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승만 박사와 하나되지 못했다.
▣ 1967.5.14
선생님이 27세 되던 때(1946년) 이 박사가 선생님과 하나 되었더라면 뜻이 빨리 이뤄질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은 이북으로 갔다.
◑ 이승만 1875.3.26.~1965.7.19.
대한제국(1897.10.12.~1910.8.29. 고종 황제가 제국 선포.) 시절 독립신문. 협성회 회보 주필. 독립협회 활동. 대한민국 초대, 2대, 3대 대통령(임기 1948.7.24.~1960.4.28.)
▣ 1970.10.13
탕감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이남, 남쪽에서는 할 수 없다. 북쪽으로 가는 것이다. 선생님이 북쪽으로 간 것은 사탄의 본거지로 간 것이다. 사탄의 공산권으로 갔다. 공산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과거 기독교가 유대교에 쫓겼을 때에 로마로 들어가 400년 동안 싸움을 함으로써 기독교의 승리권을 만든 것 즉 그리스도의 자유의 평면적인 기반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북쪽으로 가서 그와 같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북으로 간 것이다. 북으로 가서 공산당과 싸웠다. 거기서부터 기반을 만든 것이다. 거기서 몇 사람이고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상세히 말하자면 한이 없다. 여하 간에 몇 사람을 복귀해 나왔다. 몇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위기대이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몇 사람인가가 함께 따랐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제자와 같이 반대하고 도망쳐 버리는 입장이어서는 안 된다.
공산권의 공포권이 아무리 두렵다고 하지만 목숨을 아껴서 모두 도망쳐 버리는 입장이어서는 안 된다.
그 환경권에 있어서 몇 사람이라도 식구가 남지 않으면 안 된다. 투옥되는 그 당장부터 지상천국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을 감옥 안에서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는 내용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1968.3.7(목) 야외 수원.
- 430가정 탕감봉 행사 후 말씀.
선생님은 이북에서 여자 3사람 (지승도, 옥세현, 정달옥)과 남자 한 사람(김원필)을 복귀했다.
이러한 기대가 없으면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 1963.8.11(일) 전본부교회 주인이 없는 아버지의 뜻.
012-330 선생님은 하늘로부터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난 지 두 달도 못 된 성진이를 그냥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습니다. 처자를 내버리고 가는 그 사내 녀석이 사람입니까?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성진이는 천지에 고아와 같은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 얼마나 처량해요? 그러나 가는 겁니다. 사망의 땅을 박차고 하늘이 바라는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겁니다.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고 국경선을 넘어서 가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출발한 것이 이 길입니다. 이 길! 선생님은 이렇게 환경적인 모든 시련을 겪었습니다.
역사적인 기반이 되었던 모든 것이 전부 십자가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돈을 탐하지 않고 명예에 굴복하지 않고 내 위신과 처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나안을 복귀하려는 하나님의 이념에만 사무쳐 있습니다.
▣ 1965.12.5(월) 전본부교회.
선생님이 성진이를 버리고 평양 전도를 출발한 것은 자식보다 제자를 하나님같이 사랑했다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였다.
2. "내가 여호와의 부인이다." - 박을룡 씨.
▣ 1969.6.8(일) 전본부교회 불쌍한 복귀의 역군들.
023-284 그런데 소문을 들으니 평양에 이상한 할머니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집단이니만큼 그러한 사실은 서로가 속속들이 연락을 하거든. 소식이 오는데 무슨 소식이냐 하면 그 이상한 할머니가 "내가 여호와의 부인이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 할머니를 미쳤다고 하지요. 기성교회에서도 정신이 나갔다고 뭐 뭐 어떻게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돌았다고 평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그러한 부인이 나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 소식을 듣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늘이여! 복귀의 사명을 중심 삼고 천륜의 법도의 터를 이 삼천리 반도에 마련하였으니 이러한 부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닦아 나온 것을 해결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제가 평양으로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1946년 6월 2일에 선생님은 이제 나는 나로서의 가야 할 길을 작정했기에 마지막 인사겸 해서 당시 김백문 씨가 수도원을 만들어 특별집회를 열고 있던 문산으로 떠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인간의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났다가 떠나갈 때는 간다는 인사라도 하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해방 직후였기 때문에 쌀을 사기가 굉장히 힘들었는데 선생님이 그때 쌀을 한 트럭쯤 사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낭을 짊어지고 트럭으로 쌀까지 가지고 올 계산을 하고 출발했는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이북으로 가라는 하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북으로 간 것입니다. 쌀이고 뭐고 다 날려 버렸지요.
그때 우리 성진이 어머니과 성진이를 남겨 놓고 간 것입니다. 이거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진이 어머니와 성진이가 고생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결국 기성교회가 받들지 못함으로 그러게 된 것입니다. 그건 불가피한 것입니다. 재탕감 역사를 해야 됩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품고서는 복귀 역사를 못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모르는 제삼자의 입장에 갈라 놓고 복귀역사를 해 나오는 겁니다.
이북에 갈 때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잃어버린 12제자를 감옥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38선을 넘을 때도 무지개가 앞을 인도해 줍니다. 120리 길을 직접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이런 놀라운 인도를 받아 평양에 그 할머니를 만나 가지고 탕감복귀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영계에서 승리하려면 지상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자기 혼자서 이겼다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실력으로 직접 대결해서 이겨야 됩니다. 그때 선생님은 26세의 연령이었지만 영적인 세계의 프로그램을 다 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복귀의 길을 이렇게 가는 것이다." 딱 짜 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영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기반을 닦아서 실체의 세계를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탕감복귀역사이기 때문에 누가 먼저 신령한 역사를 해야 되느냐, 누가 먼저 복귀되어야 하느냐 하면 해와가 먼저 복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여호와의 부인이다." 하는 명사가 먼저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그 할머니를 만나서 무엇을 하느냐? 그 할머니의 종이 되는 겁니다. 완전히 종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수많은 인류의 탕감복귀 노정의 길이 전부 다 막혀 있기 때문에 이 길을 열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극히 높은 영광의 기준을 알고 하나님이 축복한 기준이 높다 하더라도 최하의 자리, 종의 기준에서부터 개척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를 전도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평양에 가 있을 때, 전부 다 선생님을 따르지만 선생님은 그 할머니에 대해서 어머님 이상으로 효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의 입장에서 천대를 받으면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온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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