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자서전

사람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true2020 2022. 10. 23. 12:25

▣ 두려움과 감격의 교차 속에서  - 자서전 58

 

철이 들면서부터 "나는 이다음에 무엇이 될까?" 하는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니 과학자가 되어볼까도 헸지만 일본의 수탈에 시달리며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는다고 해도 헐벗고 ぼろを身にまとい 굶주린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줄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마음에 쌓인 슬픔을 없애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숲 속에 누워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이 세상을 저 소리처럼 정답게 만들어야지. 사람들의 얼굴을 꽃처럼 향기롭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몰랐지만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만은 굳어져갔습니다.

 

내 나이 10살 무렵 목사인 윤국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안은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교회를 다녔습니다. 예배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너무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무얼 알아 그러했을까마는 내 마음속에는 그때 이미 하나님의 존재가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삶고 죽음, 인생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12살 때 증조할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문중 어른들만 참석하는 자리였지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기를 쓰고 끼어들었습니다. 묘를 파고 시체를 이장하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순간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갖춘 어른들이 모두 모여 분묘를 열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앙상한 뼛조각こっぺん뿐이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들었던 증조할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하얀 뼈만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의 뼈를 보고 난 후, 나는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증조할아버지도 살아계실 적에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계셨을 텐데…. 그럼, 우리 부모님도 돌아가시면 증조할아버지처럼 하얀 뼈만 남는 건가. 나도 죽으면 그렇게 되는 건가.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나. 죽은 다음엔 아무 생각도 못하고 그저 누워만 있는 건가. 그럼 생각은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집안에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예장을 만들려고 물레에서 뽑은 토끝을 독에 넣어 두었는데 어느 날 밤 그것이 윗마을 오래된 밤나무에 하얗게 널려 있었습니다. 토끝은 한 필 정도의 양이 될 때까지 모았다가 무명을 짜서 자식들 혼례에 쓰는 것인데 우리 고향에서는 이것을 예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한밤중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밤나무에 걸쳐 놓은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한 짓은 아닌 것 같아 동네 사람들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16살 무렵, 13남매 중 다섯 명의 동생이 한 해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도 겪었습니다. 한꺼번에 아이 다섯을 잃은 부모님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끔찍한 일은 우리 집 담장을 넘어 문중에까지 번졌습니다. 멀쩡하던 소가 갑자기 죽어 나가고, 잇따라 말이 죽더니, 하룻밤 새에 돼지가 일곱 마리나 죽어 나갔습니다.

 

집안의 고난은 민족의 고통, 세계의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점점 악랄해지는 일본의 압정과 우리 민족의 비참한 처지를 지켜보며 나의 고민도 커져만 갔습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풀이며 나무껍질을 있는 대로 뜯어다가 끓여 먹어야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동갑인 중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왜 죽었을까. 어린 나이에 무엇이 그토록 괴로왔을까···." 마치 내가 당한 슬픔인 것처럼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신문을 펼쳐 놓은 채 사흘 밤낮을 통곡했습니다.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짐스럽고 귀찮아 감당을 못하다.)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이상한 일이 잇따라 일어나는 것인지, 왜 착한 사람들에게 슬픈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의 산소를 이장하면서 그 뼈를 목격한 이후 삶과 죽음에 관해 의문을 갖게 된 데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나는 종교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듣는 말씀만으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을 시원하게 풀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해진 나는 자연히 기도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영혼의 세계는 과연 있는가? 하나님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신 분인가?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라면 왜 세상의 슬픔을 그대로 보고만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다면 이 세상의 고통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의 비극은 언제 끝날 것인가?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인간은 서로 미워하며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인가? 등 참으로 심각하고 본질적인 질문들이 가슴속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이라 기도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마음의 문제를 하나님께 털어놓고 기도하는 동안에는 고통도 슬픔도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다 급기야 밤을 새우는 날도 하루하루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내 기도에 화답해주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내 평생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16살 되던 부활절 전야였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마음 뒤에 있는 묘두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왜 이토록 슬픔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을 만드셨는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아픔 속에 내버려 두시는 건지, 비참한 조국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눈물을 흘리며 묻고 또 물었습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새우고 난 부활절(1935.4.17)  새벽에 예수님이 내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난 예수님은 "고통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나는 슬픈 얼굴의 예수님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현현한 내 몸이 사시나무 山鳴ヤマナラシ 떨리듯 심하게 떨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터질 듯한 감격이 한꺼번에 엄습했습니다. 예수님은 또렷하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고통받는 인류를 구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라"는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게 그렇게 막중한 임무를 내리시다니요?" 정말 두려웠습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습니다.