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아사카와 타쿠미(淺川 巧)

true2020 2011. 8. 9. 23:43

◑ 에미야 타카유키(江宮隆之)씨의 소설 '백자의 사람'(1994년 카와데분코=河出文庫文).

 

▶ 아사카와 타쿠미

 

1914년 조선총독부 상공부 산림과 임업 시험소 고용원으로 한국에 건너간다.

한국어를 배우며 백자뿐만 아니라 장롱, 밥상 등의 목공품, 동화, 동요, 요리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민속문화를 연구했다.

'조선도자명고', '조선의 밥상' 등은 명저로 평가가 높다.

칸토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보도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조선인을 변호하기 위해 도쿄에 가야겠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1931년 40세로 타계했을 때는 많은 한국인이 관을 메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한국을 가장 사랑한 일본인..

 

한국말을 사용하고 바지저고리를 입고 한국의 땅에 자신을 묻어 달라 유언을 했던 사람.

1891년 1월, 야마나시현 기타코마 가부토(山梨県北巨摩郡甲村-현재의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타코네)에서 태어난 아사카와 타쿠미는 그 전, 소학교 선생님으로 조선에 건너온 그의 형 노리타카를 따라 1914년에 전쟁으로 황폐된 조선의 숲을 복원하기 위해서 조림과 산림 관리를 위한 산림 기사로 조선의 땅을 밟았습니다.

 

그 당시 타쿠미의 임무는 양묘(養苗)였기 때문에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의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조선 사람들을 만나고 조선의 생활에 대하여 친근하고 정겹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그의 형 노리타카를 통해 조선의 민예(民芸)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타쿠미는 그런 삶 속에서 조선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고 보다 자연스럽게 그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어느 집에서도 볼수 있는 백자 속에서 소박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조선의 정신을 보았고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색상과 모양의 고려청자(高麗青磁)를 최고로 인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조차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지 못하였던 순백의 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타쿠미는 조선 전 지역(당시 10개 도, 46면)에 있던 도자기 가마터를 답사한 뒤 1931년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 지금도 한국에서 출판되고 있는 명저인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銘考)를 저술하게 됩니다.

 

그 책에는 기물(器物)의 종류와 명칭, 도자기를 만드는 원료와 도구 그리고 가마터의 조사 등에 대한 결과를 상세하게 저술한 책으로, 그 방면에서 교과서와 같은 정말 중요한 문헌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당시 조선 사람들도 알지 못했던 조선 도자기의 정확한 이름과 용도를 상세하게 저술하였고 특히 명칭에 대해서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이름을 한국어로 표시하였습니다.

 

그 책 이외에도 타쿠미는 조선의 백자뿐아니라 서민의 공예품 전반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조선의 소반」 , 「조선의 책상과 장롱」, 「조선의 다완」등을 저술, 조선의 민예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습니다.


타쿠미는 본래의 임무인 조선 녹화에 종사하면서 일본 민예의 거장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함께 조선민족민술관을 설립했고 민예를 연구하면서 전쟁을 초월한 인간애 속에서 조선의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다가 40세의 나이로 조선의 한줌의 흙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도자기 미술에 매료된 타쿠미는 1914년 형이 있는 조선으로 건너가 한해 전에 발족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의 임업시험장에 취직한다. 그 임업시험장은 현재 서울의 서대문구 아현동에 있다.

타쿠미는 조선의 식수 조림에 면밀하고 독창적인 연구를 거듭했으며 민둥산에 식수를 하는 방법, 묘목 양성 등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와 친한 사이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둥산에 식수 조림하는 방법을 타쿠미의 철학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삼림을 자연에 귀(歸)하는 것, 이밖의 길은 없다. 이런 결론에 이른 타쿠미를 나는 오늘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 돈은 저금하지 않는다고 맹세했다”고 타쿠미는 말했다. 그는 박봉을 떼내어 조선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주었다. 또한 이런 일을 전혀 입밖에 내지 않고 처자들에게도 “조선 학생에게 장학금 준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1931년, 조선의 녹화를 위해 묘목 지식에 관한 강연을 이곳저곳에서 하면서 돌다가 3월 15일 급성폐렴에 걸려 4월 2일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다. 당시 그의 죽음을 비통히 여긴 조선의 군중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와서 그의 유체 옆에서 구슬피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4월 4일 고별식을 조선식으로 진행했다.

“나는 죽어서 조선의 흙이 되고 싶다. 조선 전통식으로 매장해 다오.” 타쿠미의 유언이었다. 결백한 조선옷을 입은 그의 유체를 관에 눕혔으며 많은 조선인이 자진하여 관을 멨다고 한다.

“아사가와가 타계했다. 되돌릴 수 없는 손실이다. 이토록 조선을 이해하고 있는 인물을 나는 모른다. 정말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인을 사랑했다. 나는 그만큼 도덕적으로 성실한 인물을 보지 못했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따사로운 시선의 소유자이다. 또한 그것을 넘어서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의 성실한 혼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추도문에서 밝힌 말이다.

 

1984년에 세우고 1986년에 새로 만든 서울 교외 망우리 동의 아사가와 기념비석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겨져 있다.

 

 

서울시 中浪区 忘憂里にある共同墓地「思索の道」は、詩集『あなたの沈黙』の詩人・韓竜雲(1879‐1944)、絵画『雄牛』の画家・李仲燮(1916‐1956)など著名人の墓があることで有名だ。

 

だが、その中でも特に目を引く墓がある。「韓国の山と民芸を愛し、韓国人の心の中に生きた日本人、ここ韓国の土となる」。この墓碑銘の主は浅川巧(1891‐1931)だ。

 

墓を管理している韓国林業研究院の責任者は「唯一、韓国人の手で保存されている日本人の墓」と話す。


浅川巧をたたえる学術大会が9月5日、서울・プレスセンターで開催される。テーマは「時代の国境を超えた愛:浅川巧の林業と韓国民俗工芸に関する研究」。서울国際親善協会主催、日本国際交流基金・森林文化財団協賛、文化体育観光部(省に相当)後援で、李御寧 元文化部長官が祝辞を述べる。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時代に韓半島(朝鮮半島)の木材を奪う手助けをしていた朝鮮総督府農商工務部山林課の職員が、なぜこのように手厚く扱われているのだろうか。


 1914年に23歳で朝鮮へ赴任したとき、浅川巧は「朝鮮の人々に申し訳ない気がして、何度も故郷に帰ろうと思った」という。「私が朝鮮にいることが、いつかは何かの役に立つようにしてください」。神に祈り気持ちを落ち着け「朝鮮に住む朝鮮人と同じものを飲み、食べ、同じ服を着て、同じ言葉を使わなければ」と決心した。朝鮮人の町で온돌(床暖房)部屋に住み、韓服(韓国の民族衣装)を着て朝鮮人と同じように髪を結い外出した。

 

浅川巧の評伝『浅川巧 日記と書簡―朝鮮の土になる』(ヒョヒョン出版)の著者・高崎宗司氏は「日本人警察官たちはバスの中で韓服を着て座っている者を発見すると『ヨボ(韓国語の呼び掛けの言葉『ヨボ=もしもし』を見下した言い方)』とからかい、座席から立たせた。それでも浅川巧は韓服を着続けた」と書いている。


 浅川巧は朝鮮のはげ山を緑で覆うことを使命だと思っていた。全国を巡り木の種類を選び、植樹を続けた。また、自然な状態の土の力を生かす「露天埋蔵発芽促進法」で朝鮮五葉松の種子を芽吹かせる方法を開発した。

 

조재명元林業研究院長は生前「朝鮮五葉松は当時、2年間かけて苗木を育てていたが、浅川先生が考案した方法のおかげで1年に短縮できた。今、韓国の人工林の37%は、浅川先生が手掛けたもの」と話す。

 

浅川巧はとりわけ朝鮮の工芸を愛した。実兄は「朝鮮古陶磁の神様」と称された浅川伯教(1884‐1964)だ。各地の窯跡で陶磁器や破片を集め兄に渡す一方で、自らも朝鮮の膳文化を研究した。「朝鮮の文化は中国の亜流」という日本人の主張に反論し、朝鮮の食卓を取り上げ、朝鮮文化の独自性を訴えた。生前に出した本『朝鮮の膳』にはこう書いてある。「疲れに疲れている朝鮮よ、他人のまねををするよりも、今ある大切なことを失わなければ、近く自信に満ちた日が来るだろう。これは、工芸に限ったことではない」。

 

死後も朝鮮陶磁器の研究書『朝鮮陶磁名考』が出版された。鄭良謨 元国立中央博物館長は「韓国の工芸品や陶磁器の歴史を研究する人々にとって宝物のような本」と評している。


1931年4月2日に40歳の若さでこの世を去った浅川巧の葬儀は林業試験場の広場で行われた。葬式では土砂降りの雨にもかかわらず、大勢の朝鮮人たちがひつぎの載せられたこしを担ぐことを志願、交代で担いだという。遺言に基づき白い韓服を着て朝鮮人共同墓地に埋葬されたが、今は忘憂里共同墓地に移された。京畿道抱川市光陵の国立林業研究所(旧林業試験場)には、浅川巧が植えた朝鮮五葉松が今も立っている。

 

浅川巧の故郷・山梨県北杜市には2001年、浅川伯教・巧兄弟の記念碑が建てられた。浅川巧の人生を描いた映画『白磁の人』も韓日合作で制作が進んでいる。間もなく慶尚南道陜川郡や全羅北道扶安郡などで撮影が行われ、来年公開される予定だ。
 忘憂里共同墓地に墓参に訪れる人も増えている。80周忌に合わせ韓国で出版された『韓国を愛した日本人』(bookie社)には韓国人高校生たちの感想文が掲載されている。「隣国・朝鮮をこの上なく愛した浅川巧の国・日本は、私にとって知りたい国になった」(ソウル・清潭高校2年生)。ソウル国際親善協会のイ・スンジュ会長は「今回の学術会議が、両国国民が尊重し合う方向に進み、同じ地球に住む者として成長・発展するきっかけになれば」と話し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