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휼신앙의 중요성. ▣ 1971.2.7(일) 전본부교회

true2020 2010. 12. 14. 19:08

1971.2.7(일) 전본부교회.  체휼신앙의 중요성

040-275 우리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은 벌써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고 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대상 관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져서 주체에게서 되어지는 사실이 대상에 미쳐지고 대상에게서 이루어지는 사실이 주체에게 관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맺어지지 않으면 뜻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이요 뜻을 위해서 움직였다고 하는 그 결과가 하늘의 섭리 앞에 보템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를 가져 가지고 묶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수수작용을 해 가지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되는 정도에 따라 우리 생활환경에 變遷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천된 내용을 우리 자체의 생활면에서 봐 가지고 그것이 과거보다도 더 가치적인 것으로 느껴지게 될 때 우리는 신앙이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상대적 관계를 통해 의식을 하게 됩니다. 물론 자기 마음속에서도 생각은 하겠지만 대다수 감각적인 기관을 통해서 자극을 받아 가지고 상대적 관계를 중심 삼고 의식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의 마음 생활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 느껴진 사실을 상대적 생활환경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신앙의 기준 밑에서 일 년이면 일 년 동안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면 그 계획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그리고 주체되시는 하나님과 대상되는 내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를 이 환경에 어떻게 맺히게 하느냐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주고받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새로운 번식 곧 제3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3의 결과라는 것은 주체의 목적뿐만이 아니라 대상의 목적 즉 이중목적을 지닌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 2월이면 2월 한 달을 중심 삼고 신앙적인 면에서라든가 각기 나름대로의 어떠한 목표를 세워 실천해 나간다고 하면 그 목표를 자기 개인의 목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목표는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공동목표로 그 결과도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공동적인 가치의 결과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하는 일이라 해도 그 일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介入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반해서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같이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때 여기에서 체휼신앙이 出發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040-277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마음 문 즉 心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나면 나를 대해 줄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대하고 계시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주시는 方向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마음 문을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040-278 그러면 신앙자로서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일을 대하는 데 있어서 사소한 일이든 어떠한 일을 막론하고 개인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팽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팽팽하게 공기를 넣어 완전히 둥글게 된 공과 같은 마음자세를 가지라 이거예요. 찌그러지지 않고 완전히 팽팽한 공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不安한 마음이라든가 혹은 개인의 욕심을 중심한 邪된 마음을 가지면 둥그런 공과 같은 마음에 모角かど가 생깁니다.  이 마음이 들 때에는 평면적으로 전부 다 접촉되어야 할 텐데 모가 생기면 모난 끝부분부터 접촉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를 원활히 자극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반대적인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런 입장에 처하면 처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가책을 받고 양심의 기준이 점점 削減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원만한 공처럼 팽팽한 마음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에 어떠한 자극이 들어오면 마음 전체가 공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것을 그리며 명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명상할 때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 마음을 둥글게 해서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중심 삼고 하나님의 본성과 내 본성이, 봄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봄절기의 주체되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 성품이 주고받을 수 있는, 완전히 공명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이렇게 공명되는 내용을 중심 삼고 자기가 요구하는 목적을 대하게 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共鳴을 느끼지 못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일을 대하게 될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일을 바라보고 계신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느끼지는 못 하지만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일에 하나님이 먼저 개입해 계신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박혀 있다. 지금은 그 뜻을 중심 삼고 내가 접선하는 순간이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나 혼자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면 일 자체를 중심 삼고 볼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먼저 성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가 있는 뜻을 따라가서 그 뜻과의 일치점을 기해야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종합해 보면 그렇습니다.

 

 

040-280 뜻의 일치점을 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非良心的인 立場에 서서는 안 됩니다. 純潔한 마음으로 그 일을 중심 삼아 가지고 내 마음이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완전히 공명될 수 있는 생활태도를 키워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하더라도 그 어려운 일이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처해 있던 입장보다도 한 단계 전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입장에서 마음과 뭄이 주고받는 느낌을 느껴 가지고 그 일을 대하여 나가게 될 때는 하늘이 따라옵니다.

 

이러한 느낌이 없게 될 때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 거기에 가 있다는 그러한 실감 있는 감정을 가지고 어떠한 사물을 대하고 일을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일에 이미 뜻이 와 있기 때문에 그 뜻과 더불어 나는 완전히 일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양심적 기준으로는 안 됩니다 純潔한 良心을 가지고 일을 대하게 되면 그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얻게 될 때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대하고 있는 것이 대개 어떻게 구분이 되느냐? 첫째 물건을 대하는 일 둘째 사람을 대하는 일 셋째 말을 대하는 일, 다시 말하면 물건을 대하는 대물 관계 다음에 사람을 대하는 대인관계 다음에는 대인관계에서의 말을 하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말은 간접적인 목적 즉 제3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건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천법 혹은 하나님 앞에 걸리지 말라!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도 걸리지 말라! 그다음에 말하는 관계에 있어서도 걸리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하는 관계에 있어서 그 말한 것에 대하여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을 촉구시켜야 됩니다. 말은 행동의 동기가 되기 때문에 말하는 데 있어서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040-281 그러면 대물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하늘화시키느냐? 즉 그 일을 타락한 나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대했다는 입장을 어떻게 세우느냐?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나 자체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대하느냐?

 

또 말을 하더라도 나 혼잣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늘의 말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말한 것은 말만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을 동반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생활권내에서 관계되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 자기 일신을 두고 보더라도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어려운 일에 몰려 가지고 피해를 받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고역을 극복해야 할 수난의 길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 수난의 길을 혼자 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수난의 길을 무한한 가치의 중심인 하나님과 더불어 간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같이 하는 수난의 길 앞에 자기가 동참한 사실이 얼마나 큰 가치인가를 느끼게 될 때 그 고통의 대가보다도 감사의 대가가 더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그 어떠한 고통의 길도 감사의 길이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영광의 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러한 자리까지 나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물건을 대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대해서는 안 됩니다. 저 물건은 나에게 플러스가 아니면 마이너스를 가져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나에게 있어 복이 되든가 아니면 화가 되든가 한다는 것입니다.

 

040-281 마이너스를 가져오느냐 플러스를 가져오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여기에서 마이너스되는 자리를 피하고 플러스될 수 있는 입장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040-283 이렇게 여러분이 찾아 나가게 되면 무슨 일을 대하든 벌써 마음이 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나 물건을 대하게 될 때 그것이 나에게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대번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대할 때에는 무의미하게 대하지 말고 반드시 원리 원칙을 중심 삼고 대해야 합니다. 사위기대 형태의 내용을 중심 삼아 가지고 내 체휼적인 감정을 어떻게 계발하느냐 하는 문제가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 이렇게 허술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그 대가를 추구하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심정적인 체휼의 도를 넓히기 위한 조건물로서 찾기 위해 노력하고 생활적인 감정을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면 생활권내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것을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하면 대할수록 내가 대하는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같이했다는 것을 실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은 지치려야 지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손해를 보고 그 손해가 현재의 입장보다 막중하게 될 때는 거기에서 타격을 받아 가지고 떨어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체휼신앙의 개발을 위해서는 여러분이 언제나 물건을 소홀히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각하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신앙길 전체가 걸려 넘어갈 수 있는 조건도 거기에서 성립된다는 거예요. 일을 할 때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040-285 여러분이 방안에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도 벌써 느낌이 다 들어옵니다. 이 웃음이 어떤 웃음이냐? 하나님 앞에 플러스되는 웃음이냐 마이너스되는 웃음이냐 느낌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습관화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 삼고 되어지는 주위의 모든 요건들은 무의미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개발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혼자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태도를 중심 삼고 살게 되면 처음 보는 사람이든 안면이 있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아무렇게나 대하면 되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 삼아 체휼적인 환경을 개발하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길을 가더라도 지치지 않습니다. 만일에 죽음길을 간다 하더라도 이 죽음이 뜻 앞에 합당한 죽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벌써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이 나를 탕감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마이너스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길을 가더라도 그것이 모든 체휼적인 감정에 접해서 가는 길이라면 왠지 든든하고 희망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이 같이 하는 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느낌을 가지고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권내에서 타락이 벌어지고 생활권내에서 실패가 벌어지고 생활권내에서 하나님 앞에 배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을 잘 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활동하면서 사사건건을 대하는 상대적 요건을 중심 삼고 내가 발전도 할 수 있고 후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이기 때문에 이 관계를 어떻게 잘 조정해서 하늘화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느냐 하는 것을 수시로 연구해야 됩니다.

 

물건을 대해서도 그렇지만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척 볼 때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사람의 성질에 따라서 전부 다릅니다. 내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저 사람이 나보다 심정 기준이 낮다 할 때는 내 기준을 낮게 조정해서 상대를 대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타격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느낌으로써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금방 알아야 합니다. 첫인상에서 무슨 감이 오느냐···. 자기가 중심이 되지 말고 느낌을 중심 삼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나가야 됩니다. 주체 앞에 나는 대상의 입장이기 때문에 좋은 결과의 기준을 중심 삼아서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이 주체의 소원이요, 상대인 우리 인간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개체가 타진한 결과를 중심 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척 보면서 첫 번 느낌과 더불어 그 마음에 비춰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 감이 "아하" 하고 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아하,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좋은데 어떻게 좋으냐? 그것은 여러분이 점점 그러한 도수를 높여 가게 되면 한 번만 척 보아도 마음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는 것이 척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약혼을 해 줄 때는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의 윤곽을 똑똑히 안 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죽 돌아가며 봅니다. 어떤 느낌이 오는지 마음의 잼대로 쭉 비교해 조는 것입니다. 이 둘이 어떠냐? 맞느냐 안 맞느냐? 어떤 때는 쓱 보면 두 사람이 하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하나되는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천생배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둘이 등을 집니다.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서로서로가 좋아하려고 관심을 갖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시일이 지나면 참 좋은 상대가 됩니다. 그런 느낌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러한 느낌이 몇 % 적중하느냐? 그건 여러분이 생활과정을 분석해서 결과를 打診해야 합니다. 

 

040-288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전부 하늘에 끌려 다니다가 하늘이 떠나 버리면 지쳐 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체휼신앙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생활권내에서 승리적 결과 즉 생활권내에서 의 目的中心삼아 가지고 그런 결과를 打診(미리 떠봄)시킬 수 있는 가치적 내용이 내가 대하기 전보다 대하고 난 후에 더 좋은 결과로 찾아진다 할 때는 아무리 핍박이 와도 그냥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행한 결과가 마이너스될 때는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후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後退할 수 있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被害가 어떻겠습니까? 한번 후퇴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바로잡기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한번 실수하게 되면 그것을 補充하기가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떨어질 수 있는, 즉 마이너스될 수 있는 것은 생각조차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물건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은 대하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 말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辨明하려고 하는 말은 못 하게 합니다

 

* 여러분은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을 못하더라도 생활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분석하는 도수를 높여 나가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040-290 그리고 여러분이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때는 絶對 마이너스되어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아침에 나갈 때보다 기쁜 입장 즉 플러스된 입장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집안에 不和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마이너스되어 들어온다면 자기 아내든지 아들딸에게도 마이너스 느낌을 주게 됩니다. 그것은 입니다.

 

선을 추구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입장에 서는 것은 선을 깎아내리는 입장이 되므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지 못하고 서러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집을 나갔다 돌아올 때는 아무리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어려움을 蕩減시켜 놓고 기쁨의 條件을 들고 들어와야 합니다.

 

만일 직장에서 분하고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집에 와서 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풀든가 아니면 다른 일로 대체해서 그 이상의 기쁨의 조건으로 탕감시켰다는 놀음을 해 놓고 집이 들어와야 합니다.

 

* 그러기에 이런 것을 보강할 수 있는 간접적인 자기의 비범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일부러 전신주에 이마를 부딪쳐서 그 아픈 것으로라도 탕감의 조건을 걸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탕감받는다는 회개의 기도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줄 눈깔사탕이라도 사 가지고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그 기쁨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혹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옛날에 자기가 좋아하던 봄노래라든가 가을 노래를 불러서 오늘의 슬픈 가정을 넘어 옛날이 기쁘던 감정을 살려서 그걸 중심 삼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를 대하나 아들딸을 대하나 그런 기쁜 表情기쁜 마음으로 주고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상이 결정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직장에서 타격받았던 슬픔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망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루 전체를 중심 삼고 이러한 생활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作戰입니다. 하루를 무심코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을 대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대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이면 산을 보게 될 때도 그 산을 중심 삼고 하나님의 창조성에 대한 느낌, 아름답다든가 신비스럽다는 느낌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 한 가치를 이렇게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훌륭한 상대적 물건을 지으셨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돌려 드리게 될 때 거기에서 충격적인 자극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완전히 주고받으면 하나되기 때문에 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떠나고 싶지가 않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뒹굴고 싶은, 애기와 같은 마음이 되고 또 부모와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을 아무것도 아닌 자연을 보는 가운데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흘러가는 물을 중심 삼고도 얼마든지 思索에 잠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040-292 우리가 대하는 모든 만물은 교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세계의 직접적인 감응이 아니면 간접적인 감응을 일으킬 수 있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이 창조물은 하나님의 성상을 닮아 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간접적이나마 그 성상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에는 우리가 반드시 관계 맺을 수 있는 선의 요소, 내적인 성품이 있기 때문에 그 성품을 따라 움직여서 연결시키기 위한 생활을 넓혀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일도 지장이 없고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은 탕감법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중심적인 존재가 되려면 공적인 입장에서 탕감시켜 놓는 환경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심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밑천을 많이 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밑천을 내주는 것은 손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당한다, 피해를 입었다 할 때는 탕감법으로 소화시키라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사탄이 아무리 작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으로 화해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계에 있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분입니다. 어떠한 핍박,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들이 나 자체를 꺾어 버리고 망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승리의 자료로서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 물건을 대할 때보다 사람을 대할 때, 감정이 더 빠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말로 표현해야 되는데 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하지 못할 말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 친구를 잘 두면 그 친구가 높은 영계에 가게 될 때 나도 그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그와 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연이 맺어졌다면 그 친구가 간 영계를 나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가 나를 상대로 하기를 무엇보다도 좋아하게 되면 내 부족한 것을 보충시켜서 좋을 수 있는 주체 앞에 상대적 자리를 결정짓고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선생, 좋은 친구를 구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동네에 들어가게 되면 개가 짖는데 그 짖는 소리를 무심코 들으면 음색이 다 같아요. 그 멍멍하는 소리는 마찬가지지만 영적인 분위기를 중심 삼아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있다는 입장에서 들어보면 그것이 천태만상으로 다르게 들립니다. 동네에서 짖는 그 개가 부잣집 개인지 가난뱅이 집 개인지 느낌이 온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집의 개 짖는 소리는 그른 기분이 납니다. 그렇지만 부잣집 개가 짖는 소리는 선하게 들려서 그 짖는 소리에 취하게 됩니다. 기분이 좋다는 거예요.

 

* 또 아기들이 울어도 그 아기가 흥하는 집의 아기냐 아니냐 하는 것을 그러한 습관적인 입장에서 들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척 들어보면 "아하, 저 아기는 어째서 우는구나!" 그게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온 느낌이 맞는지 확인해 보면서 체험을 하면 점점 적중률이 높아집니다. 그렇게 감도를 키워 나가야 됩니다.   

 

040-294 전차를 다고 사람들을 둘러보면 기븐 나쁜 사람과 기분 좋은 사람을 대번에 압니다.

 

* 여러분, 그렇잖아요?  동물도 자기가 죽고 사는 것을 아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기 일생을 모르고 살겠어요?  전부 다 私利私慾이 얽매여 하나님을 등지고 사니까 그렇게 되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되면 알게 됩니다. 말을 하더라도 하늘과 더불어···.

 

* 여러분이 어디에 가서 말을 하다가 질문에 딱 부딪히게 되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들어옵니다. 빠르다는 거예요.


* 그렇기 때문에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를 分別하지 못하고는 하늘길을 가지 못합니다. 선생님이 틀림없다 하는 일은 틀림없습니다. 이런 무엇이 있어야 남이 모르는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서 키워 나가느냐? 생활에서 키워 나가야 합니다. 체휼적인 신앙이 중요하기 때문에 體恤信仰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하고 관계되었던 사람을 절대 그냥 돌려보내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대하기 전보다 플러스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攻擊하더라도 플러스됐다는 條件을 남겨라 이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언제나 장사해서 밑지지 않고 남긴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내가 대상이 되게 되면 악한 사람에게 절대 지배를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의 배후에는 그를 후원하는 선조들의 선한 공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생활 가운데에서 배후를 중심 삼고 되어지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040-296 그렇기 때문에 하루의 생활을 그렇게 하고 대하는 일을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전부 다 하늘이 실제 생활을 중심 삼아 천국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材料로서 하나의 敎材로서 나에게 접근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그것을 좋은 결과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自我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데 노력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감, 그 첫 번 느낌을 아버지 앞에 언제나 議論하고 共鳴體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하늘을 대할 수 있는 그런 기준만 되면 반드시 영파가 온다는 것입니다.


* 기도를 통해서, 신령의 역사를 통해서 은혜의 기준에 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영계에서 영인들이 협조해 주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 인간은 생명체라든가 생령체를 갖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체에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계의 협조받지 않은 영력을 중심 삼아 가지고 영의 작용을 開發/啓發만 해 놓으면 영인들이 지도해 주지 않아도 나 자체의 생령체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어느 기준만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이 서러워하실 때 나에게도 형용할 수 없는 서러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040-297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을 항상 鑑別하면서 사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되려야 될 수 없고 하늘의 法道에 어긋나려야 어긋날 수 없습니다. 그런 남자는 아무리 미인이 유혹하더라도 안 넘어갑니다. 거기에 동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사람은 對人關係에 있어서 남을 利用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무엇이든지 자기의 이익을 중심 삼고 判斷하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讓步하는 사람입니다

 

양보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자꾸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가 하자는 대로 자꾸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꾸 따라가면 들게 되면 들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그 자리를 점령하게 됩니다. 결국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점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온유 겸손하고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순종 복종 굴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 세계에 있어서는 자기를 부정하고 대신 상대방의 요구에 완전히 순응해 들어가는 작전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한 하나의 작전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생활에서 감지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요즘은 그러지 않지만 옛날에는 그런 일을 많이 했어요. 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어떤 느낌이 오느냐 알아보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틀림없이 이렇다" 고 생각이 될 때 그것이 진짜 맞는지 안 맞는지 따라가면서 타진을 해 보는 것입니다.
"당신 이랬지요?" 하고 물어봅니다. 그것은 영계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벌써 아는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인연을 따라 가지고 감별하는 鑑別師의 생활이 신앙자의 생활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이제는 내가 책임지고 키워줄 수 있는 때가 지나갔습니다. 가을 절기가 되었는데 이제야 영양분을 날라다 주는 그런 놀음은 안 합니다. 그런 놀음을 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나 봄이면 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봄은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누어 줘도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을은 잎이 마르고 줄기가 말라 들어가는 때이므로 나누어 주면 둘 다 미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선생님이 안수 기도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기도할 필요도 없이 말만 하면 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놀음을 안 합니다. 왜냐? 그것은 자체가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다른 일을 해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040-299 祈禱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기도를 했으면 實踐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공약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公約이니 이것은 盟誓맹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했으면 반드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매일같이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한번 하는 것입니다그러고는 10년이고 20년이고 기도하는 자세로 만나기를 그리워하고 찾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가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아버지 앞에 선서하고 맹세했기 때문에 10년 아니 일생 동안 그 일이 오기를 환영할 수 있는 자세로서 그 일을 어디서 만날까 찾는 사람은 기도한 것을 이루는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만 10년 하는 사람보다 한번 찾아가는 사람이 지혜롭기 때문에 10년 돼서 찾았다 할 때는 그 사람은 이미 기도의 목적을 이룬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實踐이 문제입니다. 


그 실천이 어디 있느냐 하면 하늘나라의 하나님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권내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권내에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생활권내에서 천국이 이루어지고 지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중심 삼고 거동하는 여기에 플러스 세계와 마이너스 세계가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하나 무엇을 하나 이 삼각관계를 중심 삼아 가지고 사위기대 목적을 달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창조목적이 무엇입니까? 사위기대 완성이지요? 사위기대는 어디나 통하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도 마음과 몸이 중심과 하나되어 일체를 이루어 가지고 붙들지 못하면 이것은 악입니다. 마음과 몸이 진정하게 붙들면 그것이 사위기대입니다.


* 이제부터는 사람에 대해서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마이너스될 수 있는 사람인가, 플러스될 수 있는 사람인가···. 척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첫인상만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은 빠릅니다.

 

선생님이 수택리에서 260쌍, 500명이 넘는 일본 사람들을 10시간 이내에 전부 다 상대를 맺어 주었습니다. 그럴 때는 안테나를 최고로 높이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이렇게 해서 "틀림없다" 할 때는 천생배필이 묶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신앙이라는 것은 영계에서 협조해서 하는 것보다 생활권내에서 鑑定해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 기도만 하고 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찾아오셨다가도 손해 보기 때문에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적 신앙의 기반을 생활권내에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