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자서전

거역할 수 없는 명령 - "38선을 넘어가라! 북쪽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으라!"

true2020 2022. 12. 1. 16:29

▣ 거역할 수 없는 명령 - 자서전 106

 

* 광복 직후 우리나라 실정은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침 집안에 쌀이 떨어져 사놓은 쌀을 가지러 황해도 백천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38선을 넘어가라! 북쪽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으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즉시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첫아들이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애타게 나를 기다릴 아내가 걱정되었지만 집에 드를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엄중한 것이니 받는 즉시 순종해야만 합니다. 

 

*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수십 번 밑줄을 그으며 읽고 깨알 같은 글씨로 새까맣게 메모해 둔 너덜너덜해진 성경책 하나만 들고 나는 38선을 넘어갔습니다.

 

그때는 이미 공산당을 피해 남으로 넘어오는 피난민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를 반대하는 공산당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종교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곳으로 나는 하늘의 소명을 받고 간 것입니다. 목사라면 질색하는 공산당 세상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 피난민이 늘어나자 북쪽의 경계가 삼엄해져, 38선을 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0리 길을 걸어 38선을 넘고,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내가 왜 이 험난한 길을 가야 하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본래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기독교 뿌리가 깊은 곳입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에는 신사 참배는 물론이고,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경례를 강요받는 동방요배 등 별의별 탄압이 자행되던 곳입니다.

 

* 나는 평양 서문에서 가까운 경창리 나최섭씨 집에서 전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남한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교회 집사였습니다.

 

* 처음에는 동네 어린아이들을 모아 돌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오면 성경말씀을 곁들인 동화를 들려주며 함께 놀았습니다. 비록 어린이들이었지만 반드시 敬語를 쓰면서 정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전하는 새로운 말씀을 누군가 들으러 와 주길 기다렸습니다. 

 

*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자 篤實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세 살배기 어린애든 허리가 굽고 눈이 먼 노인이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며 하늘같이 섬겼습니다.

 

* "어이구, 나이 많은 노인네라 싫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귀하디 귀합니다. 귀한 것에 남녀노소 차별이 없습니다.

 

* 나는 한번 聖經 講解를 시작하면 교회 식구들이 볼 일이 있다며 먼저 일어서지 않는 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熱情을 다해 가르쳤는지 온 몸이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사람들 몰래 밖에 나가 옷을 벗어서 짜면 옷에서 물이 뚝뚝 흘렀습니다. 여름에만 그런 게 아니라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열을 내어 가르쳤습니다. 

 

* 예배를 드릴 때는 모두 깨끗한 흰옷을 입었습니다. 찬송가를 수십 번 되풀이해 부르며 열정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나 감동에 젖어 울부짖는지 우리 교회를 가리켜 "우는 교회"라고들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각자 받은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간증하는 동안 모두들 은혜에 취해 몸이 하늘로 떠오르는 體驗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입신하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 또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같이 영통한 이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때로 우리 교회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 와 있으면 영통한 사람이 눈을 감은 채 그에게로 가서 어깨를 탁 쳤습니다. 그러면 어깨를 맞은 사람이 갑자기 눈물 콧물을 흘리며 회개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럴 때면 뜨거운 성령의 불길이 "휘익" 하고 지나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 불의 역사가 일어나면은 오랫동안 속을 썩이고 있던 병들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특히 내가 남긴 밥을 먹고 위장병이 나았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주변에 퍼지자 "교회 밥은 약밥"이라며 내가 남긴 밥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 큰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자꾸만 빠져나오자 기성 교회의 목사들이 나를 猜忌시기해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가뜩이나 종교를 눈엣가시로 여겨 없애려고 하던 공산 당국은 "옳다구나" 하고 나를 잡아들였습니다.

 

1946년 8월 11일 나는 남한에서 올라온 스파이란 죄명을 뒤집어쓰고 평양 대동보안서로 끌려갔습니다. 이승만이 이북 정권에 욕심을 내고 북한에 밀파한 첩자라고 옳아맸습니다.

 

소련 조사관까지 나서서 나를 심판했지만 죄가 없는 걸 어쩌겠습니까. 결국 석 달만에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拷問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목숨이 危殆위태로운 상태였지만 교회 식구들이 거둬 주었습니다. 

 

* 기성교회에 다니던 신도들이 점점 더 많이 우리 교회로 몰려오자 나를 반대하는 기성교회 목사 80여 명이 경찰서에 투서를 넣었습니다.

 

1948년 2월 22일 나는 이승만의 스파이자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혐의로 또다시 공산당에게 잡혀 갔습니다. 쇠고랑을 차고 끌려간 지 사흘 만에 머리를 깎이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교회를 꾸리는 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던 것이며, 내 머리를 깎던 이 아무개의 모습까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죄를 자백하라며 무수히 때렸습니다. 그렇지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버텼습니다.

 

고통이 너무 커서 허리가 "퍽" 하고 꺾이면 "아버지, 나 좀 구해 주시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아버지, 걱정 마이소. 문선명이 아직 안 죽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이 죽지 않습니다" 하고 배짱을 내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 고통이 너무 심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면 영락없이(조금도 틀리지 아니하고 꼭 들어맞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숨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 구금된 지 만 40일 만인  4월 3일에 공판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나흘 연기되어 4월 7일에 공판이 열렸습니다. 공판정에는 이북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목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에게 별의별 욕을 다 해댔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라며 공산당도 나를 비웃었습니다. 공판을 보러 나온 식구들은 한쪽에서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 나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니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판결을 받고 공판정을 떠나면서 교회 식구들에게 수갑 찬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수갑에서 짤랑짤랑 종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바로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살이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 나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와도 마음을 터 놓게 됩니다. 

 

*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아, 당신은 이렇게 생겼으니 이럴 것이고 또 당신은 저렇게 생겼으니 저럴 것이오"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처음 본 내가 자기 속을 알아맞히니 내심으로는 싫어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요. 누구 하고도 마음 터 놓고 사랑의 마음을 나누니 감방에서도 친구가 생겨 살인수 하고도 친해졌습니다. 억울한 감옥살이였지만 내게는 나름대로 뜻이 있는 단련 기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 뜻 없는 시련은 없습니다. 

 

* 감옥에서는 이나 벼룩도 다 친구입니다. 감옥 안의 추위가 얼마나 혹독한지 죄수복의 시침질한 곳으로 줄을 지어 기어 다니는 이를 잡아 한 곳에 늘어놓으면 이들끼리 서로 달라붙어 동그렇게 됩니다.

 

그걸 말똥구리처럼 데굴데굴 굴리면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는 본래 파고드는 성질이 있어서 서로서로 머리를 들이대고 뭉쳐서는 궁둥이만 내밀고 있는데 이 광경을 보는 것도 그렇게 재미날 수 없습니다. 

 

* 세상에 이나 벼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감옥에 있다 보면 이나 벼룩도 소중한 이야기 상대가 됩니다. 빈대나 벼룩을 보는 순간 문득 깨닫게 되는 묵시가 있는데 그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언제 무엇을 통해 말씀하실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