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5.3.24 이화여자대학 교수 등 5명 면직. (양윤영, 한충,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
* 1955.5.11 이화여자 대학생 14명 퇴학
* 1955.7.4 병역법 위반 및 불법감금 이유로 서울 중부 경찰서 구속
* 1955.10.4 서울 지방법원 무죄 선고
* 1955.10.7 용산구 청파동 1가 71번지로 교회 이전
* 1956 충남 계룡산 갑사 휴양 기도 중, 일본이 아시아에서 다시 문제가 될 때가 온다는 것을 예감하시고 한국 정부가 무고誣告ぶこく (사실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꾸미어 해당 기관에 고소하거나 고발하는 일.)하게 참아버님을 투옥하셨던 희생을 조건 삼아 밀항 선교를 계획하심.
* 1958.7.17 일본 선교
▶ 崔奉春 (일본명 西川 勝, 호적상 이름은 崔翔翊 최상익)
* 27, 8세 때 先親(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이 새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쓰지 않고 있다가 원리를 듣고 나 후 개명했다고 한다)
* 1925.4.7 (음) 부산 동래군 사하면 구신평동. 부 최봉윤 씨와 모 홍남이 씨 사이 3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남.
* 2살 때 양친을 따라 大阪 나니와에서 살았다. 해방 직전에 귀국했다.
▶ 간증 중에서.
* 부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행사니 뭐니 돈을 마구 쓰고 친척과도 인연을 끊고 살았기에 부친을 원망하며 살았다. 종교라면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다.
* 기독교 부흥회에 한 부인의 권유, 산상 기도회.
뒷자리에 숨어서 지냈고, 시간이 나면 산에 가서 놀았다.
일주일 기도회가 끝나는 날, 여자 부흥사가 "여기에 악한 사람이 있는가? 은혜가 내릴 때가 되었는데 내리지를 않는다." 하면서 모인 사람들을 향해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거짓된 맘으로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야! 야단났다", 뭐라 기도할 줄을 몰라 "하나님, 안녕하십니까?"'라고 기도를 했다.
* 그다음날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당신이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세상을 구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못 살고 이렇게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을 한 번 더 보내시어 이 세상을 구원해 보십시오."라고 하는 기도가 나왔다.
* 나는 영적인 체험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때가 28살이었다.
* 국방부 문관 통역장교로 근무
* 한국동란 당시 미군 2사단 통역관으로 복무 중 부상당해 제대.
* 1952년경 일본에 밀항. 도쿄 성결교 신학교에 입학-> 강제 송환
* 임마누엘 수도사 전도사.
* 1956.4.10. 미국 문화원에서 근무하던 송도빈 장로의 권유로 입교.
* 지방 순회에서 돌아오신 참아버님께서 33, 34세에 해당하는 자는 손들어 보라고 하셨다. 그때 손을 든 최 선교사를 보시고, '예수님의 재출발 연령이니 장차 세계 선교 사명을 해야 한다'고 하시며 '공부와 훈련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였다.
* 1957.6.30. 최용석 씨가 동행했다. 새벽 기상 즉시 갑사 뒤뜰 소나무 숲에서 참아버님을 독대하고 2시간 가까이 말씀을 나눴다. 이때 선교사에게 내린 두 가지 밀지는 1) 일본 선교 개척과 2) 당시 일본 밀항 후 고난의 길을 걷고 있던 희진 님 모자의 보위에 있었다.
* 아침 식사를 했는데 참아버님께서는 당시 식사 자리에는 늘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
* 여기에 일찍이 최 씨(崔先吉) 집안으로 인해 좌절된 섭리 역사를 재탕감하기 위해 다시금 최 씨 인물을 내세우신 배후의 참사랑의 뜻이 개재되어 있었다.
▣ 1985.12.20
성진 어머니가 최선길이다. 이름이 먼전 선택된 길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이 하늘의 역사로 지어진 이름이다. 여자 이름이 선길이가 어디 있어요? 그게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최 씨가 문제이다. 최성모. 최성모만 하나되었으면 통일교회는 핍박도 받지 않고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이화여대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연대 사건도 안 나는 것이다. 알겠는가? 최 씨가 문제다. 그다음 일본을 개척한 것도 최봉춘이다. 최 씨를 먼저 내세운 것이다.
▣ 1987.5.1
성진 어머니 최 씨가 큰 복을 받을 것인데 ···. 이름도 최선길이다. 이름이 남자 이름 같은데 영계에서 다 가르쳐 준 것이다. 먼저 吉했다는 것이다. 여자로서 먼저 길했다는 것이다. 그다음 최성모. 이득삼 씨의 남편이 최성모이다. 최 씨가 전부 받아들여야 할 텐데 최 씨가 선생님을 고발해서 감옥에 넣었다는 것이다.
* 1958년 6월 7월 밀약한 선장의 약속 파기 그리고 발각으로 두 번이나 실패.
: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 밤 12시경에 밀선이 와서 타게 되었는데 그 배의 안내자는 경관이었다.
* 1958년 6월 15일 밤 드디어 밀항선에 올랐다.
: 1958년 6월 17일 밤 오후 9시 北九州市 小倉港 - 상륙 허가 못 받음 →18일 山口県岩国 향해 출발→ 22日広島 -허가 안 남 →呉항해 해상보안부 경비정에 연행
* 1959년 2월 18일 130일간의 형기 만료
; 야마구치에서 시모노세키로 이동. 기차로 5시간.
; 다행히 그날 떠나는 배가 없었다. 5일간 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 수용소 억류 중 3월 15일 최후 수단으로 금식을 결행해 열병을 앓게 됨.
; 양쪽 심장과 폐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 3개월 요양 지시
; 그 무렵 친분을 맺은 上野 씨의 도움으로 4월 중순 탈출 성공.
; 厚狹驛에서 동경행 급행열차에 탔다.
* 1959.10.2. 금요일 오후 7시 15분 新宿 4명이 모여 첫 예배.
(아버님께서 하숙하신 미츠하시 집에서 보도로 5분 거리)
▶ 일본 선교.
1. 일본의 공산화 防止.
▣ 1971.1.9(토) 뜻이 가야 할 길. 강릉교회.
039-062 日本이 容共(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일) 권내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防止하지 못하면 大韓民國은 아무리 잘해 봤자 독 안에 든 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10년 전부터 대한민국을 위해 빚을 내 가지고 선교사를 밀선에 태워 일본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때가 자유당 때입니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이기에 그 일이 법에 위반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빚을 져 가면서 이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선에 있는 젊은 사람들을 몰아쳤던 것입니다. 충청도 갑사 뒤뜰에서 "너는 일본에 들어가거든 이런 사명을 하라."고 명령을 내려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보냈는데 3번씩이나 붙잡혀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못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뺨을 갈기면서 "이놈의 자식, 사나이가 한번 맹세했으면 실천해야지 죽더라도 일본에 가서 죽으라."고 소리를 질러 다시 쫓아 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개척한 것이 현재의 일본 통일교회가 된 것입니다.
2. 천운이 오는 길.
▣ 1971.9.5(일) 전본부교회. 제물의 완성.
048-098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한국 일본 중국이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이냐? 경제력 가지고 안 됩니다. 무력 가지고도 안 됩니다. 사상적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통일사상을 내세워야 합니다. 중국의 장개석도 이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국가가 모르는 가운데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본에 선교사를 보낼 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밀선을 태워서 보냈습니다. 그때는 이화여대 사건으로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 나온 때였습니다. "이 나라의 금후의 갈 길은 일본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天運이 그 길을 걸어오기 때문에 일본을 품어야 된다."고 하면서 보냈습니다.
일본을 품는 데는 아는 사람이 그 깃발을 꽂아야 되겠기 때문에 내가 법치국가의 한 국민으로서 위법인 줄 알면서도 보낸 것입니다. 현재는 이것이 법에 위배될지 모르지만 금후에 한국이 가야 할 길이 그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연코 보냈던 것입니다.
그때 내가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이 교회를 200만 원 빚을 내 가지고 사서 젊은 사람들을 보내 대청소를 하며 사흘 만에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1958년 8월에 최봉춘이를 충청남도 갑사 뒷산으로 불러 가지고 일본 선교의 특명을 내렸습니다. "너는 현해탄을 건너야 된다. 죽기 전에 돌아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준엄한 것이다." 이렇게 다짐시켜 가지고 밀선을 태워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1차에서 걸리고 2차에서도 걸리고 3차 만에 간 것입니다. 3차에 갔어도 오무라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0년 공부 나미 아미타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더라도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꾀병을 부린 것입니다. 사흘 동인 소금을 먹어 몸에 열이 나니까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휴식시간에 탈출을 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을 해서 길을 닦아놓은 것이 현재의 일본 통일교회입니다.
▣ 1972.11.13(월) 하나님이 원하는 세계. 대구 교육회관.
- 제4차 세계 순회 환송 집회.
065-055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 가지고 별의별 놀음을 당하고 무죄석방이 됐습니다. 그때에 우리 간부들이 모여 가지고 "선생님, 이제는 분해서 못 견디겠어요" 하는 거예요.
그 옛날에 유 협회장은 아주 뭐 성격이 무사태평이라구요. 그런 성격이 오죽했으면 "이놈들, 배때기를 째자" 독한 소리를 했겠어요? 내가 말만 하면 배때기를 째는 거라구요. 살인까지 벌어지는 거라구요.
그러나 "야,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것이 아니다. 치고 충돌해서 빼앗아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감동시켜 가지고 자연 굴복시켜 나오는 법도가 아니냐." 이래 가지고 지금까지 27년 동안 밟고 허물고 하는 데 내가 27년을 쫓겨 다녔습니다.
065- 058 내가 형무소에 들어갔다가 나오자마자 갑사에 있으면서 연구를 한 것이, "금후에 있어서 일본이 문제다. 지금은 망했지만 금후에 있어 또 일본이 문제 될 때가 온다. 그러니 우리가 일본을 원수시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었어요.
* 대한민국을 법치국가로 보면 나는 그때 법적 위반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10년 20년이 되거든 이 단체의 힘을 한국이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올 것이다" 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 그렇게 돼 있다구요.
3. 한, 중, 일이 통일사상적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 1969.5.18(일) 행복과 사랑. 수원교회.
- 제2차 세계 순회 귀국 후 전국 지구본부 순회.
023-135 서울시 경찰서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해방되자마자 모가지를 잘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망하여 눈물을 흘리고 가는 그들이기에 그냥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세가 불리한 것을 안 그들은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문서를 전부 다 불살라 버리고 갔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것을 아는 선생님은 언제 한번 일본 천황의 궁성을 폭발시켜 버리겠다고도 생각했던 사나이입니다. 일본인들에게 우리 민족이 얼마나 학살당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나이입니다.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립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일본을 無視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시아에서 三國 路線을 펴기 위해서는 일본이 망했지만 일본은 필요한 나라입니다.
민족성으로 보더라도 틀림없이 獨逸 民族 以上의 團結된 힘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復讐를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復讐로 시작하면 또 復讐로 끝나고 그래서 결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통일이념을 중심 삼고 먼저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새로운 규합 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자유당 때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이승만 박사나 박마리아를 중심한 자유당, 이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국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한국이 지금 이렇게 안 되었을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도 다 녹아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의 정상을 달리고 있는 선진국가도 어깨를 겨눌 수 있었을 것입니다.
023-137 일본은 원수의 나라지만 그런 일본이 앞으로 한국을 위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10여 년 전, 자유당 때 감옥에 들어가고 쫓기는 몸으로도 빚을 얻은 돈을 가지고 그때 돈이 어디 있었겠어요? 밀선을 태워서 일본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십 년만 두고 봐라. 이것이 법치국가의 국민으로서 위법행위인 줄은 알지만 틀림없이 아시아에는 자유롭게 이렇게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내가 지금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더라도 이 일을 하겠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한 내 신념과 행동을 역사가 보증할 날이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단연코 행하였습니다.
그때 식구들은 굶다시피 하는 때였어요. 사진을 팔아서 겨우 그날그날 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돈으로 150만 원 정도의 빚을 얻어서 밀선을 태워 보냈습니다.
그전에 충청도에 있는 갑사라는 절에서 선생님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잠을 안 자고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너를 위해 정성 들이고 할 것이다."며 "죽더라도 임무를 다 할 때까지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수를 통해 일본으로 가자 붙잡혀 大村오무라 수형소(나가사키)에 갇히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1주일 이내에 도로 송환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한테 표를 받아 들고 생명을 걸고 갔던 사나이가 목이 잘려 죽으면 죽었지 돌아올 수 있어요? 송환되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가던 중, 열차에서 뛰어내리려니 기차의 속도가 빠르고 굴이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모노세키에 도착되어 다시 수용소에 갇혀서 송환되기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 꾀를 내어 금식을 했답니다. 1주일, 열흘 계속 금식 아닌 금식에 소금만을 먹고 나니 열병 같은 것을 앓게 되어 까무러쳤다는군요. 그렇게 꾀병作り病つくりやまい 을 얻어 병원에서 치료한다고 입원해 있다가, 도망을 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전도를 해서 지금의 7, 8만 명의 통일교회 용사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일본 정부는 통일교회가 아니면 안 될 경지에까지 온 것입니다.
▣ 1974.4.29(월) 우리 통일교회와 나. 전본부교회.
071-146 선생님이 일본에 선교사를 보낼 때, 불원한 장래에 일본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될 대한민국의 운명임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부터 15년 전에 그때 돈으로 한 350만 원을, 지금 돈으로는 몇 천만 원 될 거예요, 감옥에 들어갔다 나와 가지고 빚을 얻어서 ···.
갑사 솔밭에서 이렇게 훈시를 했어요. "네가 이러한 책임을 해야 한다. 법치국가인 대한민국 앞에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위법이지만 국가와 민족이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아는 사람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네가 감옥살이를 하더라도 이 민족의 길을 열어 줘야 되니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해 가지고 밀선을 태워서 보낸 거예요.
그런데 가다가 걸렸어요. 1차 실패, 2차 실패, 3차 만에 들어가 가지고 오무라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을 때에는 "하나님도 무심하지. 이렇게 미래의 당신의 뜻의 길을 개척하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될 하나님이냐."고 얼마든지 원망할 수 있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불러다가 "또 가자!" 한 거예요. 이러한 놀음을 한 거예요.
4. 누구보다도 일본을 사랑하라.
- 복을 나누어 주어야 복을 지탱할 수 있다.
▣ 1968.1.28
내가 충남 계룡산 갑사에 갔을 때, 최봉춘 씨가 일본 가기 전날 찾아와 결의하던 것이 엊그제 같다. 그때 내가 부탁한 말은, "누구보다도 일본 사람을 사랑해라. 눈물을 흘리면서도 몰리면서도 사랑해라. 쫓기면서도 사랑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증거할 수 있는 그 사실을 남겨라." 하는 것이었다.
▣ 1967.6.4(일) 탕감이 가는 길. 전본부교회.
018-173 탕감이 가는 길, 거기에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믿고 찾아왔기 때문에 여러분은 믿고 찾아온 그 뜻을 세계에 연결시켜 줄 수 있는 하나의 연결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느 민족보다도 한국 사람이 세계에 많이 가서 하늘의 깃발을 꽂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한국에 내려진 복을 그대로 지탱할 수 있고 다른 민족에게까지 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가는 데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 조건을 갖고 가야 됩니다. 최봉춘 씨도 일본에 가서 일본 사람을 한국 사람보다 더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축복받은 사람이 외국으로 선교를 나가게 될 때, 거기에서 자기의 부인이나 자기의 자식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렸다가는 참소 조건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내 자식보다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부인이나 자식이 그리워 자꾸 편지하게 되면 집에 있는 그 부인과 자식에게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 1975.1.16(목) 위하여 사는 세계. 서울 조선호텔.
- 희망의 날 만찬회.
075-328 예를 들어 말하면, 일본을 개척하게 될 때는 지금부터 17년 전인 자유당 때였습니다. 한참 이화여대 사건으로 인하여 문 아무개라는 사람의 처지는 땅에 떨어져서 형편없던 때였지만, 나는 앞으로 일본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갈 것을 알았고, 아시아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갈 것을 내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치국가의 한 국민으로서는 당시에는 위법이 될는지 모르지만, 10년 내지 5년 후에는 반드시 대한민국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을 알았기에, 내가 범죄인의 낙인이 찍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을 단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바로 1956년 여러분이 알다시피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충남 갑사에 휴양가 있을 때, 여기에 와 있는 최봉춘이라는 젊은 청년을 불러서, '너는 일본을 위해서 밀항하는 것이다. 사나이가 정한 걸음은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된다.'고 훈계를 해던 것입니다.
첫 번에는 일본에 입국하자마자 체포됐습니다. 1차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 보냈습니다. 2차도 또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감옥에서 나와보니 그 당시의 통일교회 형편은. 교회는 다 없어졌고 한 칸의 집마저 전부 다 없어진 입장이었지만 나는 나라를 위하고 아시아를 위하여 빚을 얻어 가지고 3차의 출발을 시켰습니다. 그러던 일이 어제와 같습니다. 1958년의 일입니다. 일본의 통일교회는 그러한 형편에서 출발했습니다. 3차로 가서도 체포되어 오무라 수용소에 구금되었습니다.
자, 그렇게 되었으니 그 장본인인 미스터 최도 큰일났거든요. 선생님과 철석같이 약속은 했는데, 이건 기반을 닦을 수 있는 신세가 아니라 영어의 몸이 되어 버렸으니 누구한테 하소연하느냐 이거예요.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간장을 퍼 먹고 열이 나게 해서 꾀병을 부린 것입니다. 그래서 입원 수속을 하고 3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거기에서 탈출해 가지고 동경으로 가서 시작한 것이 지금의 일본 통일교회입니다.
▣1989.2.16(목) 통일을 위해 전진하자. 제주 국제연수원.
- 한국 교구장.
188-020 최봉춘이가 오무라 수용소에 들어갈 때 그 영감한테 고마운 것은 일본 조야가 전부 다 반대하는데 그때 ···. 이 영감이 전범자로서 몇 년 동안 고생하고 나오고 그랬는데 자기가 일본을 위해서 싸운 것은, 미국 놈들 때려죽이면서 싸운 것은 자기는 아시아인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한다고, 그때 자기들 이념이 그랬다고 ···.
* 그 사사카와 영감이 최봉춘이를 만나 가지고 말이에요, 밀선을 타고 전도 왔다는 사실, 밀항해서 일본을 구해주러 왔다는 사실을 듣고 ···. 그거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그렇잖아요, 그 본의가? 그 본의가 진정 하늘의 뜻을 중심 삼고 일본을 구해주러 왔다면 일본 국민이 환영하고 보호해야 할 텐데 이거 왜 오무라 수용소에 넣느냐 이거지요.
자기가 옛날에 당한 그 서러움을 생각할 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일본이 앞으로 아시아에 있어서 크게 고립될 수 있는 천벌을 받을 자리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면서 그 영감이 법무성으로부터 전부 ···.
뭐 법무장관한테 성화를 대고 이래 가지고 빼준 거예요. 자기가 신원보증을 하고 말이에요. 그 영감 그게 고마워서 지금도 그런다구요. 내가. 이시이라든가 구보끼 보면 찾아가서 인사하라고 그러고 있지요.
그 영감 우리 국제승공연합 회장 했다가 사회의 규탄을 받고 여론이 비등하니까 내가 시켰는데 나한테 얘기도 하지 않고 물러가 버리지 않았어요? 이놈의 영감! 세상 같으면 벌써 원수같이 취급할 텐데 ···.
이 영감이 일본의 우익에서는 괴수거든. 영향력이 크다구요. 그리고 어느 선박 회사를 중심 삼아 가지고 보트 레이스를 하는데 그 수익이 대단하다구요. 일본 경마장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요. 일본 돈으로 한 해에 수천억 엔을 벌 거예요. 그 사람이 일 년에 쓸 수 있는 예산량이 200억 엔이 넘는다구요.
* 그런데 그 영감이 섭섭했던 것이 뭐냐 하면 우리 수택리 수련소 지을 때 천만 엔인가? 천만 엔을 보냈다구요.
* 그런데 천만 엔을 냈는데 냈으면 보통 같으면 뭐 표창도 하고 그럴 텐데 낙성식 할 때 소식도 안 전했거든. 그러니까 하는 말이 그거예요. 하, 통일교회는 돈이 짜다고. 섭섭하기보다는 무섭다는 거지요.
레버런 문 자체도 그렇게 홀홀하지 않고 짜고 무섭다는 거지요. 돈 수십억 이러지 않고는 홀홀하지 않다는 거지요. 남자가 뭘하려면 배포도 그렇게 부리고 그래야 된다구요.
* 고마운 것이, 내가 댄버리 형무소에 들어가 있을 때, 참 정성으로 편지를 써 보냈다는 거예요.
* 그때 사사카와 영감의 요헤이 陽平 (일본재단 회장)라고 하는 그 둘째 아들이 와서 우리 합동결혼식 보고 자기도 합동결혼식하게 해 달라고 ···. 그때 잡아서 훈련시켰다면 딱 식구 만들었을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뭘 책임진 사람들은 인연 된 사람들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거예요.
※ 笹川 良一
- 1899(明治32년) 5.4 ~ 1995.7.18 大阪 箕面市 出生
- 중의원, 재단법인 일본선박진흥회 (현, 공익재단법인 일본재단) 회장, 福岡 공업대학 이사장.
- 430 가정 합동결혼식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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