다. "권사님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은 강 전도사가 너무 믿지를 못해서 권사님의 증거를 통해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 어느 날 신학교의 설립자인 한 목사가 서면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문선명 선생 "그럼, 강 전도사가 가서 만나 보지"
그분은 신학 박사이며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7년 간이나 옥살이를 한 분이었다. 영계에서 협조만 해 주신다면 문제가 없다 하고 찾아갔다.
부흥회가 끝나자, "목사님, 요즈음 제가 굉장히 말씀을 잘하시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성경 66권의 의문점을 확실하게 들려주는 분입니다. 이상하게도 의심을 하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벙어리가 되고 발이 땅에 붙어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가셔서 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나의 신앙 체험을 말씀드렸다.
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얼굴빛이 금방 달라졌다. "장로교의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을 얻는데 왜 다른 데로 갑니까? 당장 끊고 가지 마시오" 하는 것이었다. 돌아와서 선생님께 보고를 드렸다. 영계에서 협조를 해 줄 것을 믿고 갔는데 통하지 않습니다. 내 보고를 들으신 선생님은 "찬송을 부르자"고 하셨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아니 버리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모두 3사람이 불렀는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리고 기도를 하셨다. "아버님, 왜 남이 아니라는 길을 가야 합니까? 아버지가 약속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하여도 기필코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남이 반대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출발해야 하고 이 길을 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셨다.
* 나는 선생님의 뜻을 따라 1953년 7월 20일 대구로 전도를 나갔다. 남한에서 제일 교세가 큰 곳이 대구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 곳이다. 한국에서 공식적인 하계 전도 실시는 1957년 7월 20일이지만 4년 전에 출발한 것이다. 나가기 전에 어느 식구가 옷 두 벌을 사다가 주었다. 그것을 선생님께서 보시고 옷 한 벌을 뒤로 감추셨다. "여자도 아닌 남자가 옷 한 벌을 가져다가 뭣하려 하시는가" 하고 불만이 생겼다. 여비를 주시는 데도 차비와 쌀 한 대 값만 주셨다. 섭섭했다.
"내가 진정 어려움과 고통의 길로 보내고 싶지 않다. 행여 이리떼들에게 다치거나 상할까 두렵지만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심정을 이해해 달라.
외로울 때에 아버지 부르면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고 길을 인도해 주시는 살아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편이시다. 또 그 배후에서 선생님 이상 염려하시며 협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촌지도 잊지 말라"
나는 성경과 옷가지를 흰 인조견(인조 견사로 짠 비단) 보자기에 싸 가지고 내려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와 담장 위에 손을 올려놓으시고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는 모습은…, 속 마음은 통곡하시고 계시는 것 같았다.
*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이렇게 큰 기대와 소망을 두셔야만 하는 선생님의 처절하고 불쌍한 입장을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울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고 "꼭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하고 손을 흔들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대구역에 내렸으나 갈 곳이 없었다. 교회도 많고 사람도 많은데 하나님의 참심정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 너무도 외로웠다.
혼자서 시내를 거닐며 기도를 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현실아! 현실아! 현실아! 나는 6천 년간 지상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써 왔는데 너는 1년 남짓 걷고도 어렵다고 하느냐! 내가 네게 용기를 줄 터이니 강하고 담대하여 힘을 내라".
그때 나는 "하나님, 내 힘으로는 일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동행해 주시옵소서". 날은 저물어 밤이 되었다. 잠잘 곳이 없다. 잠이 아니라 우선 기도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구에서 큰 서문교회를 찾아갔다.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서이다.
* 1953년 7월 20일 대구 교회를 개척하면서 헤일 수 없이 이사한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1956년 6월 10일 대전 교회를 개척하면서 전도가 너무나도 안 되어서 매일 대전시를
일곱 바퀴씩 돌면서 기도했다.
* 1957년 7월 20일 광주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입교를 했다. 그러나 한꺼번에 다 뜻을 버리고 나가는 모습을 볼 때는 한없이 통곡했다. 하나님이 지금도 타락한 인류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계심을 체휼하면서 마음 아팠던 때가 지금도 내 머리에 남아 있다.
* 선생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도에 미치신 분이다. 80일간 얻어먹고 빌어 자면서 다니다가 와서 보고를 드리면 그 보고를 다 듣고 계시다가 "이제 언제 나가려느냐?"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철렁한 적이 있었다. "하루 저녁이라도 전도라는 생각 없이 지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 1954년 4월 충남 대전에 들렀을 때 일이다. 이곳에서 수십 년간 영계를 통하고 있는 백신명 씨라는 할머니가 계셨다. 너무도 이름이 나 있는 분이므로 찾아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당신은 천사장적 나팔 사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여러 식구들이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선생님을 지적하면서 "종교를 통일하실 분이 계시다"면서 기뻐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당신이 가는 길은 무한히 좁고 험한 길이어서 어느 누구도 가기를 꺼려한다. 멀지 않아서 세계인들이 다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이니 힘들고 어려워도 꼭 이 길을 가라"고 격려해 주었다.
* 나는 30세도 못 된 젊은 나이에 남한 일대를 여러 차례 순회하였다. 전라북도 이리에서 있었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이리역에서 내렸으나 갈 곳이 없었다.
"하나님! 길을 인도해 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 걷는 도중 소복을 한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서는 "선생님, 이제 오십니까?" 나는 아무리 보아도 모르는 분이어서 "언제 어디서 나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모릅니다만 오늘 새벽 기도를 드리는데 선생님 얼굴이 환상으로 나타났지요. "오늘 이런 사람이 올 터이니 기다리고 있다가 맞으라"는 말씀이어서 기다리고 있는 중에 선생님이 오셨다고 너무 좋아했다. 그 부인의 이름은 이순희 씨였다.
화장품 장사를 하는데 오늘은 장사하러 나가지 아니하고 기다린다고 했다. 그는 참된 말씀을 찾아 전라도 일대를 헤매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기도 제목을 주었다. "타락이 어떻게 되었느냐?" 불륜한 사랑문제로 타락했다는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부활은 공동묘지 속에서 시체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원리를 알지 못하였으나 기도로써 해답을 얻어 원리를 증거해 주었다.
* 1959년에서 1966년까지는 파고다 공원에서 전도를 할 때 목이 쉬어 말을 못 하게 되었다. 선생님께 3일만 쉬게 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목이 쉬어 말 못 하겠으면 공원 가운데 서서 손짓 발짓 몸짓이라도 하고 서 있으라구". 그때의 그 말씀이 항상 내 귓전을 울린다.
* 나는 내가 가고 있는 험한 길을 뛰쳐나가 넓은 길을 가려고 발버둥쳤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질책과 징계로 하늘의 좁은 길을 가도록 인도해 주었다. 그런 만큼 하나님에 대해 죄송스럽고 뵐 면목이 없다.
* 이제는 60이 가까워 오니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육신 생활임을 실감하게 된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이 생명을 아버지 앞에 빛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돌려 드렸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내 한 육신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어 전체 하늘 뜻을 조속히 성사시킬 수 있다면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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