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의 예물. 1967.1.29(일) . 전본부교회.

true2020 2014. 2. 6. 16:49

▣ 1967.1.29(일) 정성의 예물. 전본부교회.

017-227 사람은 누구나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정성의 자리에서 자신을 갖추어 전체 앞에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 정성 들이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一片丹心을 지녀야 합니다.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統一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시작이나 과정이나 끝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되어서는 정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一片丹心, 통일된 마음을 중심 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자기를 위주로 한 것이 되면 정성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精誠은 나를 위주로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즉 가정이면 가정, 사회면 사회, 국가면 국가 등 더 큰 상대를 위해 들여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정성 들인 것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남아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 일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정성의 터전은 상대를 위한 것만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 자기를 위주로 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心情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마음을 터전으로 하여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위해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일편단심 끊임없이 努力해야 합니다. 

 

* 그리고 "정성 들였다. 충성했다"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努力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努力만으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 세계를 위하는 데 있어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나 반대 작용이 일어날 수 있고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더불어 忍耐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또한 忍耐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안팎, 사방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게 될 때는 그것을 잘라 버릴 수 있는 勇氣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고 반드시 鬪爭의 過程을 거쳐야 합니다.

 

017-229 먼저 내가 정성을 들여야 하고 정성을 지닌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편단심 즉 통일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상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과 一片丹心의 마음이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정성을 세워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努力과 忍耐와 鬪爭이 必要하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사망의 세계에 떨어진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해 나오셨겠습니까? 만약에 적당히 형편에 따라서 "되면 되고 말면 만다"는 식으로 섭리해 왔다면 사회 환경의 치우침을 받고 사회 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섭리해 나오셨다는 결론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하려 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되느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마음, 마음 구석구석까지도 꽉 찬 일편단심으로···, 이렇게 구원 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해야 합니다.

 

017-231 구원이라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가에서 회복이나 복귀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배후에는 정성 어린 투쟁 역사, 피어린 인내와 노력의 역사, 일편단심의 눈물의 역사가 얽어져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 정성을 다 들여서 무한한 노력을 해서 충심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왔습니다.

 

* 그러면 구원섭리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느냐? 인간도 역시 하나님을 대하려 할 때마다 사탄이 옆에서 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120년 동안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생애를 내어 놓고 그 길을 나섰던 노아의 결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거기에 두 마음이 있었다면 10년도 못 갔을 것입니다.

 

017-233 6천 년 전부터 사탄 세계에 인연 맺어져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탄 세계의 수많은 인류가 들인 정성의 도수를 능가해야만 구원 섭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탄도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고 했습니다. 합당치 못하다는 것은 사탄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사탄 세계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干涉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천국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느냐? 내 부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내 처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공식인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선조들 즉 노아나 아브라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선조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017-236 우리는 정성을 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추방하는 일에 정성을 바쳐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디를 가든지 인간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들의 주위에 어떤 어려운 환경과 원수들의 총칼이 모여든다 해도 참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뼈 없는 사나이로 참아서는 안 됩니다. "두고 보자. 어느 한때에 내가 갖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시련의 환경은 결국 종결될 것입니다. 

 

* 義를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 놓고 나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한 터 위에서 아버지를 대해야지 패자의 모습을 가지게 되면 아버지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슬픈 길을 걸어오신 것은 수많은 선조들이 실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수하여 낙망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더욱 서러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분하였던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간직하고 참음의 심정으로 싸워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신앙생활에서 싸움의 노정을 거쳐가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가슴을 부여 안고 자탄하는 노정을 걷게 됩니다. 그것이 천리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대하여 부르고 있는 소망의 사람이 되려면 정성 들인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017-238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효성을 다하는 자는 되지 못했을망정 동참자라도 되었는가?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여러분들은 영점입니다. 영점! 이러한 마음을 느끼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경배드리기 위해 사지를 펴고 들어올 수 있습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죄지은 사람은 죄가 가볍습니다. 불충의 과거와 불충한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또다시 찾아 나오려니 얼마나 초조하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이라도 일으켜 봤습니까? 

 

* 은혜받아 가지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무리나 하나님의 힘을 입어 천국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싫어하십니다. 천국을 창건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017-240 보다 정성을 많이 들이는 사람이 있으면 하늘은 그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은 아직 "나는 아버지이고, 너는 아들"이란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 결정하기 전에는 選民이지 天民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天民으로 결정되었더라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선민사상이 아니고 천민 사상입니다. 

 

017-242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지방에서 어떤 식구가 사과 하나를 선생님께 가져왔더라도 선생님은 함부로 손대지 않습니다. 정성 들인 것을 잘못 건드리게 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편단심의 심정과 하나님의 최고의 노력을 무시하게 되면 천륜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 남이 정성 들인 물건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100만큼 정성 들인 물건이라면 110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대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017-243 선생님이 오늘 아침 태릉 성지에 갔었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성지를 누가 얼마나 지키느냐? 세계 40개국의 120개소에 설정해 놓은 성지에는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은 성지에 대한 마음이 지극히 깊은데 자녀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하나님이 마음은 얼마나 서러우시겠습니까?

 

* 성지에 대한 하나님의 서러운 마음은 여러분이 사죄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로 인해 서러움을 느끼게 될 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충신 열녀는 다시 될 수가 없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일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 최고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12:30)"고 하셨습니다.  

 

* 지금까지 우리 선조들이 들인 정성은 소망의 정성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망의 한날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몸부림친 정성이었지 소망을 차지하여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은 못 들여왔습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입장에서 탕감 노정에서의 뒤넘이치는 정성은 되었을지언정, 소망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정성은 못 들였다는 것입니다. 

 

017-245 앞으로 참다운 아들딸들이 들여야 할 정성은 무엇이냐? … 소망의 정성, 영광의 정성, 충성의 정성, 모심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을 남기고 가야만 천국이 내 천국이 되고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여기에 동참하는 우리는 첫째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017-245 복귀 원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슬픈 역사 과정을 종결짓기 위해 정성을 들여 탕감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017-247 신념이 얕은 사람은 앞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주체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념을 앞세우고 쉬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가 밥바리("밥그릇"의 북한말)를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017-250 선생님은 정성 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배짱부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랑이 방귀와 마찬가지입니다.

 

* 정성의 줄로 하나님을 꽁꽁 동여매면 하나님도 완전히 결박당합니다. 정성의 줄을 끊을 수 있는 천법은 없습니다.

 

* 정성의 무리는 맞고 빼앗아 옵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따라서 이런 과정에 서 있는 여러분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 먼저 내려가서 맞는 것입니다. 맞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동정을 받게 됩니다.

 

* 까닭 없이 맞았으면 손해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서도 다리를 펴고 코를 골며 잠만 잤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삼키지 못할 때는 수가 난다" 이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려니 때로는 襤褸남루(옷 따위가 낡아 해지고 차림새가 너저분하다) 해야 하기도 했고 때로는 손가락질 받아야 했습니다.

 

이 길을 개척하면서 가지가지 苦楚(괴로움과 어려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를 다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風霜을 겪어 오셨는데 내 어이 이만한 풍상을 겪지 않으리오!"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당한 그런 사연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이 갖지 못한 보화를 창고에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